논어집주(論語集注) - 17 - 양화(陽貨) - ②
논어집주 (論語集注)
| 논어(論語) - 17 - 양화(陽貨) - ② | |
| 1 | 子曰 性相近也나 習相違也니라. |
| 2 | 자왈 성상근야나 습상원야니라. |
| 3 |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본성은 서로 가까우나 습관에 따라서 서로가 멀어지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
| 4 | The Master said, “By nature, men are nearly alike; by practice, they get to be wide apart.” |
| 논어집주(論語集注) - 17 - 양화(陽貨) - ② |
| 子曰 性相近也 習相遠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본성은 서로 가까우나 습관에 따라서 서로가 멀어지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此所謂性 兼氣質而言者也 氣質之性 固有美惡之不同矣 然以其初而言 則皆不甚相遠也 但習於善則善 習於惡則惡 於是始相遠耳 여기서 말하는 이른바 성이라는 것은 기질과 함께 겸하여 말한 것이다. 기질의 성은 본디 아름답고 추함의 같지 않음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처음을 가지고 말한다면, 모두 서로 많이 멀지는 않다. 단지 선에 습관이 들면 선해지고, 악에 습관이 들면 악해지는 것이니, 여기에서 비로소 서로 멀어지는 것일 따름이다. ○ 程子曰 此言氣質之性 非言性之本也 若言其本 則性卽是理 理無不善 孟子之言性善 是也 何相近之有哉 정자가 말하길, “여기서는 기질의 성을 말하는 것이지 성의 근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 근본을 말한다면 성은 곧 이(理)이므로 理는 선하지 않음이 없다. 맹자가 성은 선하다고 말한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니, 무슨 서로 가깝다는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朱子曰 性相近 是氣質之性 若本然之性則一般無相近 주자가 말하길, “본성이 서로 가깝다는 것은 기질의 성이다. 만약 본연의 성이라면 동일한 것이니, 서로 가깝다는 것은 없다.”라고 하였다. 性是天賦予人 只一同 氣質所稟 却自有厚薄 人有厚於仁而薄於義 餘於禮而不足於智 便自氣質上來 본성이란 하늘이 사람에게 부여한 것으로서 그저 하나처럼 똑같은 것이다. 기질이 품부해준 것에는 오히려 저절로 두터움과 얇음이 있다. 사람 중에 仁에 두텁지만 義에 야박하기도 하고, 禮에 넉넉하지만 智에 부족한 경우도 있는데, 이는 곧 기질로부터 온 것이다. 先有天理了却有箇氣 氣積於質而性具焉 먼저 천리가 있고 나서, 도리어 氣가 있는 것이다. 氣가 質에 쌓여서 性이 거기에 갖추어진다. 質並氣而言 則是形質之質 若生質則是資質之質 質을 氣와 나란히 말하면 이는 형질의 質이고, 만약 나면서부터의 質이라면 이것은 자질의 質이다. 天命之性 若無氣質 却無安頓處 如一勺之水非有物盛之 則水無歸著 하늘이 명한 본성은 만약 기질이 없다면 오히려 안돈할 곳이 없다. 마치 한 국자의 물에게 그것을 담을 물체가 있지 않다면, 물은 귀착할 곳이 없는 것과 같다. 稟得木氣多 則少剛强 稟得金氣多 則少慈祥 推之皆然 나무의 기운을 품부 받음이 많으면, 굳세고 강함이 적고, 쇠의 기운을 품부 받음이 많으면, 자상함이 적다. 이를 미루어 가면, 모두 그러하다. 孔子言性 雜乎氣質言之 故不曰同而曰相近 蓋以爲不能無善惡之殊 但未至如所習之遠耳 공자가 본성을 말씀하실 적에 기질과 섞어서 말하였기 때문에, 그래서 같다고 말하지 않고 서로 비슷하다고 말한 것이다. 대체로 선악의 다름이 없을 수는 없지만, 다만 습관이 들어 멀어진 것과 같은 지경에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생각하였을 뿐이다. 天命之謂性 則通天下一性耳 何相近之有 言相近者 是指氣質之性而言 孟子所謂犬牛人性之殊者 亦指此而言也 하늘이 명한 것을 일컬어 性이라고 한다면, 이는 천하를 통틀어서 하나의 性일 뿐이니, 무슨 서로 비슷하다는 말이 있겠는가? 서로 비슷하다고 말하는 것은 기질의 성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맹자가 말한 소위 개와 소와 사람의 본성이 다르다고 한 것 역시 이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南軒張氏曰 原性之理無有不善 人物所同也 論性之存乎氣質 則人稟天地之精五行之秀 故與禽獸草木異 然就人之中 不無淸濁厚薄之不同而實亦未嘗不相近也 不相近 則不得爲人之類矣 而人賢不肖之相去 或相倍蓰或相什百或相千萬者 則因其淸濁厚薄之不同 習於不善而日遠耳 習者積習而致也 善學者克其氣質之偏以復其天性之本 而其近者亦可得而一矣 남헌장씨가 말하길, “원래 性의 이치에는 선하지 않음이 없고, 이는 사람과 사물이 동일한 바다. 性이 기질에 보존된다는 것을 논한다면, 사람은 천지의 정밀한 것과 오행의 빼어난 것을 품부 받았기 때문에, 금수나 초목과 더불어 다른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안으로 나아가면, 淸濁과 厚薄의 같지 않음이 없지 않지만, 실제로는 또한 일찍이 서로 가깝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서로 가깝지 않다면 사람의 무리가 될 수 없지만, 사람이 어질고 불초함의 상호 거리가 혹은 서로 두 배나 다섯 배가 되기도 하고, 혹은 서로 열 배나 백 배가 되기도 하며, 혹은 서로 천 배나 만 배가 되기도 하는 것은, 곧 그 청탁과 후박의 다름으로 인한 것인데, 不善에 습관이 들면 날로 멀어질 따름이다. 습관이 든다는 것은 습관이 쌓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잘 배우는 사람은 기질의 치우침을 극복하여 제 천성의 근본을 회복하고 또한 그 가까운 것도 역시 하나로 똑같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性之本謂不兼乎氣質而言之者也 旣不兼乎氣質則純以理言耳 理則天地人物一而已矣 何相近之可言哉 경원보씨가 말하길, “性의 근본은 기질을 겸하지 않고서 말하는 것을 일컫는 것이다. 이미 기질을 겸하지 않았다면, 순전히 이치로써 말한 것일 뿐이다. 이치는 곧 하늘과 땅, 사람과 사물에게 모두 하나일 따름이니, 무슨 서로 비슷한 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此章程子專以爲氣質之性 朱子以爲兼氣質而言 兼字尤精 蓋謂之相近 則是未免有些不同處 不可指爲本然之性 然其所以相近者 正以本然之性 寓在氣質之中 雖隨氣質而各爲一性而其本然者常爲之主 故氣質雖殊而性終不甚相遠也 此是以本然之性 兼氣質而言之 非專主氣質而言也 問如何見得性相近 曰 如惻隱羞惡人皆有之 然有惻隱多於羞惡者 亦有羞惡多於惻隱者 雖不盡同 亦不甚相遠 故曰相近 쌍봉요씨가 말하길, “이 장에서 정자는 오로지 기질의 性으로 생각하였고, 주자는 기질을 겸하여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兼이란 글자가 더욱 정밀하다. 대체로 그것을 일컬어 서로 비슷하다고 한다면, 이는 다소 같지 않은 부분이 있음을 면할 수 없으니, 본연의 성이라고 지칭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서로 비슷한 까닭은 바로 본연의 성이 기질 안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비록 기질에 따라서 각자 다른 하나의 性이 되지만, 그 본래 그러한 것이 항상 그 주인이 되므로, 따라서 기질이 비록 다르기는 하지만, 性이 서로 멀어지는 것이 끝내 심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본연의 성으로써 기질을 겸하여 말한 것이지, 오로지 기질을 주인으로 하여 말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누군가 묻기를, “어떻게 하면 性이 서로 가깝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예컨대 측은지심과 수오지심은 사람마다 모두 갖고 있다. 그러나 측은지심이 수오지심보다 많은 사람도 있고, 또한 수오지심이 측은지심보다 많은 사람도 있다. 비록 전부 다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또한 서로 멀어짐이 심하지는 않다. 그래서 서로 가깝다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吳氏曰 習與性成 言性習始此中 人上下之質相去本不甚遠 惟習於善則日造乎高明 習於惡則日淪乎汚下 以是而相遠耳 上知生知安行 何事於習 下愚習於惡則有之 習於善則無矣 上知下愚相去遠矣 又豈待習而然哉 오씨가 말하길, “습관이 오래되어 本性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였는데, 습성이 이 안에서 비롯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사람은 상하의 자질에 있어서 서로 거리가 본래 심하게 멀지는 않았다. 오직 선에 습관이 들면, 날로 고명한 데로 나아가고, 악에 습관이 들면 날로 낮고 더러운 데로 빠져드는 것이니, 이 때문에 서로 멀어졌을 따름이다. 上知者는 나면서부터 알아서 편안하게 행하니, 어찌 습관을 들이는 것을 일삼겠는가? 下愚者는 악에 습관이 들면 그것이 있게 되고, 선에 습관을 들이면 그것이 없어지는 것이다. 상지자와 하우자는 서로의 거리가 먼 것이니, 또 어찌 습관 들기를 기다려 그렇게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伊尹曰 習與性成 是專主氣質而言 習如此 性之成也 遂如此 所以言性在習之後 夫子曰 性相近 習相遠 是兼氣質而言 性如此而習則 未必皆如此 所以言性在習之先 若論天命之性 則純粹至善一而已矣 不可以相近言 此所謂性者兼氣質而言也 天命之性不離乎氣質之性 其初猶未甚相遠 蓋天命之性猶未漓也 赤子之生無有五方 其聲一也 性之相近也如之 長則言語不通飮食不同 有至死莫能相爲者 習之相遠也如之 운봉호씨가 말하길, “이윤이 習與性成(습관이 오래되면 본성이 됨)이라 말했는데, 이는 오로지 기질을 주로 하여 말한 것이니, 습관이 이와 같다면, 본성이 이루어지는 것도 마침내 이와 같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성을 말한 것이 습관의 뒤에 있었던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본성은 서로 비슷하지만, 습관은 서로 멀다고 하였는데, 이는 기질을 겸하여 말한 것으로서, 본성은 이와 같지만, 습관이 들면 반드시 모두 이와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본성을 말함이 습관의 앞에 있었던 것이다. 만약 하늘이 명한 본성을 논한다면, 순수하고 지극히 선하여 모두 동일할 따름이니, 서로 가깝다는 것으로 말할 수 없다. 여기서 말한 성이라는 것은 기질을 겸하여 말한 것이다. 하늘이 명한 본성은 기질의 성에서 떨어질 수 없는데, 그 처음에는 그래도 서로 멀어짐이 아직 심하지 않았다. 대체로 하늘이 명한 본성이 아직 습관에 젖지 않았기 때문이다. 갓난아기가 태어날 적에 다섯 지방의 구분이 없이 그 소리는 똑같으니, 본성이 서로 가까움이 그와 같기 때문이다. 장성하게 되면, 언어는 통하지 않고, 음식도 같지 않게 되며, 죽음에 이르더라도 능히 서로를 위할 수 없음이 있는 것은 습관이 서로 먼 것이 그와 같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人有此形 則有此心 有此心 則稟受此理 性者心中所稟受之理也 纔說性者 則已寓於氣質中矣 非氣質 則性安所寓乎 性善以天地之性言 非天地之性懸空不著乎氣質而自爲一物也 就氣質中指出天地本然賦予之理不雜乎氣質而言之耳 然天地之性 雖不雜乎氣質 亦不離乎氣質 孟子之言性善 指其不雜乎氣質者言之 也乃是純言天地之性也 孔子之言性相近 以其不離乎氣質者言之 也乃是兼言氣質之性也 兼言者 言本然之性 夾帶言氣質之性也 朱子有云 孔子雜乎氣質言之 雜卽兼也 輔氏饒氏推集註兼氣質而言之說 終欠透徹 不得已而發此云 신안진씨가 말하길, “사람에게 이런 형체가 있으면 곧 이런 마음이 있고, 이런 마음이 있으면 곧 이런 이치를 품부 받는 것이다. 性이란 것은 마음속에서 품부 받은 이치다. 조금이라도 性이란 것을 말한다면, 곧 그것은 기질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기질이 아니라면 性은 어디에 깃들 것인가? 性이 선하다는 것은 천지의 성으로써 말한 것이다. 천지의 性은 허공에 매달려서 기질에 붙어있지 않아도 스스로 하나의 사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질 가운데로 나아가서 천지 본연이 부여한 이치가 기질에 섞여 있지 않음을 지적하여 말하였을 따름이다. 그러나 천지의 성은 비록 기질에 섞여 있지 않더라도, 또한 기질에서 떨어지지는 않는다. 맹자가 ‘성은 선하다’고 말한 것은 그것이 기질에 섞여 있지 않음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니, 이는 곧 순수하게 천지의 성을 말한 것이다. 공자님께서 ‘성은 서로 가깝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것이 기질에서 떨어지지 않음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니, 이는 곧 기질의 성을 겸하여 말한 것이다. 겸해서 말한다는 것은 본연의 성을 말함에 있어 기질의 성을 끼어서 함께 말하는 것이다. 주자는 공자께서 기질에 섞여 있다고 말씀하셨다고 하였는데, 섞여 있다는 것이 바로 兼한다는 것이다. 보씨와 요씨는 집주의 ‘기질을 겸하여 말한다’는 설을 미루어 나갔지만, 끝내 투철함이 부족하여 부득이하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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