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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講座

春望詞 四首(춘망사 4수) - 설도(薛濤)

by 권석낙 2019. 10. 7.




              春望詞 四首(춘망사 4수)봄을 기다리는 노래 - 설도(薛濤)


 (一)     

              花開不同賞 (화개불동상) : 꽃 피어도 함께 즐길 이 없고 

              花落不同悲 (화락불동비) : 꽃 져도 함께 슬퍼할 이 없네

              欲問想思處 (욕문상사처) : 묻노니 그대는 어디에 계신고

              花開花落時 (화개화락시) : 때맞쳐 꽃들만 피고 지네


(二)       

              攬草結同心 (람초결동심) : 풀을 따서 한마음으로 맺어

              將以遣知音 (장이견지음) : 곡조를 잘아는 님에게 보내려 하는데

              春愁正斷絶 (춘수정단절) : 봄 시름은 속절없이 끊기고

              春鳥復哀吟 (춘조복애음) : 봄 새들은 다시와 애달피 우네


(三)       

              風花日將老 (풍화일장로) :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佳期猶渺渺 (가기유묘묘) :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不結同心人 (불결동심인) :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空結同心草 (공결동심초) :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랴는고


(四)       

              那堪花滿枝 (나감화만지) : 어찌 견딜까 꽃 가득한 나뭇가지

              煩作兩相思 (번작양상사) : 이리도 사모하는 마음 어쩔수 없네

              玉箸垂朝鏡 (옥저수조경) : 방울방울 눈물이 아침 거울에 떨어지는데

              春風知不知 (춘풍지불지) : 봄바람은 아는지 모르는지  



춘망사(春望詞)


당나라 제일의 규수 시인, 중국의 황진이라 할 수 있는 설도(薛濤,대략 770~832)가 있다.

 '동심초(同心草)'의 노랫말이 바로 이 설도의 시다.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風花日將老 (풍화일장로),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佳期猶渺渺 (가기유묘묘);
    무어라 맘과 맘을 맺지 못하고    不結同心人 (불결동심인),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가.     空結同心草 (공결동심초).


동서고금에 애송되어온 시를 지은 설도.

그녀의 아버지가 여덟 산 난 딸아이의 재주를 시험해 보려고

 '뜰의 오동나무가 구름 위로 솟으니……'하자,

설도는 '가지가 남북조(南北鳥)를 맞이하고, 잎이 동서풍(東西風)을 보낸다.' 라고 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성도(成都)의 장관들이 어릴 적부터 술자리에 불러

시를 짓게 한 것이 가기(歌妓)로서 기적(妓籍)에 오르게 된 동기가 되었다.

설도는 시도 좋으려니와 행서 또한 오묘하기 그지없어,

그녀의 친필 시 한 수 얻어 가지는 것이 당시 지식인들의 소망이었다.

만년에는 손수 붉게 물들인 종이를 만들어 시를 썼다 하니 대단한 풍류이다.

이를 설도전(薛濤箋)이라 했는데, 성도 사람 누구나가 가지고 싶어하는

당대의 명물이었다.

만년에는 두보의 초당이 있고, 사망상여가 탁문군을 유혹했던

탄금대 근처 완화계에서 살다가 죽었다.

성도에 남아 있는 그녀의 유적은 설도전을 만들 때 물을 길렀다는 설도정(薛濤井),

설도전을 만든 현장인 완전정(浣箋亭),

그 다락에 기대어 시를 짓고 설도전에 옮겼다는 강변의 음시루(吟詩樓) 초석,

그리고 시(詩)에 자주 등장하는 대나무 1백40여 종이 숲을 이루며

망강공원(望江公園) 안에 잘 보존돼 있었다




 설도 [ 薛濤 ]



<중국 사천성 성도(成都) 설도기념관에 그려져있는 설도와 춘망사 제4수.

망강루 공원안에 있는 설도의 묘>. 


성도(成都)에 가면 당(唐)나라의 유명한 여류 시인의 낭만과 만날 수 있다.

이 시인의 이름은 설도(薛濤), 자는 홍도(洪度)이다.

 

원래 장안(長安) 사람이었으나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촉(蜀) 땅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는 하층 관리였는데, 촉 땅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청상과부에다 집안마저 가난한 탓에 설도는 악적(樂籍)에 들어

악기(樂妓)가 되었다.




<망강루 공원 안에 있는 설도정>

 

그러나 설도는 선천적으로 음률에 능통하여 시가를 잘 지었고,

당시 유명한 사대부들과 즐겨 교류하였다.

바로 위고(韋皐)·원진(元稹)·백거이(白居易)·두목(杜牧) 등의

기라성 같은 문인들과 창화(唱和)를 나누었다.

 

그녀는 성도의 백화담(白花潭)에 살면서 직접 송화지(松花紙)와

짙은 소채지(小彩紙)를 만들어  당시의 유명 인사들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것을 '설도전(薛濤箋)'이라고 불렀다.

 




위고는 천서절도사(川西節度使)를 맡은 뒤에 그녀를 불러 함께 술을 마시고 시를 지었다.

그는 황제에게 주청하여 그녀를 교서랑(校書郞)에 제수하려고 하였다.

비록 호군(護軍)의 저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지만,

그 뒤로 사람들은 그를 '설교서(薛校書)' 혹은 '여교서(女校書)'라고 불렀다.

 

그녀는 완화계(浣花溪)에 거처를 두고 살면서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고 한다.

만년에 두보(杜甫)의 초당으로서 유명한 성도의 서교(西郊)에 있는

완화계(일명 백화담) 근처 만리교 근방으로 은거하였다.

 

이 근처는 양질의 종이가 생산되는 곳이어서 설도는

특히 소형인 심홍색 종이를 만들게 하여 그것을 이용하여

촉의 명사들과 시를 증답(贈答)하였다. 이것이 풍류인들 사이에 평판이 높아,

이런 식의 종이를 ‘설도전(薛濤箋)’ 또는 ‘완화전(浣花箋)’이라 하여

크게 유행하였다.

 

만당(晩唐)의 이상은(李商隱)의 시에도 “완화의 전지(箋紙),

도화의 색”이란 구절로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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