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집주(論語集注) - 14 - 헌문(憲問) - ㉒
논어집주 (論語集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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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어(論語) - 14 - 헌문(憲問) - ㉒ | |
| 1 | 陳成子 弑簡公이어늘 孔子 沐浴而朝하사 告於哀公曰 陳恒이 弑其君하니 討之하소서 公曰 告夫三子하라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라 不敢不告也하니 君曰 告夫三子者온여 之三子하여 告하신대 不可라하여늘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라 不敢不告也니라. |
| 2 | 진성자 시간공이어늘 공자 목욕이조하사 고어애공왈 진항이 시기군하니 토지하소서 공왈 고부삼자하라 공자왈 이오종대부지후라 불감불고야하니 군왈 고부삼자자온여 지삼자하여 고하신대 불가라하여늘 공자왈 이오종대부지후라 불감불고야니라. |
| 3 | 진성자(陳成子)가 간공(簡公)을 시해하자, 공자께서 목욕재계하고 조정에 나아가 애공(哀公)에게 아뢰시기를 “진항(陳恒)이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토벌하소서.”라고 하니, 애공이 말하기를, “저 (정권을 맡은) 세 가문에게 말하시오.”라고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대부(大夫)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었는데, 임금께서 저 삼가(三家)에게 말하라고 하시는구나!”라고 하시고, 삼가(三家)에게 가서 말씀하셨으나 통하지 않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대부(大夫)의 뒤를 따르게 했기 때문에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하셨다. |
| 4 | Chan Ch'ang murdered the duke Chien of Ch'î. Confucius bathed, went to court and informed the duke Âi, saying, “Chan Hang has slain his sovereign. I beg that you will undertake to punish him.” The duke said, “Inform the chiefs of the three families of it.” Confucius retired, and said, “Following in the rear of the great officers, I did not dare not to represent such a matter, and my prince says, 'Inform the chiefs of the three families of it.’” He went to the chiefs, and informed them, but they would not act. Confucius then said, “Following in the rear of the great officers, I did not dare not to represent such a matt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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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어집주(論語集注) - 14 - 헌문(憲問) - ㉒ |
| 陳成子弑簡公 진성자(陳成子)가 간공(簡公)을 시해하자, 成子 齊大夫 名恆 簡公 齊君 名壬 事在春秋哀公十四年 진성자는 제나라 대부이고, 이름은 항이다. 간공은 제나라 임금이고, 이름은 임이다. 이 일은 춘추전 애공 14년에 실려 있다. 左傳 齊簡公之在魯也(簡公 悼公陽生子 壬也 時從其父奔在魯) 闞止有寵焉 及卽位使爲政 陳成子憚之 驟顧諸朝 五月壬辰 成子殺子我(卽闞止) 庚申執公于舒州 甲午殺之 孔丘三日齊而請伐齊三 公曰 魯爲齊弱 久矣 子之伐之 將若之何 對曰 陳恒弑其君 民之不與者半 以魯之衆 加齊之半 可克也 公曰 子告季孫 孔子辭(辭不告) 退而告人曰 以吾從大夫之後也 故不敢不言 춘추좌전에 따르면, 제간공이 노나라에 있었다(간공은 도공 양생의 아들 임이다. 당시에 그 아비를 따라 노나라에 망명하고 있었다). 감지가 총애를 받았는데, 간공이 즉위함에 이르자 그에게 정사를 하도록 하였다. 진성자가 이를 꺼려서, 조정에서 그를 자주 돌아보았다. 5월 임신일에 진성자는 자아를 죽였고, 경신일에 서주에서 공을 붙잡아 갑오일에 죽였다. 공구는 3일동안 재계하고 제나라를 정벌하기를 3번이나 청하였다. 노애공이 말하길, “노나라는 제나라에 의해 약하게 된 지 오래되었다. 그대는 제나라를 치고자 하는데, 장차 어떻게 하려고 하는가?”라고 하였다. 대답하여 말하길, “진항이 자기 임금을 시해하였는데, 백성 중에 찬성하지 않는 자가 절반입니다. 노나라의 많은 병사를 제나라의 절반에 더한다면,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노애공이 말하길, “그대는 계손씨에게 고하라!”고 하였다. 공자는 사절하고(辭는 고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물러 나와 사람들에게 말하길, “나는 대부의 뒤를 따르기 때문에,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하였다. 孔子沐浴而朝 告於哀公曰 陳恆弑其君 請討之 공자께서 목욕재계하고 조정에 나아가 애공(哀公)에게 아뢰시기를 “진항(陳恒)이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토벌하소서.”라고 하니, ○ 是時孔子致仕居魯 沐浴齊戒以告君 重其事而不敢忽也 臣弑其君 人倫之大變 天理所不容 人人得而誅之 況鄰國乎 故夫子雖已告老 而猶請哀公討之 이때 공자님께서는 벼슬을 그만두고 노나라에서 기거하고 있었는데, 목욕재계하고 임금에게 고한 것은 그 일을 중하게 여겨 감히 소홀히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하가 그 임금을 시해한 것은 인륜의 큰 변고이자 천리에 용납될 수 없는 바이니, 사람마다 그를 주살할 수 있는데, 하물며 옆 나라임에야? 이런 까닭으로 공자 선생님께서는 비록 이미 연로하여 벼슬에서 물러났지만 그래도 그를 토벌하자고 애공에게 청하셨던 것이다. 張子曰 天子討而不伐 諸侯伐以不討 故雖湯武之擧 不謂之討而謂之伐 陳恒弑其君 孔子請討之 此必因周制 鄰有弑逆 諸侯當不請而討 장자가 말하길, “천자는 토벌을 하지 정벌하지는 않고, 제후는 정벌하지 토벌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비록 탕임금과 무왕의 거사일지라도, 그것을 일컬어 토벌이라고 말하지 않고 정벌이라고 말한 것이다. 진항이 제 임금을 시해하자, 공자께서 그를 토벌하자고 청하였는데, 이것은 반드시 주나라 법제를 따른 것이니, 이웃나라에 임금을 시해한 반역이 있으면, 제후는 마땅히 천자에게 청하지 않고도 천자를 대신하여 토벌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公曰 告夫三子 애공이 말하기를, “저 (정권을 맡은) 세 가문에게 말하시오.”라고 하였다. ○ 三子 三家也 時政在三家 哀公不得自專 故使孔子告之 세 대부란 삼가를 말한다. 당시 정치는 삼가의 손에 달려 있었고, 애공은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없었으므로, 공자로 하여금 그들에게 아뢰도록 한 것이다.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君曰 告夫三子者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대부(大夫)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었는데, 임금께서 저 삼가(三家)에게 말하라고 하시는구나!”라고 하시고, 孔子出而自言如此 意謂弑君之賊 法所必討 大夫謀國 義所當告 君乃不能自命三子 而使我告之邪 공자님께서 나오셔서 스스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 뜻은 ‘임금을 시해한 도적은 법에 따라 반드시 토벌해야 하고, 대부는 나라를 위해 도모하기 때문에 의리상 반드시 아뢰어야 한다. 그런데 임금께서 스스로 세 대부에게 명령하지 못하고 나로 하여금 대신 아뢰게 하였다.’라고 말한 것이다. 之三子告 不可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삼가(三家)에게 가서 말씀하셨으나 통하지 않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대부(大夫)의 뒤를 따르게 했기 때문에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하셨다. 以君命往告 而三子魯之强臣 素有無君之心 實與陳氏聲勢相倚 故沮其謀 而夫子復以此應之 其所以警之者 深矣 임금의 명령으로 가서 고하였으나, 세 대부는 노나라의 강포한 신하여서 평소 임금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갖고 있었고, 실세로 진씨와 더불어 그 명성과 세력을 서로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계획을 저지하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공자께서는 다시 이로써 응대하셨으니, 이는 그들을 경계하는 바가 매우 깊은 것이었다. 問當是之時魯之兵柄分屬三家 哀公雖欲從夫子之言 然不告三子 則兵不可出 而孔子之意 乃不欲往告 何哉 朱子曰 哀公誠能聽孔子以討齊亂 則亦召夫三子而以大義詔之耳 理明義正 雖或不從而孰敢違之哉 今無成命而反使孔子往而告之 則是可否之權 決於三子 而不決於公也 況魯之三家 卽齊之陳氏 其不欲討之 必矣 是則 不惟名義之不正 而事亦豈可得而成哉 然夫子以君命之重也 故不得已而一往焉 而冀其萬一之或從也 而三子果以爲不可 則復正言之以明從違在彼 雖不敢必而 君臣大倫 所係之重 雖欲不告而不敢以已 其所以警夫三子者 亦深矣 누군가 묻기를, “이 때에 당하여 노나라의 병권은 三家에게 나뉘어 속해 있었습니다. 노애공이 비록 공자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할지라도, 三子에게 고하지 않으면 병사를 내보낼 수가 없었음에도, 공자님의 뜻은 도리어 가서 고하지 않고자 하신 것은 어째서입니까?”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길, “애공이 진정으로 능히 공자의 말씀을 들어서 제나라의 난을 토벌하려고 하였다면, 역시 저 三子를 불러다가 대의로써 그들에게 일러주는 것일 따름이다. 이치가 밝고 의로움이 올바르니, 비록 혹자가 따르고 싶지 않더라도, 누가 감히 그것을 거스르겠는가? 지금 君命을 이룸이 없이 도리어 공자로 하여금 가서 그들에게 고하게 한다면, 이는 가부의 권한이 三子에게서 결정되는 것이지 애공에게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노나라의 三家가 제나라의 진씨에 나아가서 그들을 토벌하지 않고자 할 것은 필연적인 것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다면, 단지 명분과 의로움이 올바르지 않을 뿐만이 아니기에, 일 또한 어찌 이루어질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공자께서는 임금의 명이 중한지라 부득이하게 그들에게 한 번 갔던 것이고, 또한 그들이 만일 혹시라도 따를 수도 있음을 희망했던 것이다. 그러나 三子는 과연 불가하다고 여겼기에, 다시금 바로 그것을 말함으로써 따르고 거스르는 것은 저들에게 달려 있음을 밝히신 것이다. 비록 감히 장담할 수 없지만, 군신의 대륜은 얽매인 바가 중하기 때문에, 비록 고하고 싶지 않았지만, 감히 이로써 그만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공자께서 저 三子를 경계하신 바가 또한 매우 깊으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夫子初告時 眞箇欲討陳恒 後人知聖人此言可以警三子 非是聖人託討成子以警三子 聖人之心 不如是迂曲 공자께서 처음 고할 적에는 진짜로 진항을 토벌하고자 하셨다. 후세 사람들은 성인의 이 말씀이 저 三子를 경계할 수 있는 것임을 알았지만, 이것은 성인께서 진성자를 토벌하는 것에 의탁하여 삼자를 경계하신 것이 아니다. 성인의 마음은 이와 같이 우회하여 구불구불하지는 않았다. 新安陳氏曰 以吾已致仕 從大夫之後 尙激於義 不敢不告 則正爲君卿大夫者 當何如警之 在此 신안진씨가 말하길, “내가 이미 벼슬을 그만두었지만 대부의 뒤를 따르니 아직도 의로움에 激情하여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니, 그렇다면 바로 임금의 경과 대부가 된 자가 마땅히 어떻게 경계해야 하는지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程子曰 左氏記孔子之言曰 陳恆弑其君 民之不予者半 以魯之衆 加齊之半 可克也 此非孔子之言 誠若此言 是以力不以義也 若孔子之志 必將正名其罪 上告天子 下告方伯 而率與國以討之 至於所以勝齊者 孔子之餘事也 豈計魯人之衆寡哉 當是時 天下之亂 極矣 因是足以正之 周室其復興乎 魯之君臣 終不從之 可勝惜哉 정자왈, “좌씨가 기록한 공자의 말은 이렇다. 진항이 그 임금을 시해였는데, 백성 중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 반이다. 노나라의 많은 백성에 제나라 백성 반을 더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 이것은 공자의 말이 아니다. 진짜로 이 같은 말이라면, 이것은 힘으로 하는 것이지 의로움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공자의 뜻이라면, 반드시 그 죄에 대하여 명분을 바르게 하고, 위로는 천자에게 고하고, 아래로는 제후들에게 고하여, 함께 하는 나라들을 이끌어 토벌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제나라를 이기는 방법에 이르러서는 공자님에게 있어서 부차적인 나머지 일에 불과하였을 것이니, 어찌 노나라 사람들의 많고 적음을 따졌겠는가? 그 당시에 천하의 어지러움은 극에 달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그것을 충분히 바로잡을 수 있고 주왕실도 부흥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노나라의 임금과 신하들은 결국 이 계책을 따르지 않았으니, 참으로 너무 애석하구나!”라고 하였다. 問程子以左氏所記爲非 夫子之言然 則夫子之戰 將不復計其强弱而獨以大義驅之耶 朱子曰 程子之意 以爲夫子告魯 當明君臣之義 以見弑逆大惡 天下所不容 人人得誅之 況在鄰國而可以不討之乎 而其爲討 則必請其君 以上告天子 下告方伯 擧天下之兵以誅之 以天下之兵 討天下之賊 彼雖衆强 奚以爲哉 固不當區區獨較齊魯之强弱 而以天下之公義爲一國之私也 左氏所記 蓋傳聞之謬 以衆人之腹爲聖人之心耳 누군가 묻기를, “정자는 좌씨가 기록한 것이 옳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공자님의 말씀이 그러하다면, 공자님의 전쟁은 장차 더 이상 그 강약을 따지지 않고서 그저 대의로써만 몰아가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길, “정자의 뜻은 공자께서 노나라에 고하면서, 마땅히 군신의 의로움을 밝힘으로써, 임금을 시해하고 반역을 일으킨 대악이 천하에 용납되지 않는 바이고, 사람마다 모두 주살할 수 있으며, 하물며 이웃나라에서 이것을 토벌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가 토벌을 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제 임금에게 청하여 위로는 천자에게 고하고 아래로는 方伯에게 고하여, 천하의 병사로써 그를 토벌할 것이니, 천하의 병사로 천하의 도적을 토벌한다면, 저들이 아무리 숫자가 많고 강하다고 한들, 이로써 무엇을 하겠는가? 원래부터 단지 구구하게 제나라와 노나라의 강약을 따져서 천하의 公義를 일국의 사사로움으로 삼는 것은 부당한 짓이다. 좌씨가 기록한 것은 아마도 전해 들은 바의 오류일 것이니, 이는 뭇사람의 창자를 성인의 마음으로 삼는 짓일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春秋之時 三綱淪矣 孔子請討弑逆 此天下之大義也 斯事一正 三綱可整 天下事可次第擧矣 沐浴而朝 敬其事以卜天意也 춘추시대에는 삼강이 타락하였다. 공자께서 시해와 반역을 토벌하자고 청하였는데, 이는 천하의 대의였다. 이 일이 한번 바르게 되면, 삼강도 정돈될 수 있고, 천하의 일도 차근차근 거행될 수 있었을 것이다. 목욕하고 조회한 것은 그 일을 공경함으로써 하늘의 뜻을 점치고자 함이다. 胡氏曰 春秋之法 弑君之賊 人得而討之 仲尼此擧 先發後聞 可也 호씨가 말하길, “춘추의 법에 의하면, 임금을 시해한 도적은 사람마다 누구나 토벌할 수 있었다. 따라서 중니의 이 거사는 먼저 발동하고 나중에 보고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던 일이다.”라고 하였다. 問程子以爲必告之天子 胡氏乃以先發後聞之說 何也 朱子曰 考之春秋 先王之時 疑必自有此法 凡弑君者 人人得而討之 如漢所謂天下共誅之者 然事非一槩 告與不告 又在乎時義之如何 使其地近於天子而可告 事未迫遽而得以告 力之不足以敵 而不得不告 則告之而俟命以行 甚則或不俟命而遂行 皆可也 使其地之相去也遠 其事幾之來也不可少緩 吾之力又足以制之 而乃區區焉 徇請命之小節 忘逆賊之大罪 使彼得以植其根固其黨 或遂奔逸而不可以復得 則任其事者 亦不免乎春秋之責矣 누군가 묻기를, “정자는 반드시 천자에게 고해야 한다고 여겼지만, 호씨는 도리어 먼저 발동하고 나중에 보고해도 좋다는 말을 하였는데, 무엇 때문입니까?”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길, “춘추에서 고증해보면, 선왕의 시대에, 반드시 당연히 이러한 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무릇 임금을 시해한 자는 사람마다 모두 토벌할 수 있었으니, 예컨대 한나라가 말한 ‘천하가 함께 주벌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이란 항상 일률적인 것이 아니다. 고하고 고하지 않고는 또한 당시에 합당한 바가 어떠한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만약 그 땅이 천자와 가까워서 고할 수 있고, 일이 아직 급박하거나 갑작스럽지 않아서 고할 수 있으며, 힘이 부족하여 대적할 수 없어서 고하지 않을 수 없다면, 천자에게 고하여 그 명을 기다려 행해야 한다. 심한 경우에는 혹시라도 명을 기다리지 않고 마침내 행할지라도 모두 괜찮은 것이다. 만약 그 땅이 서로 거리가 멀고, 그 일이 거의 다가와서 조금이라도 늦출 수가 없으며, 내 힘 도한 충분히 그들을 제압할 수 있음에도, 도리어 구구히 명을 청하는 작은 절차를 따라서 역적이 큰 죄임을 잊고, 저들로 하여금 그 뿌리를 내리고 그 무리를 굳세게 할 수 있도록 하여 혹 마침내 도주하여 다시 붙잡을 수 없도록 한다면, 그 일을 맡은 사람은 또한 춘추의 책망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程子所謂上告天子者 經也 胡氏所謂先發後聞者 權也 然先發後聞 謂魯也 非謂孔子也 운봉호씨가 말하길, “정자가 말한 ‘위로 천자에게 고한다’는 것은 經道이고, 호씨가 말한 ‘먼저 조치하고 나중에 보고한다’는 것은 權道다. 그러나 먼저 조치하고 나중에 보고하는 것은 노나라를 말한 것이지, 공자를 말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厚齋馮氏曰 是年西狩獲麟 春秋絶筆焉 而不復書陳恒之事 蓋有所傷感焉 而魯之事不可爲矣 후재풍씨가 말하길, “이 해에 서쪽으로 巡狩하여 기린을 잡았는데, 춘추는 여기에서 絶筆하였고, 더 이상 진항의 일을 쓰지 않았다. 아마도 이것 때문에 마음이 상한 바가 있고, 또한 노나라의 일을 어찌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沐浴而朝 蓋欲齊戒積誠以感君心也 獲麟在哀公十四年之春 請討在是年之夏 使此請聖人得遂其志 則三綱復正 周室復興 春秋可不必作矣 惟此請之不遂 此春秋所以不得不作也 春秋作而亂賊懼 雖不得扶植當世之三綱 而可以扶植萬世之三綱焉 신안진씨가 말하길, “목욕하고 조회한 것은 대체로 재계하여 정성을 쌓아서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키고자 한 것이다. 기린을 잡은 일이 애공 14년의 봄에 있었고, 토벌을 청한 일은 이 해의 여름에 있었다. 만약 이 청에 있어서 성인께서 그 뜻을 이룰 수 있었다면, 삼강이 다시 바르게 될 것이고, 주왕실이 부흥할 것이니, 춘추는 아마도 반드시 지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오직 이 청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 이것이 바로 춘추를 짓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춘추가 지어지자 반란을 일으키는 역적들이 두려워했으니, 비록 당시 세상의 삼강을 扶植(뿌리 내리게 도와줌)할 수 없었지만, 만세의 삼강은 부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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