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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語♡集注

논어집주(論語集注) - 14 - 헌문(憲問) - ⑮

by 권석낙 2026. 6. 14.
논어집주(論語集注) - 14 - 헌문(憲問) - ⑮ | 논어집주 (論語集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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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論語) - 14 - 헌문(憲問) - ⑮
1子曰 臧武仲이 以防으로 求爲後於魯하니 雖曰不要君이나 吾不信也하노라.
2자왈 장무중이 이방으로 구위후어로하니 수왈불요군이나 오불신야하노라.
3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장무중(臧武仲)이 방읍(防邑)을 점거하고서 노(魯)나라에 후계자를 삼아줄 것을 요구하였으니, 비록 임금을 협박하지 않았다고 말하나 나는 믿지 않는다.”라고 하셨다.  
4The Master said, “Tsang Wû-chung, keeping possession of Fang, asked of the duke of Lû to appoint a successor to him in his family. Although it may be said that he was not using force with his sovereign, I believe he w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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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집주(論語集注) - 14 - 헌문(憲問) - ⑮
子曰 臧武仲以防求爲後於魯 雖曰不要君 吾不信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장무중(臧武仲)이 방읍(防邑)을 점거하고서 노(魯)나라에 후계자를 삼아줄 것을 요구하였으니, 비록 임금을 협박하지 않았다고 말하나 나는 믿지 않는다.”라고 하셨다.  

防 地名 武仲所封邑也 要 有挾而求也 武仲得罪奔邾 自邾如防 使請立後而避邑 以示若不得請 則將據邑以叛 是要君也
防은 지명이고, 장무중이 봉해진 읍이다. 要라는 말은 무엇을 끼고서 요구한다는 말이다. 장무중이 죄를 얻어 주나라로 도망쳤다가 주에서 방읍으로 갔고, 사신을 보내 자기 아들을 후계자로 세워주면 방읍을 떠나겠다고 청하였다. 만약 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장차 방읍을 점거하여 모반을 일으킬 생각을 보여주었으니, 이것은 임금에게 강요한 것이다.

左傳襄公二十三年 季武子無適子 公彌長(卽公鉏) 而愛悼子欲立之 訪於臧紇 臧紇爲立之 季氏以公鉏爲馬正(家司馬) 孟孫惡臧孫 季孫愛之 孟莊子疾豊點(孟氏之卿) 謂公鉏苟立羯(莊子庶子) 請讐臧氏 孟孫卒 公鉏奉羯立之 孺子秩(孟孫長子)奔邾 臧孫入哭甚哀 出孟氏閉門告季孫曰 臧氏將爲亂 季氏不信 臧孫聞之戒(爲備也) 孟氏將辟 藉除於臧氏(辟穿藏也 於臧氏借人除葬道) 臧孫使正夫(隨正) 助之 除於東門甲從己 而視之 孟孫又告 季孫怒命攻臧氏(見其有甲故) 臧紇斬鹿門之關 以出奔邾 臧賈臧爲出在鑄(二人乃宜叔娶鑄國所生 與紇兄弟也) 臧武仲 使告臧賈 且致大蔡焉(大龜出蔡因號大蔡) 曰紇不佞失守宗祧 敢告不弔紇之罪 不及不祀 子以大蔡納請其可 賈再拜受龜 使爲以納請 遂自爲也 臧孫如防 使來告曰 紇非能害也 知不足也(言使甲從己 但慮事淺耳) 非敢私請 苟守先祀 無廢二勳(文仲與宜叔) 敢不避邑 乃立臧爲 臧紇致防而奔齊
좌전 양공 23년에 따르면, 계무자에게 적자(嫡子)가 없었는데, 공미(즉, 공서다)가 제일 나이가 많았지만, 도자를 사랑하여 그를 후사로 세우고자 하였다. 장흘(장무중)을 찾아갔는데, 장흘이 그를 후사로 세워주었다. 계씨는 공서를 마정(家의 司馬다)으로 삼았다. 맹손은 장손을 미워하였지만 계손은 그를 좋아하였다. 맹장자가 병이 나자, 풍점(맹씨의 卿이다)이 공서에게 말하길, 만약 갈(맹장자의 서자다)을 후사로 세운다면, 장씨와 원수가 되기를 청하라고 하였다. 맹손이 죽자, 공서는 갈을 받들어 그를 후사로 세웠다. 유자 질(맹손의 장자다)은 주나라로 도망쳤다. 장손은 들어가 곡을 하였는데 매우 애통해하였다. 나가자, 맹씨는 문을 닫고 계손에게 고하여 말하길, 장씨는 장차 난을 일으킬 것이라고 하였으나, 계씨는 믿지 않았다. 장손이 이를 듣고서 경계하였다(방비를 한 것이다). 맹씨가 장차 장사를 치를 적에 장씨에게서 사람을 빌려 장례 치르는 길을 소제하고자 하였다(辟은 穿藏, 즉 葬事다. 장씨에게서 사람을 빌려 葬道를 소제한 것이다). 장손은 正夫(隨正)로 하여금 그것을 돕도록 하였다. 동문에서 소제할 적에, 장손은 갑병들이 자신을 따르게 하고 그들을 감시하자, 맹손은 다시 고하였다. 계손은 노하여 장씨를 공격하라고 명하였다(그에게 갑병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장흘은 녹문의 關을 베고서 출국하여 邾나라로 달아났다. 장가와 장위(두 사람은 바로 의숙이 鑄나라에서 여자를 얻어 낳은 자식들이니, 장흘과는 형제 사이다)는 도망쳐 나와서 鑄나라에 머물렀다. 장무중은 사람을 시켜 장가에게 알리고, 또한 大蔡(큰 거북이 채나라에서 나오므로 이로 인해 대채라고 불렀다)를 주었다. 말하길, ‘나 장흘은 말재주가 없어서 종묘의 제사를 지키지 못하였다. 감히 고하건대, 조문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나 장흘의 죄가 제사를 지내지 못함에 이르지는 않지만, 네가 대채를 받아서 그것을 할 수 있기를 청한다.’고 하였다. 장가는 두 번 절하고 거북이를 받아서, 장위로 하여금 그 요청을 받아들이도록 하자, 장위는 마침내 스스로 후사가 되었다. 장손(장흘)은 防읍으로 가서 노나라에 사신을 보내와 알려 말하길, ‘저 장흘은 해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혜가 부족하였을 따름입니다(갑병으로 하여금 자신을 따르게 한 것은 그저 사려가 얕았을 뿐이라고 말한 것이다). 감히 사사로이 청하는 것이 아니라, 만약 두 분의 공훈(문중과 의숙이다)이 폐지됨이 없다면, 어찌 감히 방읍에서 피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마침내 장위를 후사로 세워주자, 장흘은 방읍을 버리고 제나라로 망명했다.

○ 范氏曰 要君者無上 罪之大者也 武仲之邑 受之於君 得罪出奔 則立後在君 非己所得專也 而據邑以請 由其好知而不好學也
범씨가 말하길, “임금을 강요하는 것은 윗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니, 죄 중에서 큰 것이다. 장무중의 식읍은 임금에게서 받은 것이다. 죄를 짓고 도망쳐나갔으니, 곧 후계자를 세우는 것은 임금에게 달려있는 일이지, 자신이 오로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런데도 방읍을 점거하고 청을 하였으니, 이는 그가 지혜를 좋아하였을 뿐 배움을 좋아하지 아니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慶源輔氏曰 凡人溺於智而不知學 不鑿以爲私則必蕩而失正 武仲二病皆有之 且意萌於中 迹著於外 雖欲欺人而人之視己如見己肺肝 然武仲之智而不足以知此 則亦以好智而不好學之故也
경원보씨가 말하길, “무릇 사람들이 꾀에 빠져서 배울 줄을 모를 경우, 한 곳에 뚫고 들어가 사욕을 위하는 것이 아니면, 반드시 방탕하여 올바름을 잃게 되는데, 장무중은 이 두 가지 병폐를 다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마음속에 뜻이 싹트면 그 자취가 밖으로 드러났으니, 비록 남을 속이고자 하여도 사람들이 자기를 보는 것이 마치 자기 간과 폐를 보듯이 하였음에도, 장무중의 지혜로는 이것을 알기에 부족하였으니, 이는 역시 꾀를 좋아하면서도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楊氏曰 武仲卑辭請後 其跡非要君者 而意實要之 夫子之言 亦春秋誅意之法也
양씨가 말하길, “장무중이 낮은 말로 후계자를 세워달라고 청한 것은 그 자취는 임금을 강요한 것이 아니지만 그 뜻은 사실상 강요한 것이다. 공자 선생님의 말씀은 역시 뜻을 비판하는 춘추필법이다.”라고 하였다.

和靖尹氏曰 據邑以請立 非要君而何如 不知義者 將以武仲之存先祀爲賢 故夫子正之
화정윤씨가 말하길, “읍을 점거하고 후사를 세워달라고 요청한 것이 임금을 협박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義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장무중이 선조의 제사를 보존하고자 했던 것을 어진 일로 여길 것이기 때문에, 공자께서 이를 바로잡으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武仲只當請後 不當據邑 夫子不罪其請 罪其據邑也 使武仲請後 果以防爲言 則要君之迹彰而易見 唯不以防爲言 則要君之心隱而難知 旣用智以要君 又欲以欺世 此夫子之言 所以爲春秋誅意之法也
쌍봉요씨가 말하길, “장무중은 그저 후사를 세워달라고 청하는 것만이 마땅하였지, 방읍을 점거하는 것은 부당하였다. 공자께서는 그 청한 것에 죄를 묻지 않았고, 그가 읍을 점거한 것에 죄를 물었던 것이다. 만약 장무중이 후사를 세워달라고 청하면서 과감하게 방읍을 가지고 말을 하였다면, 임금을 협박하는 자취가 환히 드러나서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방읍을 가지고 말을 하지 않는다면, 임금을 협박하는 마음이 은미하니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이미 꾀를 써서 임금을 협박하였으면서도 다시 이로써 세상을 속이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자님의 말씀이 춘추의 ‘그 뜻을 주벌하는 법’이 된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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