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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語♡集注

논어집주(論語集注) - 14 - 헌문(憲問) - ⑯

by 권석낙 2026. 6. 14.
논어집주(論語集注) - 14 - 헌문(憲問) - ⑯ | 논어집주 (論語集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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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論語) - 14 - 헌문(憲問) - ⑯
1子曰 晋文公은 譎而不正하고 齊桓公은 正而不譎하니라.
2자왈 진문공은 휼이불정하고 제환공은 정이불휼하니라.
3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진나라 문공은 남을 속이는 계책을 쓰고 바른 도리를 행하지 않았으며, 제나라 환공은 바른 도리를 실행하고 남을 속이는 계책을 쓰지 않았다.”라고 하셨다. 
4子曰く、晋の文公は譎りて正しからず。斉の桓公は正しくして譎らず。
5The Master said, “The duke Wan of Tsin was crafty and not upright. The duke Hwan of Ch'î was upright and not craf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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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집주(論語集注) - 14 - 헌문(憲問) - ⑯
子曰 晉文公譎而不正 齊桓公正而不譎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진나라 문공은 남을 속이는 계책을 쓰고 바른 도리를 행하지 않았으며, 제나라 환공은 바른 도리를 실행하고 남을 속이는 계책을 쓰지 않았다.”라고 하셨다. 

○ 晉文公 名重耳 齊桓公 名小白 譎 詭也 二公皆諸侯盟主 攘夷狄以尊周室者也 雖其以力假仁 心皆不正 然桓公伐楚 仗義執言 不由詭道 猶爲彼善於此 文公則伐衛以致楚 而陰謀以取勝 其譎甚矣 二君他事亦多類此 故夫子言此以發其隱
진문공은 이름이 중이(重耳)다. 제환공은 이름이 소백이다. 譎이란 속인다는 말이다. 두 공은 모두 제후의 맹주로서 이적을 물리침으로써 주왕실을 높이 받든 사람이다. 비록 그들이 힘으로 인(仁)을 빌렸지만, 마음은 모두 바르지 않았다. 그러나 제환공은 초나라를 칠 적에 의로움을 의지하고 말을 잡아 실천하였으며, 속임수를 말미암지 않았으니, 그래도 저것이 이것보다는 났다고 할 수 있다. 진문공은 위나라를 칠 적에 초나라를 불러들여 음모로써 승리를 취하였으니, 그 속임수가 매우 심하다. 두 임금의 다른 일 역시 이와 비슷한 것이 많았다. 그러므로 공자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그 숨겨진 일을 드러내신 것이다.

左傳僖公四年春 齊侯以諸侯之師侵蔡 蔡潰(蔡自北杏一與中國之會 而棄諸姬黨楚國 故齊伐楚而先事侵蔡 潰蔡者 先破楚之黨也) 遂伐楚 楚子使與師言曰 君處北海 寡人處南海 唯是風馬牛不相及也(牝牡相誘曰風 言雖馬牛風逸 亦不相及 喩地遠不相干也) 不虞君之涉吾地也 何故 管仲對曰 昔召康公命我先君大(音太)公曰 五侯九伯 女實征之 以夾輔周室 賜我先君履(所踐履之界) 東至于海 西至于河 南至于穆陵 北至于無棣(索隱曰 淮南有故穆陵門 無棣在遼西孤竹) 爾貢包茅不入(包裹束也 禹貢荊州 包匭菁茅 蓋取三脊之茅 包裹匭匣盛之以貢周) 王祭不共 無以縮酒(祭祀必束茅而灌之 以酒爲縮酒) 寡人是徵 昭王南征而不復(昭王 成王孫 南巡狩 濟漢水 船壞而溺死) 寡人是問 對曰 貢之不入 寡君之罪也 敢不供給 昭王不復 君其問諸水濱(昭王時 漢非楚境 故楚不服) 師進次于陘(楚地) 夏楚子使屈完如師(使大夫請盟) 師退次于召陵(次于召陵之地 以聽楚成)
좌전 희공 사년 봄에 따르면, 제나라 제후(제환공)가 제후들의 군사들로써 채나라를 침공하였고, 채나라가 무너졌다(채나라는 북행에서 중원의 나라들과 더불어 한 번 회맹을 하였지만, 여러 姬姓 나라(주나라 왕실혈통의 제후국)들을 저버리고 초나라와 무리를 지었다. 그래서 제나라는 초나라를 치면서 채나라를 침공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던 것이다. 채나라를 궤멸시킨 것은 먼저 초나라의 무리를 격파한 것이다). 마침내 초나라를 정벌하자, 楚子(초나라의 임금, 원래 초나라는 子爵이었음)는 사신을 보내 군대와 더불어 말하길, “임금(제환공)께서는 북해에 계시고, 과인은 남해에 처해 있어서, 오직 바람 난 말이나 소라 할지라도 서로 미치지 못하는데(암컷과 수컷이 서로 유혹하는 것을 風이라 한다. 비록 말과 소가 바람이 났더라도 또한 서로 미칠 수 없으니, 땅이 멀어서 서로 간섭하는 것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뜻밖에도 임금께서 내 땅에 발을 디디신 것은 무슨 연유이십니까?”라고 하였다. 관중이 대답하여 말하길, “옛날 소강공께서 우리 선군 태공(呂尙)에게 명하여 말씀하시길, ‘五侯(公侯伯子男의 5등급의 관작)와 九伯(九州의 장)을 네가 실제로 징벌하여 주나라 왕실을 보좌하라’고 하셨고, 우리 선군께 밟을 땅(발로 밟은 곳의 경계)을 하사하셨으니, 동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로는 황하에 이르며, 남으로는 목릉에 이르고, 북으로는 무체에 이릅니다(색은에 이르길, 회남에 옛 목릉문이 있고, 무체는 요서의 고죽에 있다고 한다). 그대들이 공물인 포모를 들이지 않으니(包는 감싸서 묶는다는 말이다. 書經 夏書 우공 형주에, 궤를 菁茅로 감싸는데, 대체로 삼각의 띠풀을 취하여 상자를 감싼 다음 그 안에 담아 주왈실에 공물로 바친다고 하였다), 천자의 제사에도 공급되지 않아, 술을 거를 수가 없습니다(제사에는 반드시 띠풀을 묶어서 술에 담가 술을 걸러야 한다). 과인은 이것을 징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또 소왕이 南征갔다가 돌아오지 못하였는데(소왕은 성왕의 손자로서, 남으로 순수갔다가 한수를 건너던 중 배가 부서져 익사하였다), 과인은 이것을 묻고자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대답하여 말하길, “공물을 들이지 않은 것은 저의 임금의 죄입니다. 앞으로는 어찌 감히 공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소왕께서 돌아가지 못하신 것에 대해서는, 임금께서 한수변에 가서 물어보시지요(소왕 시절에 한수는 초나라의 영토가 아니었기 때문에 초나라가 책임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제후들의 군대는 나아가 형(陘)에 주둔하였다. 여름에 초나라 임금은 굴완으로 하여금 제후들의 군대에 가도록 하였고(대부로 하여금 맹약을 청한 것이다), 군대는 물러나서 소릉에 주둔하였다(소릉의 땅에 머물러 주둔하면서, 초성왕을 다스린 것이다).

左傳僖公二十七年 楚子及諸侯圍宋 宋如晉告急 狐偃曰 楚始得曹而新昏於衛 若伐曹衛 楚必救之 則齊宋免矣(前年楚申叔戌穀以逼齊) 二十八年 晉侯侵曹伐衛 衛人出其君以說于晉 晉侯入曹執曹伯 分曹衛之田 以畀宋人 楚子使子玉去宋曰 無從晉師 子玉使宛春 告于晉師曰 請復衛侯而封曹 臣亦釋宋之圍 子犯曰 子玉無禮哉 君取一以釋宋圍 惠晉侯 臣取二(以復曹衛爲己功) 不可失矣 言可伐 先軫曰 定人之謂禮 楚一言而定三國 我一言而亡之 我則無禮 何以戰乎 不許楚言 是棄宋也 救而棄之 謂諸侯何(言將爲諸侯所怪) 楚有三施 我有三怨 怨仇已多 將何以戰 不如私許復曹衛 以携之(私許二國 使告絶于楚而後 復之携離也) 執宛春以怒楚 旣戰而後圖之 公說 乃拘宛春於衛 且私許復曹衛 曹衛告絶于楚 子玉怒 從晉師 欒枝使輿曳柴而僞遁楚師馳之 原軫以中軍公族(公所率之軍) 橫擊之 楚師敗 績晉師三日館穀(館 舍也 食楚軍之穀三日)
좌전 희공 27년에 따르면, 초나라 임금과 여러 제후들이 송나라를 포위하였다. 송나라는 진나라로 가서 다급한 상황을 고하자, 진나라 호언이 말하길, “초나라가 비로소 조나라를 얻었고, 새로이 위나라와 혼인하였으니, 만약 조나라와 위나라를 친다면, 초나라는 반드시 그들을 구해줄 것입니다. 그러면 제나라와 송나라는 위험을 면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28년에 진나라 제후가 조나라를 침공하고 위나라를 정벌하였다. 위나라 사람들이 자기 임금을 축출하고 이로써 진나라를 설득하였다. 진문공은 조나라에 들어가 조나라 임금을 붙잡았고, 조나라와 위나라의 밭을 나누어 송나라 사람들에게 주었다. 초나라 임금은 자옥으로 하여금 송나라에 가서 말하게 하길, “진나라 군대를 따르지 말라!”고 하였다. 자옥은 완춘으로 하여금 진나라 군대에 알려 말하게 하길, “청컨대 위나라 임금을 복귀시키고 조나라를 봉해주십시오. 그러면 신 또한 송나라의 포위를 풀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진나라 자범이 말하길, “자옥은 무례하구나! 임금은 하나를 취하는데(이로써 송나라의 포위를 풀고 진나라 제후에게 은혜를 베푼다), 신하는 둘을 취하니(조나라와 위나라를 복귀시키는 것을 자신의 공으로 삼는다), 실수해서는 안 됩니다(정벌함이 옳다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선진이 말하길, “남을 안정시켜 주는 것을 일컬어 禮라고 말합니다. 초나라는 한 마디 말로 세 나라를 안정시켰는데, 우리는 한 마디 말로 그들을 망하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바로 무례한 것이니, 무엇으로 싸운단 말입니까? 초나라의 말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송나라를 버리는 것입니다. 송나라를 구해주려다가 버린다면, 다른 제후들에게 뭐라고 말할 것입니까(장차 제후들이 괴이하게 여길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초나라에는 세 가지 베풀음이 있고, 우리에게는 세 가지 원망이 있습니다. 원망이 이미 많은데, 장차 무엇으로 싸우겠습니까? 차라리 남몰래 조나라와 위나라의 원상복귀를 허용하여 그들을 끌어오고(은밀하게 두 나라의 원상복귀를 허용하고, 그들로 하여금 초나라와 절교를 고하게 한 후 재차 끌어서 초나라와 멀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완춘을 붙잡아 초나라를 노하게 하고서, 이미 초나라와 싸운 뒤에 그들을 도모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公(진문공)이 기뻐하면서, 마침내 완춘을 위나라에 구금하였고, 또한 은밀히 조나라와 위나라의 원상회복을 허락하였다. 조나라와 위나라가 초나라에 절교를 고하자, 자옥이 노하여 진나라 군대를 뒤따라 갔다. 난지는 수레를 부려 섶을 끌고서 거짓으로 도망가자, 초나라 군대가 이를 쫓아왔다. 원진이 중군의 공족(진문공이 직접 통솔하는 군대다)으로 옆에서 초나라 군대를 치자, 초나라 군대는 대패하였다. 진나라 군사는 3일 동안 막사를 지어놓고 곡식을 먹었다(館은 막사이고, 초나라 군대의 곡식을 3일 동안이나 먹었다는 것이다).

新安陳氏曰 上引二事以著其實 此卽二事以推其餘
신안진씨가 말하길, “위에서는 두 가지 일을 인용하여 그 실질을 드러낸 것인데, 여기서는 두 가지 일에 나아가 그 나머지를 미루어낸 것이다.”라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桓公責楚以包茅不貢 及昭王不復二事 進次而不遂戰 旣服而與之盟 是仗義執言 不由詭道也 文公始則伐曹衛以致楚師之救 終則復曹衛以携二國之交 是伐衛以致楚而陰謀以取勝也 就覇者之中 論桓文之事 則文譎而不正 桓正而不譎 若較之王者 表裏無疵粹然 一出於正者 固不可同年而語矣
경원보씨가 말하길, “제환공은 包茅를 공납하지 않은 일과 소왕이 돌아오지 않은 일, 이 두 가지 일을 가지고 초나라를 책망하였지만, 다음으로 나아가 전쟁을 수행하지는 않았고, 초나라가 기왕에 승복하자 그와 더불어 회맹을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仗義執言 不由詭道인 것이다. 진문공은 처음에는 조나라와 위나라를 쳐서 초나라 군대의 구원을 이끌어냈고, 나중에는 조나라와 위나라를 원상회복시켜 두 나라의 외교를 이끌어왔으니, 이것이 바로 伐衛以致楚而陰謀以取勝인 것이다. 패자들 가운데로 나아가 제환공과 진문공의 일을 논한다면, 진문공은 속임수를 쓰면서 바르지 않았고, 제환공은 바르면서 속임수를 쓰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왕도정치를 하는 자와 비교한다면, 王者는 겉과 속 모두 하자가 없이 순수하여 한결같이 올바름에서 나오는 것이니, 본래부터 같은 선상에 놓고 말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齊氏曰 二公之伯皆以勝楚 楚罪莫大於僭王猾夏 孔子於春秋書齊曰 侵蔡蔡潰遂伐楚 而於晉僅書曰 及楚戰于城濮 則晉之有歉於聲罪致討也 亦已著矣
제씨가 말하길, “두 公의 패업은 모두 초나라를 이김으로써 하였는데, 초나라의 죄 중에 왕을 참칭하고 중원을 어지럽힌 것보다 큰 것은 없었다. 공자께서 춘추에 제나라에 관해 써서 이르길, 채나라를 침공하여 채나라가 무너지자 마침내 초나라를 정벌하였다고 하였지만, 진나라에 대해서는 단지 초나라에 이르러 성복에서 싸웠다고만 기록하였으니, 진나라가 초나라의 죄를 성토하고 토벌하였다는 것에는 부족함이 있다는 것이 이미 현저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二公心皆不正 論其彼善於此 則桓稍優於文耳 晉文固譎 齊桓亦非純乎正者 若粹然一出於正 其惟王道乎
신안진씨가 말하길, “두 公의 마음은 모두 바르지 않았다. 저것이 이것보다 낫다는 식으로 논한다면, 제환공이 진문공보다 조금 나을 뿐이었다. 진문공은 본래 속임수가 많았지만, 제환공 역시 올바름에 순수한 사람은 아니었다. 만약 순수하여 한결같이 올바름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아마도 오직 王道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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