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문답(山中問答)
【시】- 이백(李白)
問余何事棲碧山 (문여하사서벽산)
笑而不答心自閑 (소이부답심자한)
桃花流水杳然去 (도화유수묘연거)
別有天地非人間 (별유천지비인간)
【현대어 풀이】
묻노니, 그대는 왜 푸른 산에 사는가.
웃을 뿐, 대답은 아니 해도 마음은 한가롭네.
복사꽃 띄워 물은 아득히 흘러가나니,
별천지 따로 있어 인간 세상 아니네.
【개관】
▶갈래 : 칠언 절구(七言絶句)의 근체시
▶형식 : 칠언절구로 1.2.4구 마지막 글자 山(산), 閑(한), 間(간)은 운자(韻字)들이다.
▶성격 : 서정적
▶표현 : 이상적, 낭만적, 탈세속적, 은둔적
▶의의 : 자연과 조화된 삶을 영위하면서 그 속에서 인생의 자유와 이상을 추구하는 동양적 인생관이 표현됨
▶제재 : 산중생활, 산 속의 한가로운 삶
▶주제 : 자연 속에 묻혀서 사는 생활의 즐거움, 세속을 벗어난 자연 속의 한가로운 삶
【구성】- 1, 2행은 산중 생활에 대한 문답, 3, 4행은 탈속적 이상 세계에 대한 형상
▶기(제1행) : 삶의 모습에 대한 스스로의 확인
▶승(제2행) : 진정한 자유와 평화
▶전(제3행) : 이상세계의 전개
▶결(제4행) : 세속과의 완전한 결별
【시어 풀이】
<산중문답(山中問答)> : 문답은 흔히 두 사람 사이의 문답 형식으로 생각되지만, 이 시에서는 자문자답으로 풀이하여 감상하면 시적인 정취가 더욱 깊어진다.
<여(余)> : '나'라는 말로 이 시는 흔히 문답의 형식으로 보기가 싶지만 스스로 자문자답하는 것으로 의미를 파악하면 더욱 의미가 깊은 시가 된다.
<하사(何事)> : 무슨 일로? 무엇 때문에? 왜? 등등 이유를 나타내는 의문형이다.
<서(棲)> : 栖와 같은 글자로 깃들 서. 살 서. (예) 서식(棲息)하다.
<벽산(碧山)> : 푸른 산, 곧 조용한 산
<묘연(杳然)> : 아득히.
<묘(杳)> : 아득할 묘. 묘연(杳然)은 아득하고 가물가물한 모양을 나타내는 말로서 지금도 흔히 쓰이는 단어이다. 연(然)은 이와 같이 형용사나 동사 뒤에 붙어서 그 모습을 형용하는 접미사로도 많이 쓰인다. (예) 결연(決然), 확연(確然), 은연중에(隱然中에), 공공연하게(公公然하게)
<인간(人間) : 요즘에는 주로 "사람"이란 뜻으로만 쓰이지만, 한문에서는 ‘인생세간(人生世間’의 뜻으로 ‘사람이 사는 세상’을 뜻하기도 한다. 즉 비인간(非人間)은 지금 말로 ‘비인간적’이란 뜻이 아니고,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다’란 뜻이다.
<묻노니> : 정신적인 자유에서 나오는 스스로의 질문이다. 자신이 세속과 완전히 결별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웃을 뿐, 답은 않고 마음이 한가롭네.> : 의사소통의 수단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정한 마음의 평화와 자유를 나타낸다. 1930년대 김상용의 시 <남으로 창을 내겠소>는 위의 시 구절 중 '笑而不答心自閑'을 빌려 쓰고 있다. '왜 사냐건 / 웃지요.'라는 구절이 바로 그것인데, 그 표현에는 전원에서 사는 일의 평화로움이 잘 나타나 있다.
<복사꽃> : 선계(仙界)를 장식하는 꽃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동양의 관념적 선경(仙境)인 무릉도원을 암시한다.
<복사꽃 띄워 물은 아득히 흘러가나니> : '桃花流水(도화유수)'는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무릉도원(武陵桃源), 곧 선경(仙境)을 상징한다. 작자가 일생을 통해서 그리던 진정한 자유와 평화의 세계를 나타낸다. 복숭아꽃은 동양의 전통적인 선경(仙境)인 무릉도원을 암시하는 소재이다.
<별천지 따로 있어 인간 세상 아니네.> : 세속적 인간 세계를 초월한 이상세계((理想世界), 이백이 꿈꾸던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암시한다. 즉, 이미 신선(神仙)이 된 자신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별유천지(別有天地)> : 또 다른 천지(우주, 세상)가 있다. '별천지'는 속된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매우 좋은 세계, 別은 有를 수식하는 부사이다.
【내용 풀이】
<問余何事栖碧山(묻노니, 그대는 왜 푸른 산에 사는가.)> : 여기서 차원이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생기는 갈등이 보인다. 즉 이백이 무슨 일로 시골(碧山)에 와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 시골 사람들은 이백과 같이 이름난 사람이, 재주 있는 사람이 왜 이렇게 한적한 시골에 사느냐(棲)고 묻는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마음속으로 이백이 틀림없이 몰락했거나 병이 들었거나 쫓겨났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아마도 그런 대답을 기대하고 물었는지도 모른다.
<笑而不答心自閑(웃을 뿐, 답은 않고 마음이 한가롭네.)> : 여기서 웃기만하고 대답하지 않은 이유(笑而不答)는 무엇인가. 아마 처음에는 이백이 있는 그대로의 이유로 대답했을 것이다. 이를태면 도시가 아무리 좋고, 벼슬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것은 여러 가지로 신경 쓰이는 일이라고 말이다.
윗사람, 아랫사람 눈치도 봐야하고, 근무 시간을 지켜야하고, 격식도 지켜야 하는 등의 성가심뿐 아니라, 승진을 위해 머리를 쓰고 뼈를 녹이고 피를 말리는 노력과 경쟁의 대가를 치루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귀찮고 자기 생리에 맞지 않아 차라리 시골에서 마음 편히 살기 위해서 왔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골 사람들은 이백이 보는 앞에서는 수긍하는 말을 하였지만, 그들의 속마음에서는 결코 납득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이백은 이것을 안 것이다. 아무리 설명해도 결코 받아들지 않는 그들에게 자꾸 이야기할수록 더욱 이야기하는 본인의 마음만 답답해질 뿐이다. 그래서 이후로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그저 웃고 만 것이다. 사실대로 말을 하면, 이 사람도 또 같은 반응을 보여 이백의 마음을 답답하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답을 하지 않는 편이 마음이 편하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도시의 번화함과 벼슬살이의 애환과 더러움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이므로 그런 생각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桃花流水杳然去(복사꽃 띄워 물은 아득히 흘러가나니,)> : 이곳에서는, 이백이 사는 세계를 단 하나의 자연현상으로 표현해준다. 곧, 그가 살 곳으로 선택한 ‘청산(靑山)’은 산이 높아 비탈진 골짝 물에 떨어진 복숭아 꽃잎은 흐르는 골짜기 물을 따라 한없이 흘러가는 ‘자연 법칙이 지배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복숭아 꽃잎은 바람이 불어서 떨어지고, 떨어진 잎 여럿 중에서 골짜기 물에 떨어진 것은 흐르는 물 따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그 높이의 차이가 없어 물이 정지 할 때까지 그렇게 멀리 멀리 흘러가는 것이다
아무것도 거부하는 것이 없다. 그냥 자연 법칙에 순응하는 것이다. 사람처럼 처지에 따라 “싫어요. 지금은 너무 바빠요, 더 중요한 약속이 있어 못가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많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 억지로 과일을 익히지도 않는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여 가장하거나, 싫어도 억지로 행동하지도 않는다. 억지로 참지도 않는다. 있는 그대로 자연 그대로 행동하는 곳인 것이다.
<別有天地非人間(별천지 따로 있어 인간 세상 아니네.)> : 이곳에서 이백은 서로 대립되는 두 세계인 <청산세계>와 <인간세계>를 제시하고 <청산의 세계>를 긍정하고 있다.
여기서 천지(天地)는 단순히 인간이 사는 공간으로서의 <지구>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의식세계>를 의미한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같은 하늘 아래 있어도 서로 다른 의식세계를 가진다. 곧, 상류사회 , 하류사회, 어른세계, 아이세계, 학생세계, 여성세계, 남성세계, 교수세계, 회사원세계 등과 같은 하나의 의식이 같은 집단을 의미한다. 즉 하나의 서로 다른 차원의 세계를 말한다.
‘인간(人間)’은 ‘인간세계’를 의미한다. 현실적 인간세계는 ‘능률과 이익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합리와 능률과 이익에 맞는 쪽으로 움직인다. 그것이 최고의 가치로 추구된다.
이 두 개념을 종합하여 위 구절의 의미를 새겨보면, 결국 내가 사는 곳 ‘청산’은 분명 다른 세상인데, 무엇이라 정확히 이름 붙일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능률과 이익법칙에 지배되는 인간 세상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백이 긍정하는 청산의 세계는 인간의 욕심이 배제된 세게다. 걱정이 없고 무리가 없는 자연스런 세계, 구속이 없는 진정 자유스런 세계다. 그가 부정하는 세게는 능률이 강요되고 이익이 추구되어 눈치와 체면과 욕심이 난무하여 경쟁과 음모와 무리가 자행되는 인간세계다.
결국 그는 이 시에서 우리에게 “당신들은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를 묻고 있다. 이백은 이 시를 통하여 끊임없이 권하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아까운 생명력이 헛되이 소모되기 전에 바른 판단을 하라“고, 인간 세계의 이익과 능률의 법칙에 얽매여 짓눌려 사는 우리들에게 외치고 있는 것이다.
【감상】
이 시는 후세 사람들이 시선(詩仙)이라고 부르는 이백(李白)의 작품이다. 시선(詩仙)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시를 짓는 기교나 시의 내용에서 느끼는 기풍이 마치 신선과 같다.’는 뜻이다. 사실 이백은 수많은 시를 지었다. 속된 말로 밥 먹듯이 지었다. 즐거워도 시, 괴로워도 시, 친구를 만나도 시, 술을 먹어도 시, 그야 말로 시가 그의 생활이었다.
이백의 시는 표현 기교에 있어서 결코 꾸미거나 고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마치 이미 다 익은 과일 나무에서 과일을 따듯 그렇게 쉽게 시를 지었다. 내용에 있어서는 인간의 욕심은 물론 욕심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점은 그의 여러 작품에서 확인된다. 그래서 그는 시선인 것이다. 이백과 같은 시인은 앞으로도 다시 나오기 어려운 천재 시인이라는 평가다 시 <산중문답(山中問答)>은 이백의 이러한 특징을 잘 나타내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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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이백이 지은 시 가운데서 특히 뛰어난 것으로 손꼽히는데, 극도로 절제된 언어 속에 깊은 서정과 뜻을 응축해 내는 절구(絶句)의 특성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 작품이 그려 내고 있는 것은 물론 속세를 벗어난 선경(仙景)이다.
이미 푸른 산에 동화되어 있는 화자는 번거로운 '말'의 세계, '논리'의 세계를 뛰어넘은 상태로 그윽한 미소가 있을 뿐이다. 그 미소는 맑은 물에 떠가는 복숭아꽃의 이미지와 한데 어울려 '비인간(非人間)'의 경지를 느끼게 한다. 스스로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정신적인 여유와 자연에 동화되어 사는 삶에 대한 만족 속에서 동양적 자연 친화 사상을 역연(歷然)하게 드러내고 있다. 복숭아꽃의 이미지로 무릉도원을 상기시키는 시적 표현과 물음에 답하지 않고 웃음을 짓는 태도가 어울린다.
도교(道敎)가 유행하던 진(晉)나라 때의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도화원기(桃花園記)>의 글 중에서 그 뜻을 얻어 쓴 것이다. 즉, 도화원기 중에 어떤 어부가 복사꽃 근처의 입구에서 별천지에 이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소재로 삼고 있다.
또한, 이 시는 한시의 특성 때문에 시어의 사용이 제한되어 있으면서도 극도로 절제되고 함축된 언어 속에 자신의 내면세계를 끝없이 펼쳐 보이며, 세속과의 완전한 결별을 통해 이상적인 신선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세속에 대한 미련의 여부를 스스로의 질문을 통해서 확인하며, '말 없는 미소'로써 세속과의 완전 결별이라는 대답을 대신하고 있다. 끝 부분에서는 계곡물을 따라 떠가는 복숭아꽃을 통해 이백이 일생 동안 꿈꾸던 신선의 세계, 곧 무릉도원(武陵桃源)을 그려내며, 그 세계에 사는 신선처럼 자유와 낭만을 만끽하는 자신의 모습을 구체화하고 있다. 이 작품은 이백의 시 가운데서도 특히, 그의 호방한 작품 세계나 낭만적인 삶의 자세를 잘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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