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漢學♡書堂

楓橋夜泊

by 권석낙 2021. 2. 18.

1. 楓橋夜泊(풍교야박)

 
月落烏啼霜滿天(월락오제상만천)

달 지고 까마귀 울어 하늘 가득 서리 내리고​

江楓漁火對愁眠(강풍어화대수면)

강가 단풍, 배의 불빛, 시름에 잠 못 드네​

姑蘇城外寒山寺(고소성외한산사)

고소성(姑蘇城) 밖 한산사(寒山寺)의​

夜半鐘聲到客船(야반종성도객선)

한밤 종소리가 나그네 배에 들려오네

 

 

<註釋>

楓橋夜泊(풍교야박): 제목이 ‘夜泊楓江(야박풍강)’으로 되어 있는 본도 있다. ‘楓橋(풍교)’는 강소성(江蘇省) 오현(吳縣) 창문(閶門) 밖의 서쪽 10里에 있다. 《豹隱紀談(표은기담)》에 “풍교(楓橋)는 옛 이름이 봉교(封橋)였다. 후에 장계(張繼) 시의 ‘江楓漁火對愁眠(강풍어화대수면)’ 구절을 따라 ‘楓橋(풍교)’로 고쳤다.[楓橋 舊名封橋 後因張繼詩江楓漁火句 改楓橋]”라는 기록이 보인다.

② 江楓漁火(강풍어화): ‘江楓(강풍)’은 강가의 단풍나무를 말하는데 ‘江村(강촌)’으로 되어 있는 본도 있다. 청(淸)나라 유월(兪樾)의 〈楓橋夜泊詩碑(풍교야박시비)〉에 “당나라 장계(張繼)의 〈楓橋夜泊(풍교야박)〉 시는 인구에 회자되는데, ‘江楓漁火(강풍어화)’ 네 글자만은 자못 의심할 만하다. 송(宋)나라 공명지(龔明之)의 《中吳紀聞(중오기문)》에는 ‘江村漁火(강촌어화)’라 하였으니, 송나라의 옛 서적을 보물로 귀하게 여길 만하다. ‘漁火’는 고기를 잡으려고 漁船에 켠 불빛을 말한다.

③ 姑蘇城外寒山寺(고소성외한산사): ‘姑蘇(고소)’는 소주(蘇州)의 별칭이다. 도시 서남쪽에 고소산(姑蘇山)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寒山寺(한산사)’는 강소성(江蘇省) 소주시(蘇州市) 서쪽에 있는데 남조(南朝) 양(梁)나라 때 지어졌다. 원래 이름은 묘리보명탑원(妙利普明塔院)이었는데 당(唐)나라 초에 시승(詩僧) 한산(寒山)이 이곳에 머물러 이에 한산사(寒山寺)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풍교(楓橋) 부근에 있으며 소중(蘇州)의 명승(名勝) 가운데 한 곳이기도 하다.

④ 夜半鐘聲(야반종성): 구양수(歐陽脩)가 지적(아래 집평 참조)한 이래 논란이 분분하다. 당시(唐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이라는 의견도 있다. ‘半夜鐘聲(반야종성)’으로 되어 있는 본도 있다.

 

 

<解說>

이 시는 강소성 蘇州를 대표하는 시이다. 수많은 唐詩의 絶品 가운데 특히 人口에 膾炙되는 명시이다. 객지에 다다른 나그네의 쓸쓸한 심회를 단지 낯선 景物에 부쳤을 뿐인데, 적막한 모습이 ‘愁’자 하나에 집약되어 점점 퍼져나간다. 앞의 두 구절과 뒤의 두 구절을 시간 순서가 도치된 것으로 보는 해석도 있는데, 1구의 ‘月落(월락)’을 달 지는 새벽으로, 마지막 구절의 ‘夜半(야반)’을 이보다 앞선 시간으로 보기 때문이다.

제 1-2구는 가을 날 나그네의 시름을 촉각적인 愁眠과 시각적인 江楓漁火 시어의 위치를 바꿔 표현했다. 제3-4구는 한산사 종소리의 청각이미지를 동원해 나르네의 시름을 더욱 짙게 만들고 있다. 워낙 널리 알려진 시라 이 시를 둘러싼 이야기와 논평도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본문 글자에 차이가 많은 것도 逆으로 이 시가 널리 전파되었음을 알려주는 징표이기도 하다.

 

 

 

​◉ 張繼(?-?)

 

생몰년 미상이다. 자(字) 의손(懿孫). 후베이 상양현(襄陽县, 양양현) 출신으로 중당(中唐)의 시인. 천보(天寶) 12재(載)인 753년 진사(進士)를 시작으로 검교사부원외랑(檢校祠部員外郎), 홍주염철판관(洪州鹽鐵判官)을 역임하였고. 대력(大歷) 말인 779년 홍주(洪州)에서 사망하였다. 저서로 장사부시집(張祠部詩集)을 남겼다. 당대(唐代)의 시인 중 장계는 두드러진 시인이 아니었으며 전당시(全唐詩) 중에 단지 40여 수(首)만 전하고 있다.

 

작품 중 풍교야박(楓橋夜泊)은 장계를 유명하게 만든 시로 천보(天寶) 15재(載) 때에 쑤저우에 유람하면서 지은 것으로 고중무(高仲武)가 편찬한 중흥간기집(中兴间气集)에 수록되었다가 후에 당시삼백수(唐诗三百首)에도 수록이 되어 있으며 현재 중국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으며 많이 애송되는 대표적 당시의 하나이다.

 

 

​◉ 寒山寺

 

한산사는 남북조시대의 양무제梁武帝 천감天監 연간(502~509)에 지어졌으며, 초기의 사찰 이름은 묘리보명탑원妙利普明塔院이었다. 당唐 태종太宗 정관貞觀 연간에 寒山과 拾得 두 고승이 천태산에서 소주蘇州로 나와 이곳 보명원에 주석하면서 널리 불법을 전한 후로 사찰 이름을 한산사로 바꾸고 이를 기념하였다.

 

한산사는 당唐 시인 장계張繼가 「풍교야박楓橋夜泊」이란 시를 지어 노래한 뒤, 경향 각지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송宋 태종太宗 태평흥국太平興國 초기에 절도사를 지낸 손승우孫承祐가 7층 부도탑을 세웠고, 인종仁宗 가우嘉祐(1056~1063) 연간에는 보명선원普明禪院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고종高宗 소흥紹興 4년에는 승려 법천法遷이 중건하였다.

명대明代에 들어서는 홍무洪武, 영락永樂, 가정嘉靖, 만력萬曆 각 황제연간에 여러 차례 중수가 이뤄졌다. 특히 世宗세종 가정嘉靖(1522~1566) 연간에는 승려 본적本寂이 대형 동종銅鐘을 주조하고 종루를 세웠다.

 

 
 

한산사에는 주조한 지 백 년이 넘는 대형 동종이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중국에서 주조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1906년에 일본에서 주조된 전종殿鐘으로 여기에는 이토 히로부티伊藤博文가 쓴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2005년에 한산사가 또 하나의 새로운 대형 동종을 주조하기로 결정하고 108톤짜리 종을 무한武漢에서 만들어 일본에서 주조한 종과 바꿔 걸었다.

새로 주조한 동종은 높이 8.5m에 구경이 5.2m인 대종으로 종의 바깥 면에는 '고한산사古寒山寺'라는 네 글자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경문을 세겼다.

 

한산사에는 매년 120여 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오는데, 이들 대부분이 한산사의 종소리를 들어보고 싶어서 이곳을 찾아온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지금도 해마다 이곳에서 신년을 맞는 종소리를 방송으로 내보내고 있다고 한다.

 

◉ 寒山子

 

당唐 태종太宗 정관貞觀 연간을 살았으며 절강성浙江省 천태산天台山 한암동寒巖洞(한산寒山)에 은거한 시승詩僧. 그러나 실존 여부가 확실하지 않으며, 실존했다 하더라도 알려진 것보다는 후대인 당대 말엽을 살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속가의 성씨와 법호는 알려진 게 없어서 사람들이 그를 한산寒山, 한산자寒山子, 빈자貧子 등으로 불렀다. 唐代에 태주자사台州刺史를 지낸 여구윤閭邱胤이 편찬한 《한산자시집전寒山子詩集傳》과 宋代의 승려 찬녕贊寧이 지은 《송고승전宋高僧傳》에 그의 작품이 전하지만, 여구윤 역시 가상의 인물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한산은 천태산 국청사國淸寺의 습득화상拾得和尙과 교유하였으며, 둘이 함께 천지를 행각하며 시를 짓고 읊기를 즐겼다. 행각승인 풍간豊干과 셋이서 국청사를 드나들며 남루한 차림으로 주방에 들어가 잔반을 먹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사람들이 이들을 '삼은三隱' 또는 '삼성三聖'으로 불렀다.

 

전설에서는 한산이 문수보살의 화신이고 습득은 보현보살의 화신인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청淸 황제 옹정제雍正帝가 한산을 '묘각보도화성한산대사妙覺普渡和聖寒山大士' 약칭하여 '화성和聖'으로, 습득을 '묘각보도합성습득대사妙覺普渡合聖拾得大士' 약칭 '합성合聖'으로 책봉한 뒤, 세인들이 이 두 고승을 '화합이성和合二聖' 또는 '화합이선和合二仙'으로 불렀다.

 

​◉ 습득拾得과 풍간豊干에 얽힌 일화

 

당대唐代의 선사禪師 풍간豊干이 천태산 국청사에 주석하고 있을 때였다. 언 날, 풍간이 소나무 숲 속으로 난 길을 걷다가 문득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는 울음소리를 따라 간 곳에서 의복은 남루하지만 얼굴에서 기이한 기운이 느껴지는 한 아이를 만났다. 인근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어봤으나 그 아이의 내력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 풍간은 하는 수 없이 아이를 데리고 국청사로 돌아와 그 아이를 찾아갈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사람들은 아이를 풍간선사가 거둔 아이라 하여 '습득拾得'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습득은 점점 자라 상좌로부터 행당(첨반添飯)의 소임을 맡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습득도 적지 않은 친구를 사귀게 되었는데, 그 중에 특히 한산의 빈자貧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한 사람과의 교우가 막역하였다. 한산이 무척 빈곤했던 까닭에 습득은 주방에 남아있는 밥을 대나무로 만든 광주리에 넣어 한산이 가져가 먹게 했다.

 

어느 날, 한산이 습득에게 물었다.

 

 

"만약 세상 사람들이 아무 이유도 없이 나를 비방하고 배반하고 모욕하고 비웃고 경시하고 천하다 하고 미워하고 속인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습득이 대답했다.

 

"참아주고 양보하고 말대로 하게하고 피해주고 견뎌주고 존경하고 다스리려 하지 마라. 그렇게 몇 년 지나고 나면 너는 그를 다시 보게 될 것이다."

 

한산이 다시 물었다.

 

"그밖에 다른 사람과 악의적으로 얽히는 것을 피할 수 있는 또 다른 비결은 없을까?"

 

습득이 대답했다.

 

"미륵보살께서 말씀하셨다.

 

老拙穿破襖(노졸천파오) 저는 헤진 두루마기나 입고

淡飯腹中飽(담반복중포) 기름기 없는 밥으로 배를 불리지만

補破好遮寒(보파호차한) 헤진 곳은 기워서 추위를 막고

萬事隨緣了(만사수연료) 모든 일을 인연 따라 처리합니다.

 

有人罵老拙(유인매노졸) 저를 꾸짖는 사람이 있어도

老拙只說好(노졸지설호) 저는 그저 좋다고 말하고

有人打老拙(유인타노졸) 저를 때리는 사람이 있어도

老拙自睡倒(노졸자수도) 저는 그냥 쓰러져 잠을 잡니다.

 

有人打老拙(유인타노졸) 누가 제게 침을 뱉어도

隨他自乾了(수타자건료) 내버려두면 저절로 말라버리니

我也省力氣(아야성력기) 저는 기운을 아낄 수 있고

他也無煩惱(타야무번뇌) 그이는 번뇌가 생기지 않습니다.

 

這樣波羅蜜(저양바라밀) 이렇게 하는 것이 바라밀이라

便是妙中寶(변시묘중보) 바로 오묘한 보배와 같고

若知這消息(약지저소식) 만약에 이 소식을 알아듣는다면

何愁道不了(하수도불료) 도 이루지 못할까 걱정할 게 없습니다.

 

人弱心不弱(인약심불약) 사람은 약하지만 마음은 약하지 않고

人貪道不貪(인탐도불탐) 사람에겐 탐욕이 있고 도에는 탐욕이 없으며

一心要修行(일심요수행) 오로지 한마음으로 수행을 해야

常在道中辦(상재도중판) 언제나 도 안에서 이뤄질 수 있습니다.

 

 

만약 偈에서 말하는 이 같은 정신을 체득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비할 바 없는 처세의 비결이 될 것이다."

 

한산과 습득을 문수, 보현 두 보살의 화신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태주목사를 지낸 여구윤閭邱胤이 풍간선사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면 보살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겠습니까?"

 

풍간이 한산과 습득이라고 말해주자 여구윤이 두 사람에게 가서 절을 했다. 두 사람이 말했다.

 

"스님께서 농담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아미타부처님은 알아볼 수 없습니다."

 

풍간이 아미타불의 화신을 듯으로 가리킨 것을 세인들이 알아듣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긴 두 사람은 말을 마친 뒤 깊은 바위산 속으로 몸을 감춰버렸고, 사람들은 그 후로 다시는 두 사람을 보지 못했다. 연구윤이 사람을 보내 두 사람이 석벽 등에 남긴 시와 게 등을 적어오게 하였는데, 이것이 지금 후대의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한산과 습득 두 고승은 세간의 일에 얽매이지 않았고, 막힌 곳 없이 툭 트여 자재하였으며, 세간의 비결을 우습게 여기며 살다 간 품격 높은 인물들이었다.

 

 
 

'漢學♡書堂' 카테고리의 다른 글

回龍浦 & 飛龍山長安寺  (0) 2021.02.20
曲江·朝回日日典春衣- 杜甫  (0) 2021.02.19
漢文體의 種類  (0) 2021.01.22
栗谷 李珥-自警文  (0) 2021.01.19
心和氣平  (0) 2020.12.2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