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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講座

哀絶陽-丁若鏞

by 권석낙 2020. 2. 29.

성기 자른 것을 슬퍼하며 ...

다산 정약용 애절양 (한시) 감상문

정약용의 애절양은 조선후기 백성이 양경(성기)을 자른 것을 보고 슬퍼하며 지은 시라 합니다.
양경을 자른 기막히고 엽기적인 백성의 사연을 슬퍼하며 지은 한시 정약용의 애절양
200년 전 부정부패가 판을 치던 조선후기와 현재. 애절양이 많은 걸 느끼게 해줍니다.

다산 정약용 애절양


애절양 哀絶陽 (양경을 자른 것을 슬퍼하며)
 

다산 정약용 (丁若鏞) 애절양 (哀絶陽)

蘆田少婦哭聲長(노전소부곡성장) 갈밭마을 젊은 아낙 길게길게 우는 소리. 
哭向縣門號穹蒼(곡향현문호궁창) 관문 앞 달려가 통곡하다 하늘 보고 울부짖네.
夫征不復尙可有(부정불복상가유) 출정나간 지아비 돌아오지 못하는 일 있다 해도
自古未聞男絶陽(자고미문남절양) 사내가 제 양물 잘랐단 소리 들어본적 없네
舅喪已縞兒未?(구상이호아미조)    시아버지 삼년상 벌써 지났고,갓난아인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三代名簽在軍保(삼대명첨재군보)   이 집 삼대 이름 군적에 모두 실렸네.
薄言往?虎守?  (박언왕소호수혼)    억울한 하소연 하려해도 관가 문지기는 호랑이 같고,
里正咆哮牛去早(이정포효우거조)   이정은 으르렁대며 외양간 소마저 끌고 갔다네.
磨刀入房血滿席(마도입방혈만석)   남편이 칼 들고 들어가더니 피가 방에 흥건하네
自恨生兒遭窘厄(자한생아조군액)   스스로 부르짖길, "아이 낳은 죄로구나!".  

蠶室淫刑豈有辜 (잠실음형기유고)      누에치던 방에서 불알까는 형벌도 억울한데
민건去勢良亦慽 (민건거세양역척)      민나라 자식의 거세도 진실로 또한 슬픈 것이거늘
生生之理天所予 (생생지리천소여)      자식을 낳고 사는 이치는 하늘이 준 것이요
乾道成男坤道女 (건도성남곤도여)      하늘의 도는 남자 되고 땅의 도는 여자 되는 것이라
선馬분豕猶云悲 (선마분시유운비)      거세한 말과 거세한 돼지도 오히려 슬프다 할만한데

況乃生民思繼序  (황내생민사계서)     하물며 백성이 후손 이을 것을 생각함에 있어서랴!
豪家終世奏管弦(호가종세주관현) 부자집들 일년 내내 풍악 울리고 흥청망청  
粒米寸帛無所損(립미촌백무소손) 이네들 한톨 쌀 한치 베 내다바치는 일 없네.
均吾赤子何厚薄(균오적자하후박) 다 같은 백성인데 이다지 불공평하다니, 
客窓重誦詩鳩篇(객창중송시구편) 객창에 우두커니 앉아 시구편을 거듭 읖노라.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시였다.

남자의 성기를 잘라서 슬퍼한다는 제목이 요즘 세태 언어로 표현 하자면 엽기라 말할 수 있다.

이런 엽기적인 이야기를 전해들은 정약용이 정치가로써 학자로써 당대 지식인으로써 백성의 슬픔을 시로 지어냈다.

이시는 계해년(1803)에 지은 것이라 나와 있는데 그 당시 정약용은 강진에서 유배를 살고 있었다.

자신이 유배지에 있음으로 힘도 없고 권력도 없어 어찌할 수 없다는 쓰라린 심정이 엿보인다.

 

이런 참혹한 현실의 시대적 배경은 조선 후기

 

나라의 기강과 정책이 흐트러질 때로 흐트러져 부정부패가 판을 치던 세상이라 볼 수 있다.

남자가 스스로 자신의 남근을 자른다는 것은 미치지 않고는 할 수 없다고 생각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남근을 잘랐다는 것은 백성들이 미쳐버릴 정도로 당시의 탐관오리들의 폭거가 얼마나 잔혹했었는지 상상이 된다.


남편이 스스로 자른 남근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모습

그 모습을 보고 그의 아내는 얼마나 기막히고 슬퍼했을까?

그러나 그런 남편을 탓하지도 못하는 현실, 이제 그의 아내는 자신의 참담함에 악에 바쳐 피에 엉킨 남편의 남근을 손에 쥐고 군청으로가서 군수에게 끌려간 소를 달라고 호소한다.

그러나 군수를 만나기는커녕 군청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포졸들에게 얻어맞고 한손에는 피범벅이 된 남편의 남근을 꼭 쥐며 쫒겨나온다.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대립

백성과 관청의 갈등, 썩어가는 세상이 느껴진다.

예전에 내시(환관)들은 어려서부터 부모들이 환관을 시키려고 남근을 잘랐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것 또한, 인간으로써 하기 힘든 일이라 할 수 있다.
말이나 돼지의 불알을 까서 성장을 촉진 시키는 것도 슬픈데 하물며 사람의 생식기를 자르는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일을까?

모두가 똑같은 백성인데 부자들은 쌀 한톨, 비단 한치 바치지 않고 풍악을 울리며 즐기고 못난 백성들은 억울하게 당하기만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 현실에서 봐도 상당한 호소력을 띠고 있는 것 같다.

당시 다산 정약용은 애절양 뿐만이 아니라

백성들의 억울함, 애환, 고난 등을 대변하는 여러 편의 시가 쓰여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누구는 그리 귀해서 편하게 살고 누구는 그리 하찮아서 그리 힘들게 사는가 하는 당시 억울한 모든 백성들의 함성을 대변했으리라.

당시 정약용이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정조 때는 사람을 알아본 정조가 정약용을 크게 썻으나 정조가 죽고 난 후, 탄핵을 받아 귀양살이를 전전하여 자신이 힘도 없고 권력도 없고 귀양살이하기에도 힘든 형편에 백성들의 억울함을 해결해줄 수 없는 자신의 괴로운 마음을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客窓重誦詩鳩篇(객창중송시구편)'객창에 우두커니 앉아 시구편을 거듭 읖노라' 라고 표현한거 같다.
자신의 어쩔 수 없음을 시구편을 통해 거듭거듭 읖으며 괴로워 하는 모습이 상상된다.

한시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고 지루하고

어렵다고 생각해서 내용을 봐도 이해하기가 힘들거라 생각했던 거와는 달리 그 어떤 시 보다도 이해가 빨리되고 연상되는 상상까지 하게 만들었던 시였다.
당시의 참혹한 현실을 그 어떤 구체적인 설명보다도 정약용의 애절양 한 편의 시로 더 가깝게 알게 된 느낌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 백성들의 현실, 지은이의 괴로움 심정까지 모두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정약용을 위대한 역사적 인물로 평가한다.

그러나 그가 죽은지 200년 후, 200년이 지난 지금, 지금도 애절양에서 나오는 있는 자의 횡포는 계속 되고 있다.

우리나라를 이끌어나갈 인재를 뽑는 선거들이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바람으로 우리가 뽑은 사람중에 정약용을 닮을 사람이 나와주길 바란다.

그러나 그에게 애절양같은 시를 쓰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만사형통(萬事兄通)이→만사형통(萬事兄痛)으로 된 현실을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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