流 水 今 日 明 月 前 身
흐르는 물이 오늘의 모습이라면 휘영청 밝은 저 달님은 前生(전생) 모습이라네
※ 이 구절은 [詩品 24] 가운데 "洗鍊(세련)"을 표현한 것이다. 즉, "단련하고 정제됨"의 뜻이다. 이 구절에서 "明月前身"으로 인장을 새긴, 중국의 유명한 墨客(묵객)인 "吳昌碩[우창숴 : 1844~1927]의 가슴 뭉클한 사연이 있어 芝山房의 다정한 이웃님들께 소개해 드린다. 본시 이 詩句(시구)만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것이기도 하다. | ||||
[明 月 前 身] ☞ 吳昌碩刻 | 이 구절의 진정한 의미는 알듯도 하지만, 솔직히 꼭 집어 이것이다라고 말은 하지 못하겠다. 하늘에 둥두렷이 뜬 저 달님은 "그리운 님의 화신?" 아니면 "그 님의 前生(전생) 모습"일까? 글은 길다고 명문장이 아니다. 예를 들면 [채동욱]의 《정정 보도 청구문》같은 것이다. 그게 어디 글인라고 할 수 있는가? 철저한 [자기 변명]이요, 국민들에 대한 [사실 호도] 아닌가! 엄정한 칼날을 휘두르던 사법부의 우두머리 글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짤막한 글 하나로 이미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낮은 아이큐로도 그 자리에 오른 것이라면 이 芝山房도 도전해 볼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ㅎㅎㅎ~! | |||
吳昌碩은 淸(청)나라 말, 서예와 전각의 마지막 大家(대가)이다. 그는 이 구절을 자신의 夫人(부인)을 몹시 그리워하며 書畵(서화)에 찍는 도장 돌에 새겼던 것이다. 바로 그의 말년 작품으로 대표적인 名品(명품)으로 꼽는다. 이 도장은 새긴 솜씨로도 뛰어난 것이지만, 이를 새긴 사연은 더더욱 가슴 뭉클하다. 1860년 무렵, 吳昌碩의 나이 겨우 16세! 그 당시 풍속에 따라 "章(장)"이라는 성을 지닌 여인과 약혼을 했다. 그러나 곧 "태평천국의 난"이 발발하여 吳昌碩은 일가족과 함께 "章"이라는 여인과 더불어 피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 여성들은 "전족" 때문에 먼 길을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망할 놈의 폐습] 章씨 소녀는 吳昌碩의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에 남았던 것이다. 吳昌碩은 떨어지지 않는 발길로 다시 꼭 만날 것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어디 내 마음 같은 일이 있으랴! 세월은 흘러 2년이 흐르고 말았다. 부랴부랴 고향에 돌아온 吳昌碩은 그의 약혼녀인 章씨 소녀는 안타깝게도 굶주림에 병이 겹쳐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吳昌碩은 하늘을 우러러 통곡했으나, 한번 간 그 님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이후 吳昌碩은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하고 가슴에 담아 두었다. | ||||
그 후로 세월은 물처럼 흘러흘러 어느덧 50여 년이 지났다. 어느 날 吳昌碩은 꿈길에서 章씨 소녀를 만난 뒤, 바로 소개한 "明月前身"이라는 인장을 정성을 다 하여 새긴 것이다. 인장의 측면에 비록 꿈에서나마 본 흐릿한 모습이지만, 그리운 님의 모습을 새겨 넣었다. | ||||
또, "元配(원배) 章씨 부인이 내 꿈속에서나마 그립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바를 새기고 그 형상을 만들어 본다. 老缶(노부)는 쓰다." [元配章氏夫人夢中示形, 刻此作造像觀, 老缶記] 라고 인장을 새긴 동기를 기록한 것이다. 전혀 그의 감정은 노출시키지 않고 담담하게 사실만을 기록한 것이다. 그 어느 멍청한 인간처럼 무슨 유전자 검사 할 용의 있다느니, 선후배들이 자기 자신을 전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느니 하며 중언부언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짤막한 吳昌碩의 글을 보면 무한한 비애가 절절히 묻어나는 것이다. 吳昌碩의 제자가 나중에 이렇게 전한다. "스승님께서 이 인장을 새기시면서 슬픔을 이기지 못해 눈물이 칼에 뚝뚝 떨어져 몇 번이고 새기는 것을 멈추셨다." 吳昌碩은 하늘의 깨끗하고 밝은 달을 보며 章씨 부인을 생각한 것이다.
吳昌碩은 이후 이 인장을 몹시 아껴 그의 得意의 작품에는 반드시 이 인장을 찍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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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筆♡揮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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