盛年不重來 一日難再晨
젊은 호시절 거듭 오지 않으며,
하루에 새벽은 두번 다시 오지 않는다
東晉 시대 도연명의 雜詩 12수 가운데 첫번째 시에 나옴.
盛年不重來(성년부중래) 젊은 호시절은 거듭 오지 않으며
一日難再晨(일일난재신) 하루에 새벽은 두번 다시 오지 않는다
及時當勉勵(급시당면려) 때를 놓치지 말고 열심히 노력하라
歲月不待人(세월부대인)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으니..
歸去來辭로 잘 알려진 도연명은 술과 전원생활의 낙을 즐겨 읊었다. 때때로 술에 취해 동쪽 울타리의 국화를 따면서 남산을 바라보며 전원에 은거한 촌노의 한가로움을 노래한 것이 위의 구절이 나오는 '雜詩'이다. 그러나 이 시의 말미에는 후세들에게는 생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는 이런 멋진 경구를 남겼다.
서예가들이 지금도 즐겨 쓰는 위 句節들은 한구 한구가 모두 銘文으로, 명심보감에도 4句 모두 勸學文으로 인용되어 있다.
도연명(陶淵明 365~427) 이름은 잠(潛). 문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 놓고 스스로 오류(五柳) 선생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29세 때에 벼슬길에 올라 주(州)의 제주(祭酒)가 되었지만 얼마 안 가서 사임하였다. 그 후 군벌항쟁의 세파에 밀리면서 생활을 위하여 하는 수 없이 진군참군(鎭軍參軍), 건위참군(建衛參軍)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전원생활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한 그는 41세에 누이의 죽음을 구실삼아 彭澤縣의 현령(縣令)을 사임한 후 다시는 관직에 나가지 않는다. 이때 관직에서 물러나는 소회를 읊은 시가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이다. 鄕里의 전원으로 돌아와 스스로 낫과 괭이를 들고 농사를 지으면서 가난과 병고에도 62세에 생을 마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후에 그의 시호를 정절선생(靖節先生)이라 칭하였다. 도연명의 시는 4언체(四言體) 9편과 그때 유행하기 시작하던 5언체(五言體 :7言體와 더불어 定形詩 형식인 律詩(8句)와 絶句(4句)가 있으며 唐代 이후 한시의 주류를 이룸) 47편이 전해지고 있지고 있으며, 6조(六朝) 최고의 시인으로서 칭송받고 있다.
그의 시풍은 당대(唐代)의 맹호연(孟浩然) ·왕유(王維) ·유종원(柳宗元) 등을 비롯하여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끼쳐, 문학사상으로 남긴 업적은 매우 크다. 시 외에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 도화원기(桃花源記) 등 산문에도 뛰어났으며, 또 지괴소설집(志怪小說集), 수신후기(搜神後記)의 작자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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