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香遠♡益淸

고전의 향기

by 권석낙 2019. 9. 20.




고전의 향기

천재 시인 부부의 슬픈 사랑

 

  오늘날 부부는 쉽게 만나므로 그만큼 쉽게 헤어지고, 사랑도 쉽게 표현하므로 그만큼 흔한 것이 되어 버렸다. 유교(儒敎)의 나라로 불리는 조선시대의 부부 사랑은 어떠했을까. 우리의 상상처럼 예교(禮敎)에 묶여 그저 답답하고 꽉 막히기만 한 것이었을까. 지금의 부부들처럼 맘껏 발산할 순 없었지만 그래서 더욱 깊고 은근하였으며 너무도 짧은 인연이었기에 더욱 안타깝고 애절하였던 조선시대 천재시인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 부부의 사랑 얘기를 소개한다.

  군(君)은 성화(成化) 기해년(1479) 정월 모일에 태어났다. 처음 세상에 태어나서는 외가에서 자랐는데 어릴 때 영특하고 단정하였으며 놀고 장난하는 것이 모두 여인의 범절에 맞았다. 그래서 부친인 찬성공(贊成公)이 어질다고 여겨 친자식처럼 사랑하였다. 계축년 봄, 군의 나이 15세에 나에게 시집왔는데 높은 벼슬아치의 집안에서 자랐으면서도 교만한 모습이 없었고 시부모의 집에 들어와서는 예경(禮敬)의 행실을 다하였다. 나의 누이들과 더불어 어버이를 모신 자리에서 기쁜 기색으로 담소하며 매우 화락하니, 시부모들이 매우 좋아하였다.
  병진년에 내가 과거에 급제하였고 정사년에 분가(分家)하여 살았다. 길쌈에서부터 담장이며 건물에 이르기까지 집 안팎의 일들을 모두 군이 도맡았는데 일처리가 매우 찬찬하고 꼼꼼하였다. 비복(婢僕)을 부릴 때에는 조금이라도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하면 엄히 꾸짖어 상하가 분명하고 집안이 숙연하였다.
  나는 성품이 엉성하고 나태할 뿐 아니라 군이 어질었기 때문에 집안일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당시에 나의 조모와 외조모께서 모두 생존해 계셨는데 군은 철 따라 좋은 음식을 장만해 바치느라 늘 급급하여 여념이 없었다. 조모 한씨(韓氏)는 규범(閨範)이 매우 높고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 신명(神明)과 같았는데 사람들에게 자주 말하기를 “우리 손부(孫婦)는 참으로 어질다.” 하셨다. 외조모는 아직도 건강하신데 나에게 말씀하기를 “네가 태어날 때 내 나이 예순이었으니, 오늘 네 아내의 봉양을 받을 줄 알았겠느냐.” 하셨다.

  나는 몸가짐을 단속하지 않고 남들과 시 읊고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여 집안 형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도 군이 힘을 다해 비용을 마련하여 나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려고 애썼으며 혹시라도 뜻을 어기는 일이 있을까 걱정하였다. 내가 남에게 베풀 일이 있으면 역시 즐거운 마음으로 내 뜻을 따라주었다. 그리하여 집안이 가난했으나 군이 나는 그런 줄 알지 못하게 하였다.
  평소에 내가 군과 약속하기를 “어떻게 하면 군과 함께 녹거(鹿車)1)를 끌고 향촌(鄕村)에 돌아가 작은 집을 짓고 살며, 위로는 부모를 받들고 아래로는 자손을 기름으로써 평생의 즐거움을 이룰 수 있을꼬.” 하면, 군은 문득 기뻐하며 “이것이 나의 뜻입니다. 산수(山水) 간에 집을 지을 비용은 내가 마련하겠습니다.” 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벼슬을 얻으면 군은 기뻐하지 않았고 벼슬을 잃어도 군은 슬퍼하지 않았으니, 정의(情義)가 참으로 나와 맞았다. 대저 사람은 누군들 내조(內助)를 받지 않는 이가 있으랴만 어리석은 나의 경우에는 실로 남들보다 더하였다.
  올해 2월에 내가 남행(南行)하여 보령(保寧)의 수영(水營)에서 외삼촌을 뵙고 3월 10일쯤에 군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말을 달려 집에 돌아오니 군의 병이 이미 깊었다. 군은 나를 보고 말하지 못하였고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 만에 군이 말하기를 “오시는 게 어이 이리 더뎠소? 하마터면 얼굴을 보고 영결(永訣)하지도 못할 뻔했구려.”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나게 될 줄 생각이나 했으리오.
  병이 위중해지자 군은 손수 글을 써서 나의 누이들에게 주어 자식들을 부탁했다. 그리고 말하기를 “살아서 시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했으나 불효한 사람이 되지 않고 싶었소. 그러나 지금 병이 낫지 않으니 어이하겠소. 내가 죽은 뒤에는 이 글을 보기를 나를 보듯이 하구려.” 하였다. 군은 글을 다 쓰고는 나를 시켜 읽게 하고 들었다. 듣기를 마친 뒤 군은 길게 탄식하였고 임종에 나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잘 계시오. 잘 계시오. 나는 이제 가오.” 하였으니, 정신이 흐리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군은 6남을 낳았다. 장남 인량(寅亮)은 이제 겨우 아홉 살인데 어른들이 보고는 모두 ‘자질이 뛰어나다’고 칭찬하였다. 아버지를 따라 여막(廬幕)에 거처하며 고기를 먹지 않으며 거상(居喪)한 지 어언 3년이다. 그 사이에 병이 든 적이 있어 육즙(肉汁)을 만들어 주었더니, 거절하고 먹지 않았으며 그 뒤로는 나물죽도 먹으려 하지 않았다. 그 아래 대춘(大春)은 이제 겨우 8세이고, 그 아래 대붕(大鵬)은 태어난 지 2년만에 요절했다. 그 아래 딸 여순(女順)은 겨우 5세이고, 그 아래 딸 여항(女恒)은 겨우 세 살이다. 그 아래 아들 동숙(同叔)은 태어난 지 석 달이 채 못 되었다. 나와 군은 모두 해년(亥年)에 태어났는데 이 아이가 태어난 것도 해년이었다. 그래서 이름을 동숙이라 지었다. 이 아이는 태어나면서 용모가 매우 아름다워 군이 사랑하였다. 그래서 군이 병중에 탄식하기를 “우리 아이가 매우 아름다워 장성하는 것을 보려고 했는데 마침내 보지 못하게 되는구나!” 하였다. 군이 졸(卒)한 날은 3월 16일 계미(癸未)이고, 장례일은 5월 7일 임신(壬申)이다. 애통하도다!
  배필의 의리는 크니, 살아서는 함께 늙고 죽어서는 함께 가더라도 오히려 유감이 없을 수 없다. 계축년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세성(歲星)이 아직 일주(一週)하지도 않았는데2) 백년을 함께 살려던 계획이 여기에 그치고 만단 말인가. 비록 함께 살지 못하고 함께 가지는 못해도 1, 2십 년만 더 살아서 아들이 장가들고 딸이 시집가는 것만 보면 그래도 괜찮을 것이다. 아직 어린애들이 모두 강보에 있는데 군만 홀로 버리고 떠나 나의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니, 이는 모두 내가 불초하여 초래한 것이다. 군이야 운명인 것을 어이하리오!

 

1) 녹거(鹿車) : 사슴이 끄는 작은 수레이다. 후한(後漢) 발해(渤海) 사람으로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환소군(桓少君 )이 덕을 닦으며 검약하게 사는 포선(鮑宣)에게 시집가서, 청빈하고 고고하게 살려는 남편의 뜻을 따라 시집올 때 데리고 왔던 종들과 사치한 복식을 다 돌려 보낸 다음, 짧은 삼베 치마를 입고 녹거를 끌고 시댁으로 와서는 몸소 동이를 들고 물을 길어 부도(婦道)를 실천했다고 한다. 《小學 善行》
2) 세성(歲星)이... 않았는데 : 12년이 못 되었다는 말이다. 세성(歲星)은 목성(木星)인데 이 별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하늘을 한 번 도는 기간이 12년이라고 한다.

 

[君以成化己亥正月日生, 始生而育于外家. 幼英爽端潔, 嬉戲之事, 皆合女儀. 贊成公賢之, 愛若親子. 癸丑之春, 君年十五, 歸于誾. 生於簪纓之族, 而無驕惰之容, 入於舅姑之門, 而盡禮敬之實, 與誾群妹, 侍親之側, 怡怡然言笑, 融融然和樂, 父母甚悅之. 丙辰歲, 誾獲忝科第, 丁巳歲, 分產以居. 自女紅之事, 以曁垣墻室廬, 內外君無不治, 皆委曲詳盡, 馭婢僕, 少不如禮, 嚴加訶禁, 上下截然, 閫內肅然. 誾非但性本疏懶, 以君之賢, 於家事邈如也. 時, 誾內外王母俱無恙, 君具時鮮以供, 汲汲若不及. 內王母韓氏閨範甚高, 知人若神, 亟語於人曰: “吾孫婦賢矣哉!” 外王母李氏今尙康強, 詔誾曰: “汝生之時, 吾年及六十, 豈知今日受汝婦之養耶?” 誾不自檢, 喜與人詩酒爲樂, 不曾問有無, 君極力營辦, 務悅其意猶恐違, 有所施與, 亦樂爲之從, 家雖貧, 不使誾知也. 平居, 相與約曰: “安得與君共挽鹿車, 歸鄕村結廬, 上承父母, 下撫兒孫, 以遂百年之樂耶?” 君輒欣然曰: “是吾意也. 若夫山水之費, 吾其辦也.” 故誾得官君不喜, 失官君不戚, 情義誠有合於誾也. 夫人誰不資內輔者, 若誾之愚, 實有加焉. 今年二月, 誾南行, 謁舅氏於保寧之營, 三月之旬, 聞君之疾, 疾驅而還, 則疾已深矣. 君視我不能言, 我亦淚流, 欲拭不可. 久而言曰: “來何遲耶? 幾不及面訣矣.” 然豈料一朝奄忽乎? 病亟, 手爲書遺誾諸妹, 以兒輩爲託, 且云生不能孝於舅姑, 願不爲不孝, 病今不救, 奈何! 吾死之後, 視此書如視我也. 書畢, 令誾讀而聽之, 聽畢長歎. 臨絶, 顧誾曰: “好在好在! 吾今逝矣.” 精神之不爽如此. 君生六兒, 長兒寅亮始九歲, 而長者咸稱有奇質, 隨嚴於廬所, 不食肉今三年. 嘗疾, 爲肉汁以遺, 輒却之, 後雖菜羹, 亦未肯飮也. 次兒大春始八歲, 次兒大鵬, 生二歲而夭. 次女女順始五歲, 次女女恒始三歲, 次兒同叔, 生未三月. 誾與君俱亥年而兒生亦亥, 故名. 生而姸妙. 君美之. 病中歎曰: “吾兒甚佳, 冀見其長成, 其終不能乎!” 君卒之日, 三月十六日癸未也; 葬之日, 五月初七日壬申也. 痛矣哉! 伉儷之義大矣. 生則偕老, 死則偕逝, 猶不能無憾. 自癸丑至今, 歲星亦未周也, 百年之計, 其止於斯而已乎! 縱未能偕老偕逝, 猶更延一二十年, 以見男娶女歸, 庶亦可矣. 呱呱者皆在襁褓, 君獨棄而不顧, 重貽我父母之憂, 皆誾之不肖有以致之, 君其如命何!]

 

- 박은(朴誾)
 〈망실 고령신씨 행장(亡室高靈申氏行狀)〉,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

 

               

 

[해설]

  조선시대 연산군 때의 시인 읍취헌 박은(朴誾 1479~1504)이 세상을 떠난 아내 고령신씨(高靈申氏)를 위해 쓴 행장(行狀)이다. 이렇게 남편이 아내의 행장을 쓰는 일은 흔치 않다. 

 

  윗글에서 장남 인량이 아버지를 따라 여막에서 거상한 지 3년이라고 한 대목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읍취헌은 아내가 죽은 다음 해에 죽었으므로 3년 동안 거상하는 것을 보았을 리 없다. 이 글이 향후에 묘갈명을 받기 위해 쓴 행장이고 자신이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떠날 줄 몰랐기 때문에 이렇게 썼을 것이다.

  고령신씨의 부친은 좌의정에 오른 신용개(申用漑)이고, 증조부는 영의정에 오른 신숙주(申叔舟)였으니, 그녀가 당대 명문가의 후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용재(容齋) 이행(李荇)은 절친한 친구였던 읍취헌에 대해 “어릴 때부터 용모가 매우 영특하고 수려하며 눈썹과 눈이 그림으로 그린 것 같아 바라보면 속세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네 살 때 글을 읽을 줄 알았고 여덟 살에는 글의 대의(大義)를 대략 알았고 열다섯 살에는 문장을 지을 줄 알았다.” 하였다.

  고령신씨는 15세에 읍취헌과 결혼하여 25세에 세상을 떠났으니, 꼭 10년을 부부로 살았다. 그녀는 단정한 용모에 명문가의 후손이었고 읍취헌은 천상의 사람 같은 미남자요 당대에 손꼽히는 재사(才士)였으니, 이들 청춘 부부는 세상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으리라. 또한 이들 부부는 동갑이었고 금슬이 매우 좋았으니, 읍취헌은 “나는 한두 해 전부터 머리에 흰 머리털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흰 머리털이 자주 보이자 아내가 족집게로 뽑아서 보여 주기에 그저 웃고 말았다.”고 술회한 바 있다. 아내가 남편의 새치를 뽑아주는 요즘 여느 부부의 다정한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사랑하던 아내가 생후 백일이 못 된 예쁜 아들 동숙을 두고 차마 감기지 않는 눈을 감은 지 겨우 한 해 뒤, 읍취헌도 갑자사화(甲子士禍)의 와중에서 형장의 이슬로 스러졌다. 훗날 정조(正祖)로부터 “조선 제일의 시인”이란 극찬을 받은 이 천재 시인은 26세의 아까운 나이로 그 짧고 찬란한 삶을 마치고 만 것이다. 참으로 애절하고 기막힌 사연이 아닐 수 없다.

  “배필의 의리는 크니, 살아서는 함께 늙고 죽어서는 함께 가더라도 오히려 유감이 없을 수 없다.”고 한 읍취헌의 말이 문득 생각난다. 어쩌면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가고 싶어서 속세를 서둘러 떠났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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