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집주(論語集注) - 18 - 미자(微子) - ④
논어집주 (論語集注)
| 논어(論語) - 18 - 미자(微子) - ④ | |
| 1 | 齊人이 歸女樂이어늘 季桓子受之하고 三日不朝한대 孔子行하시다. |
| 2 | 제인이 귀녀악이어늘 계환자수지하고 삼일부조한대 공자행하시다. |
| 3 | 제(齊)나라 사람이 미녀들로 구성된 가무단을 보내오자, 계환자(季桓子)가 그것을 받고 3일 동안 조회(朝會)하지 않으니, 공자께서 떠나셨다. |
| 4 | The people of Ch'î sent to Lû a present of female musicians, which Chî Hwan received, and for three days no court was held. Confucius took his departure. |
| 논어집주(論語集注) - 18 - 미자(微子) - ④ |
| 齊人歸女樂 季桓子受之 三日不朝 孔子行 제(齊)나라 사람이 미녀들로 구성된 가무단을 보내오자, 계환자(季桓子)가 그것을 받고 3일 동안 조회(朝會)하지 않으니, 공자께서 떠나셨다. 歸 如字 或作饋 朝 音潮 ○ 季桓子 魯大夫 名斯 按史記定公十四年 孔子爲魯司寇 攝行相事 齊人懼 餽女樂以沮之 계환자는 노나라 대부고 이름은 사(斯)다. 사기에 따르면, 정공 14년에 공자가 노나라 사구가 되어 재상의 일을 대신 행하였다. 제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여악대를 보내어 그를 저지하였다. 史記世家 定公以孔子爲中都宰 一年四方皆則之 由中都宰爲司空 由司空爲大司寇 定公十四年 孔子年五十六 由大司寇攝行相事 於是誅魯大夫亂政者少正卯 與聞國政三月 粥羔豚者 不飾賈 男女行者別於塗 塗不拾遺 四方之客至于邑者 不求有司(有司常供其職 客求而有在也) 皆予之以歸 齊人聞而懼 曰孔子爲政必覇 覇則吾地近焉 我爲之先幷矣 盍致地焉 犂鉏曰 請先嘗沮之 沮之不可則致地 庸遲乎 於是選齊國中女子好者八十人 皆衣文衣而舞康樂文馬三十駟遺魯君 陳女樂文馬於魯城南高門外 季桓子微服往觀 再三將受 乃語魯君爲周道遊 觀終日 怠於政事 子路曰夫子可以行矣 孔子曰 魯今且郊 如致膰於大夫 則吾猶可止 桓子卒受齊女樂 三日不聽政 郊又不致膰俎於大夫 孔子遂行 사기의 공자세가에 따르면, 노나라 정공은 공자를 중도재로 삼았고, 1년 만에 사방에서 그를 본받았다고 한다. 중도재에서 사공이 되었고, 사공에서 대사구가 되었으며, 정공 14년에 공자는 나이가 56세였는데, 대사구를 거쳐 재상의 일을 대행하게 되었다. 이에 노나라 대부로서 정사를 어지럽힌 자인 소정묘를 주살하였다. 국정을 듣는 것에 참여한 지 3개월 만에 양고기와 돼지고기를 파는 사람은 그 값을 속이지 않았으며, 길을 가는 남녀는 길을 달리하였고,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았다. 사방의 여행객으로서 도읍에 오는 자들은 유사에게 구하지 않아도(유사는 항상 그 맡은 것을 공급하니, 손님이 구하여 갖게 되는 것이다), 모두 (필요한 물자를) 주어서 돌아가게 하였다. 제나라 사람들이 이를 듣고서 두려워하며 말하길, ‘공자가 정치를 하면 반드시 패자가 될 것이고, 패자가 되면 우리나라 땅이 그에 가까우니, 우리나라는 그에 의해서 먼저 병탄될 것이다. 어찌하여 그에게 땅을 바치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여조가 말하길, ‘먼저 시험 삼아 저지해보기를 청합니다. 저지하는 것이 안 되면 그 때 땅을 바친다고 해도, 어찌 늦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제나라 안에서 예쁜 여자 80명을 선발하여 모두 무늬옷을 입히고 강악을 춤추게 하고는 장식한 말 120마리와 함께 노나라 임금에게 바쳤다. 여악대와 장식한 말을 노나라 도성 남쪽 고문 밖에 진열해놓았는데, 계환자가 미복으로 갈아입고 가서 살펴보고는 재삼 장차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마침내 노나라 임금에게 함께 순시하며 주유하자고 말하고는, 종일토록 구경하느라, 정사를 게을리하였다. 자로가 말하길, ‘선생님께서 떠나실 수 있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자가 말하길, ‘노나라는 지금 郊제사를 지내고 있으니, 만약 대부들에게 제사지낸 고기를 보내온다면, 나는 그래도 머무를 수 있겠다.’라고 하였다. 계환자는 마침내 제나라 여악대를 받아들였고, 3일 동안 정사를 듣지 않았다. 또한 郊제사를 지냈어도 제사지낸 고기를 대부들에게 보내지 않았다. 공자는 마침내 노나라를 떠났다. 尹氏曰 受女樂而怠於政事如此 其簡賢棄禮 不足與有爲 可知矣 夫子所以行也 所謂見幾而作 不俟終日者與 윤씨가 말하길, “여악대를 받고서 정사에 게을리한 것이 이와 같았으니, 그가 어진 이를 소홀히 대하고 예를 저버린 것이므로, 그와 더불어 훌륭한 일을 도모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자께서 떠나신 까닭이다. 이른바 ‘기미를 보고 바로 일어나지, 종일토록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이겠지!”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於用孔子之時而如此 簡賢也 三日不朝 棄禮也 신안진씨가 말하길, “공자를 기용할 때임에도 이와 같이 하였으니, 이는 어진 사람을 소홀히 대한 것이고, 3일이나 조회하지 않았으니, 이는 예를 저버린 것이다.”라고 하였다. 見幾而作不俟終日: 此引易繫辭之語 이는 주역 계사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問史記載魯今且郊如致膰于大夫 則吾可以止 設若致膰 則夫子果止否 朱子曰 也須去 只是不若此之速 必別討一事故去 且如致膰亦不是大段失禮處 聖人但因此且求去爾 누군가 묻기를, “사기에 ‘노나라는 지금 郊제사를 지내는데, 만약 대부들에게 제사지낸 고기를 보내오면 나는 그칠 수 있겠다’는 공자님의 말씀이 기재되어 있는데, 만약 진짜로 제사지낸 고기를 보내왔다면 공자님께서 과연 그쳤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길, “그래도 반드시 떠났을 것이다. 다만 이렇게 빨리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드시 달리 구실을 구하여 떠났을 것이다. 또한 제사지낸 고기를 보내는 일 역시 대단히 예를 잃은 부분도 아니다. 성인께서는 단지 이로 인하여 떠남을 구하였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孔子於受女樂之後而遂行 若言之似顯君相之過 不言則己爲苟去 故因膰肉不至而行 則吾之去國以其不致膰爲得罪於君耳 공자는 여악대를 받아들인 후에 마침내 떠났는데, 만일 이를 말한다면 임금과 재상의 잘못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일 것이고, 말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구차하게 떠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지낸 고기를 보내오지 않았음을 이유로 떠난다면, 내가 나라를 떠나가는 것은 그저 제사지낸 고기를 보내지 않은 것을 임금에게 죄를 지었기 때문인 것으로 여기는 것일 뿐이다. 南軒張氏曰 去讒遠色 賤貨而貴德 所以勸賢也 今好色而忘敬賢之心 則道之不行 可見矣 是以去之 남헌장씨가 말하길, “참소를 제거하고 여색을 멀리하며, 재화를 천하게 여기고 덕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현자를 권면하는 방법이다. 지금 여색을 좋아하면서 현자를 공경하는 마음을 잊었다면, 도가 행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으니, 이런 까닭으로 떠난 것이다.”라고 하였다. 吳氏曰 夫子嘗適齊矣 已不能用 及反而仕魯 又沮人用之 怠己而忌人 愚不肖之通患也 桓子受制陽貨四五年 幾不免死 一旦得脫虎口 而與夫子從事 此其發憤自强之日也 而境順於前心 卽矯逸 夫子方欲輔桓子以有爲 而桓子所爲若是 固不得不行也 孟子曰 孔子於季桓子 見行可之仕 此曰 季桓子不朝 孔子行 其仕其行 皆以桓子 而定公徒擁虛名於其上也 悲夫 오씨가 말하길, “공자께서 일찍이 제나라에 가셨다가, 이미 기용되지 못하게 되었고, 노나라로 돌아와서 벼슬함에 이르러서는, 다시 다른 사람이 공자를 기용하는 것을 제인들이 저지하였으니, 자신에게는 게으르며 남에게는 시기하는 것이 바로 어리석고 불초한 자들의 공통된 병통이다. 계환자는 양화에게 4-5년 가량 통제를 받아서 거의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다가, 하루아침에 호랑이의 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서, 공자와 더불어 정사를 하게 되었으니, 이는 그가 발분하여 자강해야 할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뜻밖에도 예전의 마음에 순응하여 교만하고 안일하였다. 공자께서 바야흐로 계환자를 보좌하여 훌륭한 일을 도모할 수 있었으나, 계환자가 행한 바가 이와 같았으니, 본래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맹자가 말하길 ‘공자가 계환자에게 있어서 도가 행해질 것을 본 벼슬이었다’고 하였고, 여기서 말하길, ‘계환자가 조회하지 않자 공자는 떠났다.’고 하였으니, 공자가 벼슬하거나 떠나는 것은 모두 계환자 때문이었을 뿐이고, 노정공은 헛되이 그 위에서 허명만 끌어안고 있었던 것이니, 슬프도다!”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魯受女樂 夫子已有去志 若遽然便去 非惟顯君之過 且中齊人之計 適然魯郊又不致膰肉 故因此微過遂不稅冕而行 쌍봉요씨가 말하길, “노나라가 여악대를 받아들이자, 공자께서는 이미 떠날 뜻을 품고 계셨다. 만약 갑자기 곧 떠난다면, 단지 임금의 잘못을 드러내는 것일 뿐 아니라, 또한 제나라 사람들의 계략에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노나라에 郊제사가 있었고, 또한 제사지낸 고기를 보내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 작은 잘못을 빌미로 하여 마침내 면류관도 벗지 않은 채 떠났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齊人歸女樂 只說箇歸字 畢竟是歸其女樂於魯君相 皆有之 不是專獻於桓子 三日不朝 亦是君臣皆不朝 然當時辭受之權 盡出於季氏 想是 他旣自受 又爲定公受之 又曰 女樂亦說得不一 一說陳女樂於城南 季桓子君臣共往觀之 三日不朝 一說 召女樂而受之 三日不朝 這兩說不同 然無可考訂處 未詳孰是 제나라 사람들이 여악대를 보낸 것에 대하여 단지 하나의 歸자만 말하였지만, 필경은 그 여악대를 노나라 임금과 재상에게 보내어 모두 갖도록 하였던 것이지, 오로지 계환자에게만 바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3일간 조회하지 않았다는 것도 역시 임금과 신하가 모두 조회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당시 여악대를 사양하거나 받아들이는 권한은 모두 계환자로부터 나왔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그가 이미 스스로 받아놓고서 다시 정공을 위해서 받았을 것이다. 다시 말하길, 여악대에 대한 것도 역시 설이 하나가 아니다. 일설에 의하면, 여악대를 노나라 도성 남쪽에 펼쳐놓았는데, 계환자와 정공이 함께 가서 이를 살펴보았고 3일간 조회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다른 일설에 의하면, 여악대를 불러다가 이를 받아들였고, 3일간 조회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두 가지 설이 같지 않은데, 그러나 상고하여 정정할 만한 부분이 없으니, 어떤 것이 옳은지 상세하지 않다. 新安陳氏曰 萃淫聲美色而爲一者 女樂也 爲國家禍其有甚於此哉 신안진씨가 말하길, “음탕한 노랫소리와 예쁜 여색을 모아서 하나로 만든 것이 바로 여악대다. 국가에 대한 禍가 됨에 어찌 이보다 심한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 范氏曰 此篇記仁賢之出處 而折中以聖人之行 所以明中庸之道也 범씨가 말하길, “이 편은 인자와 현자의 벼슬에 나가고 그만둠을 기록하면서도, 성인께서 행한 바로써 절충하였으니, 중용의 도를 밝히고자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仁謂三仁 賢謂柳下惠及下章逸民之類 夫子於齊魯非不欲仕 亦未嘗必於仕 但可仕則仕 可止則止 此所以爲中庸之道也 接輿以下 則未免於偏而過之矣 경원보씨가 말하길, “仁은 은나라의 세 어진 사람을 일컬어 말한 것이고, 賢은 유하혜 및 아래 장에서 말한 逸民 같은 부류를 일컬어 말한 것이다. 공자께서 제나라와 노나라에서 벼슬하고자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역시 일찍이 반드시 벼슬하고자 한 적도 없었다. 단지 벼슬할 만하면 벼슬하고, 그칠만 하면 그쳤던 것이니, 이것이 바로 중용의 도가 되는 까닭이다. 접여 이하는 곧 한쪽에 치우쳐서 지나치게 됨을 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라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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