贈東林總長老(증동림총장로) : 소식(蘇軾)
동림사의 큰 스님에게 드림
溪聲便是廣長舌,山色豈非清净身。
夜來八萬四千偈,他日如何舉似人。
溪聲便是廣長舌: 계곡물 소리는 바로 부처님의 설법이니
山色豈非清淨身: 산색은 어찌 청정한 법신이 아니리요?
夜來八萬四千偈: 밤사이에 팔만 사천 게송이 있으니
他日如何學似人: 다른 날 어떻게 사람들에게 설명할까?
* 여산을 노래한 오도시(悟道詩)이다.
*偈(게): 불경(佛經) 귀글. 인도의 문학이나 불경 가운데 성가(聖歌)나 운문.
광장설이란, 《법화경> <신력품(神力品)>에서 나온 것이다.
즉 "세존이 큰 신력으로 광장설을 나오게 하였는데 위로는 범세(梵世)에 까지 이르렀다 (世尊現大神力,出廣長舌,上至梵世)."가 그것이다.
불교에서는 부처가 소위 32상(相)을 가지고 있으며, 어떠한 형상으로 나타나 설법을 한다고 전한다. 광장설이 바로 32상 중의 하나인 것이다.
청정신이란 바로 청정법신(清淨法身)의 준말로 삼신(三身) 중의 하나이다.
만법(萬法:森羅萬象과 宇宙萬物)은 모두 진여(眞如) 법성(法性) 자성(自性)에서 나온 것으로, 고로 만법 자체가 바로 진여이고 법성이며 자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만물 모두가 부처이기에 삼라만상 모두에도 자성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인은 광장설상과 청정법신을 인용하여 불법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음을 비유, 설명하고 있다.
즉 불법은 진여법체(眞如法體)의 완전하고 큰 공간 속에 위치하고 있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이 언제 어디서든지 항 상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선종의 "푸르고 푸른 대나무 모두가 법신이고, 울창한 황색 꽃은 반야가 아님이 없다.
(青青翠竹,盡是法身,鬱鬱黃花,無非般若.)”《景德傳燈錄》의 사상과 일치하고 있다.
이로 보아 소식은 일반적인 생활 속에서 사물을 관조한 결과, 그의 시가 속에는 이러한 선종의 경전과 선승들의 깨달음의 표시인 선종 공안(公案)의 화두(話頭)나 기봉(機鋒) 등이 들어가 매우 생동감이 뛰어나며 풍부하고도 오묘한 철리성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시 이외에도 <등령롱산(登玲瓏山)〉 〈사주승가탑(泗州僧伽塔)〉
<화자유민지회구(和子由뗏池懷舊)〉 등이 모두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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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墨韻禪心】
蘇軾:「溪聲盡是廣長舌」(附解說)
溪聲盡是廣長舌,
山色無非清淨身;
夜來八萬四千偈,
他日如何舉似人。
계곡 물소리가 다 광장설(廣長舌)이요
산빛은 청정신(清淨身) 아닌 것이 없다
-蘇軾-〈廬山東林寺偈〉
壬寅年正月自在主人書
溪声便是广长舌,山色岂非清净身。
夜来八万四千偈,他日如何举似人。
苏轼《赠东林总长老》
*장광설(長廣舌)
길고도 조리 있게 잘 하는 말솜씨, 쓸데없이 장황하게 늘어놓는 말.
[긴 장(長/0) 넓을 광(广/12) 혀 설(舌/0)].
말을 잘 하면 모두들 부러워한다. 이에 관해 속담도 많고, 성어도 많이 전한다. ‘말만 잘하면 천 냥 빚도 가린다’고 값어치로 따지는가 하면 듣기만 해도 즐겁다고 한다. 말을 잘 하면 靑山流水(청산유수)와 같다고 하고, 나아가 폭포서 떨어지는 듯 시원하다고 口若懸河(구약현하)라 한 것이 그것이다.
또 ‘말 잘 하기는 소진 장의로군’이라며 중국 戰國時代(전국시대)때 合從連衡(합종연횡)으로 설득하여 각국을 흔들었던 蘇秦(소진)과 張儀(장의)에 비유한다. 반면 말을 꼭 해야 할 때 입을 다물고 있으면 찬바람 맞은 매미 같다며 噤若寒蟬(금약한선, 噤은 입다물 금)이라 핀잔 받고 나중에 왜 참았지 후회한다. 말을 잘 하기도, 때를 잘 가리기도 어렵다.
말을 힘차게 또 길게 잘하는 솜씨, 또는 쓸데없이 장황하게 늘어놓는 말을 흔히 長廣舌(장광설)이라 한다. 말솜씨인데 말씀 說(설)이 아니고 혀 舌(설)이 사용돼 어리둥절하지만 연유가 있다. 혀가 길고 넓다고 한 것은 부처님의 모습이 일반 사람들과 다른 용모상의 특징 三十二相(삼십이상)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불교 경전에 따라 廣長(광장설), 大舌相(대설상)이라고도 하는 부처님 혀의 특징은 넓고 길어 내밀면 이마 부분까지 닿을 정도라 했다. 겉으로 드러난 32가지 相(상)은 부처님과 인도 신화 속의 正法(정법)으로 온 세계를 통솔한다는 轉輪聖王(전륜성왕)도 갖고 있지만 부처에겐 보이지 않는
八十種好(팔십종호)가 따로 있단다.
이처럼 거룩한 부처님의 장광설은 넓고 긴 혀로 부드럽게 중생에게 지혜를 널리 알리는 가르침을 말했다. 혀가 코에 닿는 긴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고 했으니 이마까지 늘일 수 있는 부처야말로 진실하고 알찬 말만 했을 것은 당연하다.
길고 넓은 혀는 뛰어난 지혜와 웅변의 상징이다. 宋(송)나라 시인인 蘇東坡(소동파)가 깨달음을 얻고 照覺禪師(조각선사)에게 준 시에서도 이렇게 말한다. "시냇물 소리는 부처의 설법이요, 산 빛은 어찌 청정한 부처의 몸이 아니리(溪聲便是廣長舌 山色豈非清淨身/ 계성편시광장설산색기비청정신)."
좋은 뜻의 이 말이 언젠가부터 끝도 없이 지루하게 늘어놓는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굳어졌다. 우리의 사전에도 1960년대 이후에 이 뜻이 추가됐다고 하니 멀지도 않다. 바쁜 현대인이 남의 말을 귀담아들을 여유가 없어져 옳은 말이라도 귀찮게 여겼을 법하다.
부처님의 옳은 말이라도 계속되면 귀를 닫는데 범인들이야 말할 것이 없다.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다’고 하고, 言甘家 醬不甘(언감가 장불감)이라며 ‘말 많은 집은 장맛도 쓰다’고 했다. 하물며 서로가 자기만 옳고 처지가 바뀌면 어김없이 ‘내로남불’이 판치니 어떻게 들을 이야기가 많겠는가.
소식蘇軾이 여산 동림사에서 상총조각常總照覺 선사와 함께 불법佛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유정물이나 무정물 모두 일체종지를 이룰 수 있다(情與無情, 同圓種智)’란 말에 이르러 홀연 깨달아지는 바가 있어 그 터득한 바를 참선삼경參禪三境으로 나타냈는데, 이른바 ‘참선전參禪前’과 ‘참선중參禪中’, 그리고 ‘참선오도후參禪悟道後’란 3개의 게송이다.
參禪前
橫看成嶺側成峰 횡간성령측성봉
遠近高低各不同 원근고저각부동
不識廬山眞面目 불식여산진면목
只緣身在此山中 지연신재차산중
앞에서 보면 고개요 옆에서 보면 봉우리라
거리 따라 높이 따라 같은 것이 하나 없네
여산의 참모습을 알아보지 못하는 건
이 몸이 이 산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네
參禪中
廬山烟雨浙江潮 여산연우절강조
未到千般恨不消 미도천반한불소
及至歸來無一事 급지귀래무일사
廬山烟雨浙江潮 여산연우절강조
천하절경 여산 운무와 절강의 바닷물을
보지 못했을 때는 아쉽기 그지 없더니
보고 나서 돌아오니 별다를 게 하나 없고
여산의 연무와 절강의 바다 그대로구나
參禪悟道後
溪聲盡是廣長舌 계성진시광장설
山色無非淸淨身 산색무비청정신
夜來八萬四千偈 야래팔만사천게
他日如何擧似人 타일여하거사인
계곡의 물소리는 부처님의 설법이고
산빛 모두 부처님의 청정법신이로다
밤새 들은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을
이후에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 전할까
▶ 浙江潮(절강조): 전당강錢唐江에 드나드는 밀물과 썰물을 가리킨다. 여산의 아름답고 신비한 연무와 전당강의 웅위롭고 장대한 밀물과 썰물은 명승으로 꼽힐 만큼 장관이다.
▶ 到得(도득) 두 구절: 《오등회원五燈會元》에 실린 청원유신靑原惟信 선사의 ‘老僧三十年前未參禪時, 見山是山, 見水是水. 及至後來, 親見知識, 有個入處, 見山不是山, 見水不是水. 而今得個休歇處, 依前見山是山, 見水是水. 大衆, 這三般見解, 是同是別. 有人緇素得出, 許汝親見老僧(내가 30년 전 참선을 하지 않았을 때에는 산을 보면 산이고 물을 보면 물이었다. 그 뒤에 선지식을 친견하고 약간 아는 것이 생긴 뒤에는 산을 보면 산이 아니고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마음속 번뇌가 끊긴 뒤로는 전과 같이 산을 보아도 그저 산이고 물을 보아도 그저 물일 뿐이다. 그대들이여! 이 세 가지 견해가 같은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 이 중에 가려내는 사람이 있다면 노승이 친견을 허락하겠노라).’이라고 한 대목을 인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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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침을 얻은 뒤 불법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은 소식이
형남荊南 옥천사玉泉寺에 있는 승호承浩 선사의 명성을 들었다.
호승지심好勝之心이 생긴 소식이 평상복을 입고 선사를 찾아가 다짜고짜 물었다.
“듣기에 선사의 불법이 높다고 하던데 깨달음이란 게 도대체 무엇이오?”
승호 선사가 빙그레 웃으며 소식에게 되물었다.
“어디서 온 뉘시오?”
소식이 거만한 낯빛으로 말했다.
“이 세상 선지식들의 무게를 재는 칭稱가라 하오.”
그 말을 듣고 선사가 소식의 얼굴 앞으로 바짝 다가가 큰 소리를 지른 뒤에 물었다.
“내가 방금 지른 소리는 몇 근이나 될 것 같소?”
소식은 아무런 대답도 못한 채 서 있다가 큰절을 하고 물러났다.
성철 스님의 법어로 더 널리 알려져 있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의 출처는
청원유신靑原惟信 선사의 어록에 실린 ‘見山是山, 見水是水’란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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