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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수첩

風樹之歎

by 권석낙 2023. 8. 25.

樹欲靜而風不止 (수욕정이풍부지)

子欲養而親不待 (자욕양이친부대)

往而不可追者年也 (왕이불가추자년야)

去而不見者親也 (거이불견자친야)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봉양(奉養)하고자 하나

부모(父母)는 기다려 주시지 않네.

한번 흘러가면 쫒아갈 수 없는 것이 세월이요

가시면 다시 뵐 수 없는 것이 부모님이시네.

 

​전한(前漢)의 한영(韓嬰)이

시경(詩經)의 해설서(解說書)로 지은

『한시외전(韓詩外傳)』 9권에 나오는

주(周)나라 사람 고어(皐魚)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효도(孝道)를 다하지 못한 채

부모(父母)를 잃은 자식(子息)의 슬픔을 가리키는 말로

부모(父母)가 살아계실 때

효도(孝道)를 다하라는 뜻의 교훈(敎訓)입니다.

 

공자(孔子)가 제자(弟子)들과 함께 유랑(流浪)하다가

몹시 슬퍼하며 울고 있는

주(周)나라의 고어(皐魚)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공자(孔子)가 다가가 물어보니

​고어(皐魚)는 우는 까닭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세가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첫째는 젊었을 때 학문(學文)을 좋아하여

천하(天下)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집에 와보니

부모(父母)님이 이미 세상(世上)을 떠나신 것이요,

 

둘째는 섬기고 있던 군주(君主)가

사치(奢侈)를 좋아하고 충언(忠言)을 듣지 않아

그에게서 도망쳐온 것이요,

 

셋째는 벗과 부득이한 사정으로

교제(交際)를 끊은 것입니다.

무릇 나무는 조용히 있고자 하나 바람 잘 날이 없고,

자식(子息)이 부모(父母)를 모시고자 하나

부모님은 이미 안 계신 것입니다.

흘러간 세월(歲月)을 돌릴 수도 없으니

다시는 뵐 수 없는 것이 부모(父母)님이지요.​」

 

고어(皐魚)는 이 말을 남기고

마른 나무에 기댄 채 죽고 말았답니다.

 

고어(皐魚)가 남긴 이 말에서

풍수지탄(風樹之嘆)

또는 풍목지비(風木之悲)라는

고사성어(故事成語)가 비롯되었습니다.

 

효(孝)를 노래한 우리나라의 시조도 많이 있습니다.

 

어버이 살았을 제 섬길 일을 다 하여라.

지나간 뒤에는 애달프다 어이 하리

평생에 고쳐 못 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조선시대(朝鮮時代)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지은

『훈민가(訓民歌)』 16수 중 하나로,

평소(平素)에는 효(孝)의 중요성(重要性)을

잘 깨닫지 못하다가

어버이 돌아가신 후에

후회(後悔)해도 소용(所用)없으니

늘 효행(孝行)을 하려고

노력(努力)하라는 뜻의 시조입니다.

 

반중(盤中) 조홍(早紅)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유자(柚子)이 아니라도 품엄 즉도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이 업슬세 글로 셜워하나이다.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의 연시조

『조홍시가(早紅枾歌)』 4수 중 하나입니다.

박인로(朴仁老)가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으로부터

감을 대접(待接)받은 뒤

느낀 바가 있어

회귤고사(懷橘故事)를 생각해서 지은

사친가(思親歌)입니다.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애틋한 심정(心情)을 노래한 것이지요.

 

회귤고사(懷橘故事)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중국(中國)의 삼국시대(三國時代)

오(吳)나라 사람인 육적(陸績)이

여섯살 때 원술(袁術)의 집에 갔는데,

귤을 먹으라고 내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린 육적(陸績)은

그 귤을 어머니에게 갖다 드리려고

살짝 품었답니다.

그리고 하직인사(下直人事)를 하고 나오다가

그만 소매속의 귤을 떨어뜨려 들켰는데,

이 일로 인해

그의 효성(孝誠)이 드러나게 되었던 일을 말합니다.

 

뉘라서 까마귀를 검고 흉하다 했는가

반포보은(反哺報恩)이 그 아니 아름다운가

사람이 저 새만 못함을 못내 슬퍼하노라.

 

조선 후기(朝鮮後期)의 가객(歌客) 박효관(朴孝寬)의

『교훈가(敎訓歌)』란 시조에 나오는 노래입니다.

 

까마귀는 다 자라면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먹이는 새라서

반포조(反哺鳥)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반포보은(反哺報恩),

또는 반포지효(反哺之孝)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반포(反哺)란 받아먹은 것을 되돌려 갚는 것이니,

까마귀를 자오(慈烏)라고도 하고

효조(孝鳥)라고도 부릅니다.

 

한낱 미물(微物)로만 여겼던 까마귀야말로

키워준 어미 새의 은혜(恩惠)에

보답(報答)할 줄 아는 영특(英特)한 새이니,

 

겉 모양만 보고 함부로 비웃으면 안되겠습니다.

오히려 겉은 희고 속은 시커먼 인간(人間)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인간(人間)이 까마귀만도 못해서야 안되겠지요?

반포지효

http://blog.naver.com/ckn7138/80212636782

 

부모님의 마음과 자식된 도리

http://blog.naver.com/ckn7138/220269323828

 

http://blog.naver.com/ckn7138/220703784788

 

금지효자(今之孝者) 시위능양(是謂能養) - 오늘날의 효도(孝道)란?

효(孝)는 늙을 노(老)와 아들 자(子)의 결합(結合)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들이 늙은 부모(父母)를 업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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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포지효(反哺之孝) 오조사정(烏鳥私情)

 

士有親在堂(사유친재당)

貧無甘旨具(빈무감지구)

微禽亦動人(미금역동인)

淚落林烏哺(루락임오포)

 

선비가 집에 부모(父母)님을 모시고 있는데,

가난하여 맛있는 음식(飮食)을 드리지 못하나니

미물(微物)인 새조차 사람을 감동(感動)케 하여

숲 까마귀의 반포(反哺)함에 눈물만 짓는구나.

 

인조실록(仁祖實錄)에 실려 있는 이 시(詩)는

구당(久堂) 박장원(朴長遠1612~1671)이

홀로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지어 올린 시(詩)로

인조(仁祖)는 이 글을 보고 박장원(朴長遠)의 효성(孝誠)에 감동(感動)하여

음식(飮食)과 옷감을 내려주어 어머니를 봉양(奉養)하게 하였답니다.

 

영조(英祖) 때 활약(活躍)했던 암행어사(暗行御使)로 유명(有名)한

박문수(朴文秀1691~1756)의 증조부(曾祖父)로

조선(朝鮮) 중기(中期)의 문신(文臣)인 박장원(朴長遠)은

본관(本貫)은 고령(高靈), 자(字)는 중구(仲久),

호(號)는 구당(久堂), 습천(濕川)이며 시호(諡號)는 문효(文孝)로

저서(著書)로는 구당집(久堂集)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능(無能)한 조선(朝鮮)의 선비들은

양반(兩班) 체면(體面) 치레를 하느라

그저 가난한 것을 신세(身勢) 타령만 했지

발벗고 나서서 궂은 일은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지요.

 

부모(父母)님께 맛난 음식(飮食)을 해 드리려면

당연(當然)히 그 자식(子息)이 능력(能力)이 있어야 합니다.

 

부정(不正)한 방법(方法)으로 부(富)를 축적(蓄積)하라는 것이 아니라

열심(熱心)히 일을 하여

필요(必要)한 만큼의 재력(財力)은 갖추어야 하겠지요.

 

지극(至極)한 효도(孝道)를 뜻하는 반포지효(反哺之孝)라는 말은

중국(中國) 명(明)나라 말기(末期)의 박물학자(博物學者)

이시진(李時珍1518~1593)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 실린

까마귀의 습성(習性)에 대(對)한 내용(內容)에서 비롯되었다는데,

까마귀는 부화(孵化)한지 60일 동안은

어미가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지만

이후(以後) 새끼가 다 자라면 먹이 사냥에 힘이 부친 어미에게

새끼가 먹이를 물어다 먹여 살린답니다.

 

그래서 까마귀를 자오(慈烏),

또는 반포조(反哺鳥)라고 한답니다.

 

이보다 천년(千年)도 더 오래된 중국(中國) 진(晉)나라 때에는

같은 뜻의 오조사정(烏鳥私情)이란 말이 있었습니다.

 

진(晉)나라 무제(武帝)가 이밀(李密224~287)에게

높은 관직(官職)을 내렸으나 사양(辭讓)하자

무제(武帝)는 그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하여

크게 화를 내었답니다.

 

이에 이밀(李密)이 진정표(陳情表)를 지어 올렸는데,

그 글에 오조사정(烏鳥私情)을 말하며,

원걸종양(願乞終養)을 청(請)했답니다.

 

즉(卽), 까마귀가 어미 새의 은혜(恩惠)에 보답(報答)하는

사사(私私)로운 정(情)을 가지고 있듯이,

어릴 적 자신(自身)을 키워준 늙은 할머니를

돌아가시는 날까지만 봉양(奉養)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請)하는 글로

이 글을 읽고도 울지 않는다면

효성(孝誠)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 유명(有名)한 글이지요.

 

다시 한번 효도(孝道)의 마음을 되새기게 합니다.

 

♣行有餘力 則以學文(행유여력 즉이학문)

 

쉰이 넘은 아들에게 "얘야, 차조심해라."

 

부모님을 깊이 사랑하는 효자(孝子)에게는

온화(溫和)한 빛이 있기 마련이다.

온화(溫和)한 빛이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즐거워하는 기색(氣色)이 있고,

즐거워하는 사람에게는

유순(柔順)한 모습이 있다.

 

효자(孝子)가 부모님을 모시는 태도(態度)는

마치 보옥(寶玉)을 손에 들었거나

무엇이 가득 담겨있는 그릇이라도 잡은 것 처럼,

떨어뜨릴세라 조마조마하며 조심스러워하는 것이다.

 

자식(子息)이 아무리 똑똑하고 뛰어나더라도

부모(父母)는 항상(恒常) 자식(子息)의 윗사람이다.

자식(子息)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부모(父母)에게는 어린 아이로만 보인다.

 

그런데 부모(父母) 앞에서

권위(權威)있고 엄숙(嚴肅)한 태도(態度)를 보이는 것은

자식(子息)된 도리(道理)가 아닌 것이다.

자식(子息)이 훌륭하고 존경(尊敬)받는

인물(人物)이 되었다 해도,

자기 어버이는 더욱 존경(尊敬)해야하고

조심스럽게 대해야 한다.

 

부모(父母)가 자식(子息)을 어려워한다면,

그것은 자식(子息)이

부모(父母)를 잘못 섬기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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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語(논어) 學而篇(학이편)에

 

子曰(자왈),

弟子 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而親仁

(제자 입즉효 출즉제 근이신 범애중이친인)

行有餘力 則以學文

(행유여력 즉이학문)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

『젊은 사람은 집에 들어가면 부모님께 효성(孝誠)스럽고,

밖으로 나가면 윗사람에게 공경(恭敬)스러우며,

언행(言行)이 근엄(謹嚴)하고 믿음성이 있으며,

널리 여러 사람을 사랑하고 인(仁)을 가까이 하되,

이렇게 하고도 남는 힘이 있으면

그 힘으로 글을 배우는 법(法)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즉, 인간(人間)의 기본도리(基本道理)를 실천(實踐)하는 것이

먼저라는 점을 분명(分明)하게 강조(强調)하신 말씀이지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고 하였는데,

옛 것은 시대(時代)에 맞지 않는다고 함부로 배척(排斥)하고

경박(輕薄)한 지식(知識)만 머리 속에 주입(注入)하는

잘못된 교육행태(敎育行態)가

요즈음 만연(蔓延)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지혜(知慧)는 없고 지식(知識)만 넘쳐나다보니

도덕심(道德心)이 결여(缺如)되고

인간성(人間性)마저도 마비(痲痺)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패륜범죄(悖倫犯罪)까지 늘어나고 있는 추세(趨勢)라고하니

더욱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인성교육(人性敎育)이 더욱 더

필요(必要)한 시대(時代)가 아닐까요?

 

♣금지효자(今之孝者) 시위능양(是謂能養) - 오늘날의 효도(孝道)란?

 

효(孝)는 늙을 노(老)와 아들 자(子)의 결합(結合)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들이 늙은 부모(父母)를 업고 있는 모양(模樣)을 본뜬 글자로

자식(子息)이 부모(父母)를 섬기는 도리(道理)를 의미(意味)합니다.

 

효(孝)는 유교(儒敎)에서

가장 중요시(重要視)하는 행실(行實)이며,​

사람은 무엇보다 근본(根本)을 알아야 하고

은혜(恩惠)를 갚을 줄 알아야 합니다.

 

부모(父母)와 자식(子息) 사이를 천륜(天倫)

즉(卽), 하늘이 맺어준 인연(因緣)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모(父母)는 자식(子息)을 위(爲)해서라면

스스로를 희생(犧牲)하고, 피땀을 흘리며,

때로는 목숨까지 걸기도 하면서

자식(子息)을 먹여 살리고, 가르치며,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고 있지만,

자식(子息)은 그 사랑을 제대로 알아채지 못하다가

뒤늦게 풍수지탄(風樹之嘆)을 하는 경우(境遇)가 너무나 많지요.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에 나오는

자유(子游)와 공자(孔子)의 문답(問答)을 살펴보겠습니다.​

 

子游問孝 子曰

자유문효 자왈

 

今之孝者 是謂能養 至於犬馬 皆能有養 不敬 何以別乎?

금지효자 시위능양 지어견마 개능유양 불경 하이별호?

자유(子游)가 효(孝)를 묻자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의 효도(孝道)란

단지(但只) 부모(父母)를 먹여 살릴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개와 말에 이르기까지 모두 먹여 살리고 있으니

공경(恭敬)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구별(區別)할 수 있겠는가?

 

자유(子游)는 공자(孔子)의 뛰어난 제자(弟子)로서

공문십철(孔門十哲)의 한 사람인데

공자(孔子)보다 45세(歲) 연하(年下)로

자하(子夏), 자장(子張), 증삼(曾參)과 비슷한 나이의 제자(弟子)였습니다.

 

자유(子游)는 그의 자(字)이며,

성명(姓名)은 언언(言偃)으로 성(姓)이 언(言)이고 이름은 언(偃)입니다.

 

자유(子游)는 성격(性格)이 온순(溫順)하고

매사(每事)에 신중(愼重)했으며 배움을 좋아하고

자하(子夏)와 더불어 문학(文學)에 능(能)한 인물(人物)로

스승의 말을 실천(實踐)하는데 추호(秋毫)도 게으름이 없는 사람으로

공자(孔子) 사후(死後)에

공자교단(孔子敎團)을 처음으로 이끌어 간 인물(人物)입니다.

 

부모(父母)의 은혜(恩惠)를 모른다면 사람이 아니요,

은혜(恩惠)를 갚을 줄 몰라도 안 되니

자유(子游)가 효(孝)를 물은 것인데,

공자(孔子)는 효(孝)의 본질(本質)이

부모(父母)에 대(對)한 공경(恭敬)에 있음을 말합니다.

 

음식(飮食)과 집은 개나 말에게도 제공(提供)하는데

공경심(恭敬心)이 없다면 그것과 무엇이 다르냐 하는 것입니다.

 

즉(卽), 효(孝)의 본질(本質)은

복종(服從)이나 의무감(義務感)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경(敬)에 있다는 사실(事實)입니다.

 

양체지효(養體之孝) 또는 양구지효(養口之孝)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님(父母-)에게 먹을 것이나 드리며 모시는 효도(孝道)를 말하지요.

반면(反面)에 양지지효(養志之孝)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항상(恒常) 부모(父母)의 뜻을 받들어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효행(孝行)을 말하는 것이니,

부모님(父母-)의 마음을 헤아려 걱정하시지 않게 애쓰고,

부모님(父母-)의 뜻을 잘 헤아려

공경(恭敬)하는 마음으로 모시는 효도(孝道)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부모(父母)에게 물질적(物質的)인 부양(扶養)을 잘 한다는 것은

지극(至極)히 당연(當然)한 것으로 최소한(最小限)의 효(孝)일 뿐,

그것으로 효(孝)를 다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으며,

공경(恭敬)하는 마음이 없다면

부모(父母)를 봉양(奉養)함이 짐승을 먹여 기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효도(孝道)는 물질적(物質的)인 것도 필요(必要)하지만,

가장 중요(重要)한 것은 공경(恭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의 효(孝)라는 것은”이라는 뜻의

『금지효자(今之孝者)』라는 표현(表現)에서

공자(孔子)가 활동(活動)했던 2,500 여년(餘年) 전(前)이나

오늘을 살고 있는 지금(只今)이나

대부분(大部分) 사람들의 행동(行動) 양식(樣式)이

잘 못 되어 있음을 지적(指摘)한 대목에서

정곡(正鵠)을 찌르는 공자(孔子)의 혜안(慧眼)이 놀랍기만 합니다.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다시 한번 효(孝)에 대(對)하여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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