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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學♡書堂

천하제일행서-난정서

by 권석낙 2020. 3. 19.


역대 서예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왕희지의 난정서><천하제일행서>로 꼽습니다.

 

그러나 이 난정서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 진품 원본이 당 태종의 임종 때 무덤에 부장품으로 들어가버린 까닭에 임모본 밖에 전하는 것이 없는 실정입니다.

임모본 또한 역대 내노라 하는 서예가들 치고 임모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 숫자가 많아 과연 어느 것이 원본에 가까운 것인지 초학자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제가 구입한 임모본의 탁본만 해도 구양순의 임모본,저수량의 임모본, 유공권의 임모본이 있는데, 그 밖에도 우세남의 임모본도 유명합니다.

당 태종은 생전에 난정서 원본을 입수하고서 이를 제갈 정, 한도정,조모,풍승소에게 명하여 임모토록 하였습니다.

이 네 사람이 임모한 것 중 가장 원본에 가까운 <풍승소의 임모본><신룡본>이라 하여 조정에서 공로가 많은 대신들에게 하사하였는데, 이 신룡본을 근거로 구양순,우세남,저수량 등의 임모본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탁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때 부터, 어떻게 하면 이 신룡본 탁본을 구할 수 있을까, 이 신룡본 탁본을 구할 수만 있다면 원이 없겠는데, 하면서 기도 했었는데 뜻있는 곳에 길 있다고 한 말씀이 헛되지 아니하여 <당 풍승소가 모사한 난정서 탁본>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까요?

 

<당 풍승소 모 난정첩 탁본>

 

 

 

이 탁본의 크기는 가로  220cm, 세로   66cm 입니다.

첫머리에 <당 풍승소 모 난정첩 진당심인>이라고 되어 있어 이 탁본의 진가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晉唐心印진당심인>에서 <心印심인>이란 불가에서 수제자에게 법통을 전해 줄 때 사용하는 용어로, 위조가 불가능하게 마음으로 도장을 찍어 법통을 승계시킨다는 의미심장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탁본은 왕희지의 진나라에서 당나라로 정식 법통이 전해진 것을 공언하는 의미이며,결코 아무나 함부로 사용할 수 있는 용어가 아닙니다.

탁본에 찍힌 열람자 또는 수장자들의 인장만 보더라도 <태상황제지보>인을 비롯하여 다른 임모본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권위와 무게가 실려있는 인장들로 가득 차 이 탁본의 가치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탁본의 첫머리와 끝머리>

 

 

 

 

비교를 위하여 제가 소장하고 있는 난정서의 또 다른 탁본들을 올립니다.

 

앞으로 기회가 허락한다면 어렵게 구입한 이 탁본의 복사본을 난정서의 가치를 존중하는 관심있는 분들과 공유할 계획입니다.<문의 ; 무릉도원 / 도원장 / 010-8950-4569,이메일/mrdn@hanmail.net>

 

<구양순의 난정서>

 

 

 

<유공권의 난정서>

 

 

 

<저수량의 난정서>

 

 

 

<난정서 해석문>

 

난정서 문장의 해석에 관해서는 지금 사용되고 있지 않는 고어와 고문장이 섞여 있어 정확한 해석은 어려우나 대략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영화 9년(동진 목제 AD353년) 계축년 3월 초 회계 산음현의 난정에 모여 수계행사를 열었다.

많은 선비들이 모두 이르고 어른과 젊은이들이 모두 모였다.

이 곳은 높은 산과 험준한 고개가 있고 깊은 숲과 울창한 대나무, 또 맑은 물과 소용돌이치는 여울이 있어 좌우로 띠를 이루어 빛났다.

흐르는 물을 끌어들여 잔을 띄우는 물굽이를 만들고 순서대로 자리를 잡으니 비록 성대한 풍악은 없어도 술 한 잔에 시 한 수씩 읊으며 도한 그윽한 정회를 펼칠 만하였다. 

이 날은 하늘 기운이 맑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데, 머리를 들어 세상의 넓음을 우러르고 고개를 숙여 만물의 흥성함을 살피니, 경치를 둘러보고 정회를 펼침은 보고 듣는 즐거움을 다하기에 충분하니 참으로 즐길 만하였다.

무릇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서 한 평생을 살아가되, 어떤 사람은 마음 속에서 취하여 한 방에서 마주보고 얘기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마음의 의탁한 바를 따라 육신의 밖을 방랑하기도 한다.

비록 나아감과 머무름이 만가지로 다르고, 고요함과 시끄러움도 같지 않건만 자신의 처지를 만족하며 잠시나마 득의하면 기쁘고 흡족하여 늙음이 장차 이르는 것도 모르는 법이다.

흥에 겨우면 다시 권태롭고, 감정이 일에 따라 다시 변하게 되면 감개가 뒤따르게 된다.

예전의 기쁨도 잠깐 사이에 곧 시들해 지니 더욱 감회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사람 목숨의 길고 짧음이 자연의 조화를 따르게 되니 결국에는 죽어야 할 뿐임에랴.

옛 사람이 이르기를 삶과 죽음은 역시 중대한 일이다라고 했으니 어찌 비통하지 않은가.

매번 옛 사람들이 감흥을 일으켰던 까닭을 살펴보면 마치 문서가 부합하듯 하니 그들의 문장을 대하여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마음에 깨달을 수가 없었다.

진실로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말이 헛된 것이며 장수와 요절이 같다는 말이 망녕된 것임을 알겠다.

후세 사람들이 오늘의 우리를 보는 것이 또한 오늘의 우리가 옛 사람을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니 , 슬프도다. 그러므로 오늘 모임을 가졌던 사람들을 차례로 쓰고 그들이 지은 시를 적었으니 비록 세대가 다르고 일이 달라도 정회가 일으나는 까닭은 마찬가지이다.

훗날 이 글을 보는 사람은 또한 장차 이 글에서 감회가 있으리라.     

 

<인물 탐구 ; 왕희지>

(병) Wang Xizhi (웨) Wang Hsichih. 307~ 365.

서성(書聖)으로 일컬어지는 중국 최고의 서예가.

자는 일소(逸少). 낭야(瑯邪) 린이[臨沂 : 지금의 산둥 성(山東省) 린이 현(臨沂縣)] 사람이다. 아버지 왕광(王曠)은 동진(東晉) 건국에 공을 세운 왕도(王導)의 사촌동생이다.

왕희지는 비서랑(秘書郞 : 궁중의 전적을 관장하던 관직)을 시작으로 회계왕우(會稽王友)·임천대수(臨川大守)·강주자사(江州刺史)·호군장군(護軍將軍) 등을 역임했다. 명문 출신이었으나 중앙정부의 관직을 구하지 않아, 351년(永和 7)에는 우군장군(右軍將軍)·회계내사(會稽內史)에 임명되어 회계군(會稽郡) 산음현(山陰縣)으로 부임했다. 이 관직 이름에 의해 왕우군(王右軍)으로도 불린다. 그는 한대에 싹이 튼 해(楷)·행(行)·초(草)의 실용서체를 예술적인 서체로까지 승화시켰다. 수대(隋代)를 거쳐 당대(唐代)에 이르러서는 서예에 뛰어났던 황제 태종이 왕희지를 존중하여 그의 글씨를 널리 수집했기 때문에 왕희지의 서법이 크게 성행했다. 왕희지의 몇몇 필체와 서명은 그의 생존 당시에조차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하며, 시대가 지나면서 중국에서 가장 기본적이고도 품격높은 예술인 서예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오늘날 그의 진적(眞跡)은 전해지지 않으나 〈난정서 蘭亭序〉·〈십칠첩 十七帖〉·〈집왕성교서 集王聖敎序〉 등의 탁본이 전하며, 이중 가장 이름 높은 서첩은 〈난정서〉로, 여기에는 353년 계제사(禊祭祀 : 3월 삼짇날, 물가에 가서 흐르는 물에 몸을 깨끗이 씻고 신에게 복을 기원하는 제사)가 열리는 기간에 42명의 문사(文士)들이 모여 시를 짓고 술을 즐겼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행서로 씌어진 왕희지의 비문(碑文)은 독특한 서체인 행서의 본보기가 되었다. 위의 〈난정서〉는 후대 특히 고전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명대(1368~1644)에 그림의 주제로 많이 채택되었다. 그의 후손 가운데 가장 이름을 떨친 서예가는 그의 막내아들인 왕헌지(王獻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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