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 <주문공>으로 추앙되는 주희는 훗날 공자, 맹자, 주자로 성리학의 시조가 되어 유학을 숭상하는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고 그는 딱딱한 선비이거나 고루한 유학자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송나라의 대표적인 서예가의 한 사람이기도 했고, 뛰어난 시인이기도 했습니다.
주자가 직접 시를 짓고 글씨를 써서 40여년 간 거처한 오부리의 자양루에 걸려 있던 <사계시>를 올립니다.
<주자의 四季詩>
曉起坐書齋<효기좌서재> 새벽에 일어나 서재에 앉으니
落花推滿俓<낙화추만경> 떨어진 꽃 무더기 오솔길에 가득하다.
只此是文章<지차시문장> 다만 이것이 문장이니
揮毫有餘興<휘호유여흥> 붓을 휘두름에 흥취 남아 도노라.
古木被高陰<고목피고음> 고목이 높이 솟아 그늘에 덮여 있으니
晝坐不知暑<주좌부지서> 한낮에 앉아 있어도 더위를 모르겠네.
會得古人心<회득고인심> 이에 옛사람의 마음 알겠으니
開襟靜無語<개금정무어> 옷깃을 열고 말없이 고요히 있노라.
悉率鳴床頭<실솔명상두> 귀뚜라미 침상머리에서 우니
夜眠不成廂<야면불성상> 깊은 밤 잠을 이루지 못하노라.
起閱案前書<기열안전서> 일어나 책상 앞에서 책을 펼치니
西風拂庭桂<서풍불정계> 서풍이 뜨락의 계수나무를 스치누나.
瑞雪飛瓊瑤<서설비경요> 서설이 옥구슬처럼 나르는데
梅花靜相倚<매화정상의> 매화 고요히 서로 의지하였도다.
獨占三春魁<독점삼춘괴> 홀로 봄 세 달의 우두머리 되어
深涵太極理<심함태극리> 태극의 이치를 깊이 머금었구나.
<회 옹/ 晦 翁>
<라석 현민식>선생께서 서예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하시면서 탁마를 게을리 말라고 주자가 지은 <송 주문공 학고재명>을 보내 주셨습니다.
<송 주문공 학고재명>
옛 사람들은 스스로 타고난 바 밝은 덕을 밝히려는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오늘날의 사람들은 다르다. 남에게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학문에 매진한다.
스스로를 위하는 <爲己之學위기지학>은 먼저 그 몸을 정성되게 하여, 군신 간의 의리와 부자 간의 어진 덕을 소흘히 하지 않고 부지런히 밝혀 그 혜택이 만물에 까지 이르도록 한다.
반면, 남을 의식한 <爲人之學위인지학>은 겉으로 보기에 봄꽃처럼 화려하여, 암송하는 수려한 문장과 박식한 수는 힘이 되고 편찬한 여러 권의 책은 자랑거리가 되며,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와 황금빛 옷 등은 세인의 눈을 부시게 하는 충분한 광영이 된다.그러나 이것은 세속인의 눈에는 부귀영화이지만 진정한 군자의 눈에는 부끄러움이 된다.
그런데 자신을 위한 爲己之學과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爲人之學은 그 첫 단서를 구분하기가 매우 어려워서 면밀히 살피지 않으면 결국에는 오랑캐처럼 그 간격이 천양지차로 벌어지고 만다.
훌륭하다. 주씨 가문이여! 선인의 뜻을 지극히 받들어 이 <學古齋학고재> 재실을 지어 날로 새롭게 후손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는구나. 이 재실에는 문장도 있고 도도 있으니 여기에 따라 그 후손들이 일상생활에서 예의범절을 다하고, 밤에는 존양성찰하고 낮에는 돈독히 실행하니 어찌 의논하고 헤아림에 어려움이 있겠는가.
이같이 성인의 학문은 처음에는 어려우나 뒤에 몸에 젖으면 흡족한 상태가 되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유유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에 명을 지어 처음의 마음가짐을 경계하노라.
<인물 탐구 ; 주희>
주희 <周熹>
(병) Zhu xi (웨) Chu Hsi. 1130. 10. 18 중국 푸젠 성[福建省] 우계(尤溪)~ 1200. 4. 23 중국.
중국 남송(南宋) 때의 유학자.
주자학을 집대성하여 중국 사상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자는 원회(元晦)·중회(仲晦), 호는 회암(晦庵)·회옹(晦翁)·운곡노인(雲谷老人)·둔옹(遯翁). 존칭하여 주자(朱子)라고 한다.
주희는 지방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로부터 유교 교육을 받았다. 18세 때 대과(大科)에 급제했는데, 당시 그 시험에 급제한 사람들의 평균 연령은 35세였다. 그가 맡은 첫번째 관직(1151~58)은 푸젠 성 동안(同安)의 주부(主簿)였다. 이곳에서 조세·감찰 업무를 개혁하고 지방에 있는 서원의 서고(書庫)와 학칙을 개선했다. 또한 그때까지 없었던 엄격한 의례와 관혼상제의 규율을 제정하는 등 여러 개혁에 착수했다. 동안으로 부임하기 전에 이동(李侗)을 찾아갔는데, 그는 송 유학의 전통을 지킨 사상가로서 주희의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 1158년 주희는 그를 다시 방문했고, 1160년에는 수개월 동안 그와 함께 지내면서 가르침을 받았다. 11세기에 성리학자들은 불교와 도교의 철학에 대항하여 새로운 형이상학을 제창하면서 거의 1,000년간에 걸쳐 실추되었던 유학의 학문적·사상적인 우위성을 회복하게 되었는데, 이동은 그 가운데 가장 유능한 후계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영향을 받아 주희는 유교에 전념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동안에서 주부를 역임한 뒤 주희는 1179년까지 다른 관직을 맡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에게 보낸 상소문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꾸준히 발표했다. 공적인 일에 관여하기는 했지만 조정의 공직을 맡는 일은 계속 거부했다. 그 이유는 당시의 권력자와 그들의 정책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파당정치에 대해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정의 한직을 계속 맡음으로써 교사와 학자로서의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그가 이 시기에 보낸 공식 서한과 당시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던 친구·학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기에 그의 사상과 학문은 점점 깊어졌다. 예를 들면 1175년에 그는 철학자인 육구연(陸九淵)과 유명한 철학논쟁을 벌였으나 서로 상대방을 설복시킬 수는 없었다. 육구연은 내재성(內在性)의 절대가치를 강조한 반면, 주희는 책을 통해 배우는 것과 함께 연구·조사의 가치를 강조했다. 이같은 견해를 충실히 이행하여 그는 많은 저작을 남겼다.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주돈이(周敦頤 : 1017~73), 장재(張載:1020~77) 등의 논문들을 편찬하면서 이 철학자들에 대한 존경을 표시했고 이들의 철학을 집대성하여 자신의 철학을 완성시켰다. 그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 4명의 사상가들은 맹자가 죽은 후에 없어진 '도'(道)의 전통을 회복시켰다고 한다. 1175년 그와 친구 여조겸(呂祖謙:1137~81)은 이 4명의 사상가들의 저작에서 뽑은 문장들을 집대성한 〈근사록 近思錄〉을 편찬했다. 이 시기에 주희는 〈논어〉와 〈맹자〉에 관한 집주(集注)를 저술하면서 자신의 철학적 사상을 나타냈는데, 이 집주는 모두 1177년에 완성되었고 그후 중국·한국·일본 등의 지식인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주희는 역사에도 깊은 흥미를 보여 사마광(司馬光)의 역사서인 〈자치통감 資治通鑑〉의 축약과 재편집을 지휘했다(→ 색인 : 역사편찬). 그 노력의 결과로 1172년 〈자치통감강목 資治通鑑綱目〉이 완성되어 동아시아 전역에서 널리 읽혔을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최초로 간행된 중국역사서로서 J.-A.-M. 무아리아크 드 마야가 쓴 〈중국통사 Histoire générale de la Chine〉(1777~85)의 토대가 되었다. 이 책은 나중에 정부에서 실행하는 도덕적 원칙의 귀감이 되었다. 1179~81년 장시 성[江西省] 난캉[南康]의 지사(知事)로 근무하면서 주희는 그 기회를 이용, 9세기에 건립되어 10세기에 번성했다가 그뒤 폐허가 된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재건했다. 주희에 의해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게 된 이 서원은 그후 8세기에 걸쳐 그 명성을 유지했다. 서원들은 성리학이 발전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제도적 기반이 되었다. 1188년 주희는 황제의 인품이 국가 안녕의 기반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한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도덕적인 정부를 강조한 책인 〈대학 大學〉에서는 황제가 자신의 마음을 수양하면 뒤이어 전세계가 도덕적으로 변모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1189년 이 책에 대하여 중요한 주석을 달았고 평생 동안 이 주석작업을 계속했다. 마찬가지로 1189년에는 〈중용 中庸〉에 대한 주석서도 써냈다. 〈대학〉·〈중용〉이 〈논어〉·〈맹자〉와 함께 유교 교과과정의 기본서인 4서(四書)에 편입된 것은 대체로 주자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주희는 만년에 조정의 부름을 받아 고위직으로 승진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과감한 직언, 소신 있는 의견, 부패와 사리사욕이 판치는 정치에 대한 비타협적인 공격 등으로 인해 파면되거나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방 관직으로 쫓겨났다. 만년에 이르러서도 정적(政敵)인 한탁주(韓胄侂)가 그의 학설과 행동에 대해 중상모략을 하여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그가 죽을 때까지도 정치적인 명예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으나 그가 죽은 뒤에 곧 회복되었다. 1209, 1230년에는 그에게 시호가 내려졌고 1241년에는 그의 위패가 정식으로 공자사당에 모셔졌다. 후대에는 주희가 비판했던 것보다 더 전제주의적인 통치자들도 조정에 대한 주희의 정치적 비판과 이성적인 자세에는 귀기울이지 않으면서도 그의 철학체계 만큼은 유일한 관학(官學)으로 삼았는데, 이같은 풍조는 19세기말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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