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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筆♡揮之

歐陽修의 學書精神

by 권석낙 2019. 10. 22.


 [歐陽修의 詩碑(시비)]

중국, 宋(송)대의 歐陽修는 다방면에 걸쳐 위대한 업적을 쌓았다. 

그 가운데 가장 성공한 분야는 누가 뭐라 해도 "文學(문학)"이다. 그러면서 "書藝家(서예가)"이기도 하다. 

 歐陽修는 자신의 書藝에 자신의 文學觀(문학관)들을 그대로 적용시킨 인물이다.



歐陽修는 글을 짓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은 聖賢(성현)의 [道(도)]를 宣揚(선양)시키는 것이었는데, 이는 비록 聖人(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는 없지만, "道가 뛰어나면 文章(문장)은 별 어려움 없이 저절로 이루어진다."[道勝文至(도승문지)]의 본질인 것이다. 

歐陽修에게 있어 "道"란, 학문적 기둥이자 문학 창작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여기서는 歐陽修의 "文學"은 다루지 않고 스의 "書藝"만을 다루어 보기로 한다.

歐陽修는 書藝에 있어서도 인품과 筆意(필의)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다.

"論書及人(논서급인)"이라 했던가? 사람의 거취에 따라 그러한 것이 글씨로 나타나기 때문에 글씨를 評(평)하는 사람은 항상 그 인물도 함께 評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나중에 글씨의 좋고 나쁨에는 염두에 두지 않고, 오로지 글씨를 쓴 사람의 인품과 자질에 따라 優劣(우열)이 갈라졌던 것이다. 

例(예)를 들어 매국노인 李完用(이완용) 글씨는 白凡(백범) 金九(김구) 선생보다 훨씬 잘 쓴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가치로 따지자면 더 말할 나위 없이 金九 선생의 글씨를 더 귀하게 여긴다. 

사람들은 李完用의 글씨는 땅바닥에 깔아 놓고 밟고 다니지만, 金九 선생의 글씨는 높다란 벽에 걸어 두고 존경의 마음을 품는다. 

또 하나 例를 더 든다면, 趙松雪(조송설 : 맹부) 글씨이다. 

그의 글씨를 누구나 名筆(명필)로 여기지만, 그의 글씨를 배우려는 자들이 그의 書帖(서첩)을 바닥에 놓고 공부를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趙松雪이 元(원)나라로 옮겨 간 변절자였기 때문이다. 

 

 歐陽修는 이렇게 말한다.

"學書不必憊精神於筆硯, 多閱古人遺蹟, 求其用意, 所得宜多."

글씨를 배움에 있어 반드시 정신까지 피곤해질 정도로 글씨만 줄창 쓸 게 아니라, 古人들이 남겨 놓은 먹[墨]의 자취들을 충분히 보고 그 筆意를 추구하면 얻게 되는 바가 실로 많다.

歐陽修는 古人들이 남긴 글씨를 많이 보고 筆意를 구하는 게 좋다고 하였다. 

이것은  歐陽修가 직접 겪은 체험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歐陽修는,

"他人(타인)의 것을 그대로 모방하는, 곧 "形似(형사)"[奴書(노서 : 글씨 노예)]라 여겨 강하게 거부하였다. 즉, "形似" 아닌 "神似(신사)"를 중히 여겼던 것이다.

껍데기만 비스무리하게 흉내 내려 들지 말고 글씨에 담긴 精神을 닮으라는 것이다.

歐陽修는 또 말한다.

"蓋方其幼也, 未有所爲時, 專其力於學書, 及其漸長, 則其所學漸近於用, 今人不然, 多學書於晩年, 所以與古不同也." 

무릇 어렸을 때에는 아직 하는 바가 없을 때이므로 온 힘을 다 하여 글씨를 배울 수 있다. 그러다가 점차 자라남에 따라 그 배운 것도 쓰이게 된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이와 달리 대부분 늘그막에 글씨를 배우게 되니, 古人들의 글씨와는 달리 엉만진창으로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말 이 말은 탄복할 노릇이다. 

歐陽修가 살았던 때에도 그러했던가?

어쩌면 요즘 세태를 직접 겪고 보고 느낀 바를 써 놓은 듯하다.

무슨 技藝(기예)이든 철 들기 전에 익히라는 것이다. 철 들고 나이 먹게 되면 자연스레 경험도 생겨 나름대로 판단 기준을 지니게 되는 것을 경계삼은 것이다.

歐陽修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다.

 

다음에는 歐陽修가 즐겨 사용했던 "붓[毛筆(모필)]"에 대해 論(논)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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