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 筆 書
江 碧 鳥 逾 白 山 靑 花 欲 然 今 春 看 又 過 何 日 是 歸 年
푸른 江 물결 위로 하얀 새 깃을 편다
靑山은 저 靑山은 붉은 꽃 불을 붙여, 나그네 눈물 지며 또 돌아온 봄 맞나니
도대체 어느 날에사 내 故鄕에 돌아가노
※ 계간 문학지에 "同橘異趣(동귤이취)"라는 난에 芝山房의 譯詩(역시)를 기고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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草藁(초고)에서 今草(금초)까지
"고초서[章草(장초)]"는 위, 진 시대에 이르러[※ 이 시기에 이미 行草(행초)가 나타났다] 점차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이는 다른 게 아니라, 고초서가 예서의 형태를 벗어나 글씨를 쓰기에 편리하도록 변하면서 서예가의 손에 의해 점차 규범화하는 형식을 띠게 된 점이다. 이것은 뒤의 금초로 변하는 과도기적 과정으로, 이 때 초고의 글씨가 출현하여 유행하였는데, 그 시기는 너무나 짧았다. 장회관은 『서단』에서 왕음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기술해 놓았다. "초고의 글씨 형태는 초서와도 비슷하면서도 초서가 아니고, 초서와 행서의 중간 형태이다." 라 하였다. 이 말은 매우 합리적인 것이지만, 장회관은 이 말에 공감하지 않는다. 장회관은 『서단』에서, "초서란 후한 시대 선비로 부름을 받았던 장지가 이룩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거듭 말하기를, "왕희지 이전에 금초에 능숙한 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나, 구양순과 같은 여러 사람들의 說(설)은 하나같이 허무맹랑한 것이다." 라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그렇지만 장지는 최원과 두도의 필법을 매워 온고지신하는 격으로 이를 변화시켜 금초를 이루어 방향을 전환하는 데 그 妙(묘)를 다하였다. 글씨의 형태는 한 필치로 이루었으며, 우연히 연결되지 않은 곳이 있더라도 혈맥이 끊기지 않았으며, 그 연결된 곳에서는 기운이 관통하면서 행간을 이룬다. 오로지 왕헌지만이 그 깊은 뜻을 발명하였기 때문에 행간의 머릿글자를 쓸 때 종종 앞 행간의 끝을 이어서 하였으니 세상에서는 이를 "一筆書(일필서)"라고 하며 그것이 장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에서이다." 라 하였다. 이와 같이 끊이지 않고 쓰는 漢(한)나라의 초서 필법을 어찌 구양순과 이전에 대해 논하던 사람들이 몰라서 언급하지 않고 오직 장회관만이 특별히 그 비법을 알았더란 말인가!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이와 똑같은 식견을 가졌다면 그것은 단지 宋(송)나라 王著(왕착)일 것이다. 시험삼아 [순화각첩] 권2의 이른바 <張芝書(장지서)>와 <冠軍(관군)> 등의 5개 법첩을 보면 장회관의 이러한 설과 똑 맞아떨어짐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장회관이 말한 "한 필치로 쓴 글씨[一筆書]"라는 초서는 사실상 이미 후세 사람인 장욱과 회소 이래의 "狂草(광초)"와 가까운 말이다. 그렇지만 장욱과 회소는 정말 미친 글씨가 아니다.
[芝山房의 권함] 蓋方其幼也。 未有所爲時, 專其力於學書, 及其漸長, 則其所學漸近於用。 今人不然, 多學書於晩年, 所以與古不同也。 무릇 어렸을 때에는 아직 아무 하는 바가 없을 때이므로 온 힘을 다하여 글씨를 배울 수가 있다. 그러다가 점차 자라남에 따라 그 배운 것도 쓰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이와 같지 않고 대부분 만년에 글씨를 배우니 옛사람의 글씨와 같지 않은 까닭이 바로 이러한 데 있는 것이다. |
一筆♡揮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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