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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學♡書堂

구성궁예천명

by 권석낙 2019. 9. 15.

 

처음 서예를 하는 사람들이 어쩌면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법첩이 당나라 구양순이 쓴 <구성궁 예천명>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의 경우도 의미도 모르면서 글자 한 자 한 자의 임서를 했었습니다.

추사 김정희선생께서도 행초로 바로 입문하기보다는 구양순의 해서를 밟아 행초로 들어가는 길이 올바른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돌이켜 보니, 의미도 모르면서 무작정 임서만 하기 보다는 적어도 서예를 시작하면서 그 글의 문장이나 전체적인 의미를 알고서 서예공부에 들어간다면 효율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성궁 예천명>의 탁본을 구해 놓고 보니 글의 내용이 오히려 서예의 명성에 가려 빛이 바랜 것 아닌가 하는 의아심이 들었습니다.

 

우선 <구성궁 예천명> 이라는 제목에서 부터 이 글이 <안탑성교서>와 마찬가지로 당 태종의 명에 의해서 당시의 명신이었던 <위징>이 글을 지으면서 붙인 이름임을 알수 있습니다.

위징은 당 태종을 도와 <정관의 치세>를 이룬 명 재상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구성궁>이란 궁궐의 이름이며, <예천명>이란, 예천이라고 이름 붙인 샘물(구성궁이란 궁궐에 솟아난 우물)에 대한 유래와 그 내력을 밝힌 글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九成宮醴泉銘

구성궁예천명

秘 書 監 撿 挍 侍 中 鉅 鹿 郡 公 臣 魏 徵은 奉 勅 撰하노라

비 서 감 검 교 시 중 거 록 군 공 신 위 징 봉 칙 찬

維 貞 觀 六 年 孟 夏 之 月 皇 帝 避 暑 乎 九 成 之 宮하니

유 정 관 육 년 맹 하 지 월 황 제 피 서 호 구 성 지 궁

此 則 隨 之 仁 壽 宮 也라 冠 山 抗 殿하고絶 壑 爲 池하며跨 水

차 즉 수 지 인 수 궁 야 관 산 항 전 절 학 위 지 과수

架 楹하고分 巖 竦 闕하며高 閣 周 建하고長 廊 四 起하며棟 宇 膠 葛하니

가 영. 분 암 송 궐 고 각 주 건 장 랑 사 기 동 우 교 갈

臺 榭 參 差하도다仰 視 則 百 尋이오下 臨 則 崢 嶸 千 仞이니

대 사 참 차 앙 시 즉 초 체 백 심 하 림 즉 쟁 영 천 인

珠 壁 交 暎하고金 碧 相 暉하며照 灼 雲 霞하니蔽 虧 日 月하도다觀 其

주 벽 교 영 금 벽 상 휘 조 작 운 하 폐 휴 일 월 관 기

移 山 廻 澗하고窮 泰 極 侈하며以 人 從 欲케하며良 足 深 尤하나至 於에

이 산 회 간 궁 태 극 치 이 인 종 욕 량 족 심 우 지 어

炎 景 流 金하야도無 鬱 蒸 之 氣하니微 風 徐 動하여有 凄 淸 之 涼함에(이르러:至)

염 경 류 금 무 울 증 지 기 미 풍 서 동 유 처 청 지 량

信 安 體 之 佳 所이니誠 養 神 之 勝 地로다漢 之 甘 泉도 不 能尙 也라

신 안 체 지 가 소 성 양 신 지 승 지 한 지 감 천 불 능상 야

皇 帝 爰 在 弱 冠으로經 營 四 方하고逮 乎 立 年하야撫 臨 億 兆하니

황 제 원 재 약 관 경 영 사 방 체 호 입 년 무 림 억 조

始 以 武 功 壹 海 內하고終 以 文 德 懷 遠 人하야東 越 靑 丘하고

시 이 무 공 일 해 내 종 이 문 덕 회 원 인 동 월 청 구

南 踰 丹 儌하며皆 獻 琛 奉 贄하야重 譯 來 王하도다西 曁 輪 臺하고北

남 유 단 교 개 헌 침 봉 지 중 역 래 왕 서 기 륜 대 북

拒 玄 闕하여並 地 列 州 縣하며人 充 編 戶하고氣 淑 年 和하여邇 安

거 현 걸 병 지 렬 주 현 인 충 편 호 기 숙 년 화 이 안

遠 肅하며群 生 咸 遂하고靈 貺 畢 臻은 雖 藉 二 儀 之 功이라도終 資

원 숙 군 생 함 수 령 황 필 진 수 자 이 의 지 공 종 자

一 人 之 慮하도다遺 身 利 物하며櫛 風 沐 雨함으로百 姓 爲 心하여憂 勞

일 인 지 려 유 신 리 물 즐 풍 목 우 백 성 위 심 우 로

成 疾함이同 堯 肌 之 如 腊하고甚 禹 足 之 腁 胝하니針 石 屢 加하나

성 질 동 요 기 지 여 석 심 우 족 지 변 지 침 석 루 가

腠 理 猶 滯하도다

주 리 유 체

爰 居 京 室하여每 弊 炎 署하도다群 下 請 建 離 宮하여庶 可 怡 神

원 거 경 실 매 폐 염 서 군 하 청 건 리 궁 서 가 이 신

養 性케하였노라聖 上 愛 一 夫 之 力하고惜 十 家 之 産하니深 閉 固 拒하여

양 성 성 상 애 일 부 지 력 석 십 가 지 산 심 폐 고 거

未 肯 俯 從하시니라以 爲 隨 氏 舊 宮은 營 於 曩 代하여棄 之 則 可

미 긍 부 종 이 위 수 씨 구 궁 영 어 낭 대 기 지 즉 가

惜하고毁 之 則 重 勞함이니事 貴因 循으로何 必 改 作하시다於 是 斵 彫하여

석 훼 지 즉 중 로 사 기 인 순 하 필 개 작 어 시 착 조

爲 樸으로損 之 又 損하고去 其 泰 甚하고葺 其 頹 壞 雜 丹 墀 以

위박 손 지 우 손 거 기 태 심 즙 기 퇴 괴 잡 단 지 이

沙 礫하고間 粉 壁 以 塗 泥하며玉 砌 接 於 土 階하고茅 茨 續 於

사 력 간 분 벽 이 도 니 옥 체 접 어 토 계 모 자 속 어

瓊 室하였도다仰 觀 壯 麗하고可 作 鑒 於 旣 往하며俯 察 卑 儉하다足 垂

경 실 앙 관 장 려 가 작 감 어 기 왕 부 찰 비 검 족 수

訓 於 後 昆하다此 所 謂 至 人 無 爲하고大 聖 不 作하니彼 竭 其

훈 어 후 곤 차 소 위 지 인 무 위 대 성 부 작 피 갈 기

力하고我 亭 其 功 者 也니라

력 아 정 기 공 자 야

然이나 昔 之 池 沼는 咸 引 谷 澗하니宮 城 之 內는 本 乏 水 源하여求

연 석 지 지 소 함 인 곡 간 궁 성 지 내 본 핍 수 원 구

而 無 之함은在 乎 一 物하나旣 非 人 力 所 致로 聖 心 懷 之 不

이 무 지 재 호 일 물 기 비 인 력 소 치 성 심 회 지 불

忘하였도다粤 以 四 月 甲 申 朔 旬 有 六 日 己 亥로써上 及 中 宮과

망 월 이 사 월 갑 신 삭 순 유 육 일 기 해 상 급 중 궁

歷 覽 臺 觀하고閑 步 西 城 之 陰하여躊 躇 高 閣 之 下하고俯 察

력 람 대 관 한 보 서 성 지 음 주 저 고 각 지 하 부 찰

厥 土하니微 覺 有 潤하도다因 而 以 杖 導 之하니有 泉 隨 而 涌 出하도다

궐 토 미 각 유 윤 인 이 이 장 도 지 유 천 수 이 용 출

乃 承 以 石 檻하고引 爲 一 渠하니라其 淸 若 鏡하고味 甘 如 醴하도다南

내 승 이 석 함 인 위 일 거 기 청 약 경 미 감 여 례 남

注 丹 霄 之 右하고東 流 度 於 雙 闕하며貫 穿 靑 瑣하고縈 帶 紫

주 단 소 지 우 동 류 도 어 쌍 궐 관 천 청 쇄 영 대 자

房하니激 揚 淸 波하여滌 蕩 瑕 穢하도다可 以 導 養 正 性하고可 以 澂

방 격 양 청 파 척 탕 하 예 가 이 도 양 정 성 가 이 징

瑩 心 神하여鑒 暎 群 形하고潤 生 萬 物함이同 湛 恩 之 不 竭하고將

영 심 신 감 영 군 형 윤 생 만 물 동 담 은 지 불 갈 장

玄 澤 之 常 流하니匪 唯 乾 象 之 精하고盖 亦 坤 靈 之 寶이니라

현 택 지 상 류 비 유 건 상 지 정 개 역 곤 령 지 보/

謹 案 禮 緯 云하되王 者 刑 殺 當 罪하고賞 錫 當 功하나니得 禮 之

근 안 례 위 운 왕 자 형 살 당 죄 상 석 당 공 득 례 지

宜하면則 醴 泉 出 於 闕 庭한다하였고鶡 冠 子 曰 聖 人 之 德이上 及

의 즉 예 천 출 어 궐 정 갈 관 자 왈 성 인 지 덕 상 급

太 淸하고下 及 太 寧하며中 及 萬 靈이면則 醴 泉 出한다하였다瑞 應 圖 曰

태 청 하 급 태 녕 중 급 만 령 즉 예 천 출 서 응 도 왈

王 者 純 和하고飮 食 不 貢 獻이면則 醴 泉 出하니飮 之 令 人 壽하다하였고

왕 자 순 화 음 식 불 공 헌 즉 예 천 출 음 지 령 인 수,

東 觀 漢 記 曰 光 武 中 元 元 年에 醴 泉 出 京 師하니 飮 之

동 관 한 기 왈 광 무 중 원 원 년 예 천 출 경 사 음 지

者 痼 疾 皆 愈하다하였다然 則 神 物 之 來함은寔 扶 明 聖함이니旣 可 蠲

자 고 질 개 유 연 즉 신 물 지 래 식 부 명 성 기 가 견

玆 沉 痼이오又 將 延 彼 遐 齡함이로다

자 침 고 우 장 연 피 하 령

是 以 百 辟 卿 士가 相 趨 動 色하도다我 后 固 懷 撝 挹하고推 而

시 이 백 벽 경 사 상 추 동 색 아 후 고 회 휘 읍 추 이

弗 有코 雖 休 勿 休하시기에不 徒 聞 於 往 昔이오以 祥 爲 懼함은實 取

불 유 수 휴 물 휴 불 도 문 어 왕 석 이 상 위 구 실 취

驗 於 當 今하니斯 乃 上 帝 玄 符와 天 子 令 德을 豈 臣 之 末

험 어 당 금 사 내 상 제 현 부 천 자 령 덕 기 신 지 말

學이 所 能 丕 顯하리오 但 職 在 記 言하며屬 者 書 事하니不 可 使 國

학 소 능 비 현 단 직 재 기 언 속 자 서 사 불 가 사 국

之 盛 美하여금有 遺 典 策함이敢 陳 實 錄하여爰 勒 斯 銘하오나 其 詞 曰/

지 성 미 유 유 전 책 감 진 실 록 원 륵 사 명 기 사 왈/

惟 皇 撫 運하고奄 壹 寰 宇하니千 載 膺 期하니萬 物 斯 覩하고功 高

유 황 무 운 엄 일 환 우 천 재 응 기 만 물 사 도 공 고

大 舜하고勤 深 伯 禹하여絶 後 光 前하며登 三 邁 五하니握 機 踏 矩하여

대 순 근 심 백 우 절 후 광 전 등 삼 매 오 악 기 답 구

乃 聖 乃 神하니武 克 禍 亂하고文 懷 遠 人하여書 契 未 紀하고開 闢

내 성 내 신 무 극 화 란 문 회 원 인 서 계 미 기 개 벽

不 臣자가冠 冕 並 襲하고琛 贄 咸 陳하도다大 道 無 名하고上 德 不 德이니

불 신 관 면 병 습 침 지 함 진 대 도 무 명 상 덕 부 덕

玄 功 潛 運하고幾 深 莫 測이라鑿 井 而 飮하고耕 田 而 食하니靡 謝

현 공 잠 운 기 심 막 측 착 정 이 음 경 전 이 식 미 사

天 功하고安 知 帝 力하리오上 天 之 載는無 臭 無 聲하나萬 類 資 始하고

천 공 안 지 제 력 상 천 지 재 무 취 무 성 만 류 자 시

品 物 流 刑하며隨 感 變 質하고應 德 效 靈하니介 焉 如 響하고赫 赫

품 물 류 형 수 감 변 질 응 덕 효 령 개 언 여 향 혁 혁

明 明하도다雜 還 京 福과 葳 蕤 繁 祉는 雲 氏, 龍 官, 龜 圖 ,鳳 紀이며

명 명 잡 환 경 복 위 유 번 지 운 씨, 룡 관 ,귀 도, 봉 기

日 含 五 色하고鳥 呈 三 趾하며頌 不 輟 工하고筆 無 停 史하도다上 善

일 함 오 색 조 정 삼 지 송 불 철 공 필 무 정 사 상 선

降 祥하고上 智 斯 悅하도다流 謙 潤 下하며潺 湲 皎 潔하며蓱 旨 醴 甘하여

강 상 상 지 사 열 류 겸 윤 하 잔 원 교 결 평 지 례 감

冰 凝 鏡 澈하니用 之 日 新하고挹 之 無 竭하여道 隨 時 泰하고慶 與

빙 응 경 철 용 지 일 신 읍 지 무 갈 도 수 시 태 경 여

泉 流하니我 后 夕 愓하도다雖 休 弗 休하고居 崇 茅 宇하여樂 不 般 遊요

천 류 아 후 석 탕 수 휴 불 휴 거 숭 모 우 락 불 반 유

黃 屋 非 貴며 天 下 爲 憂로다人 玩 其 華하나我 取 其 實하니還 淳

황 옥 비 귀 천 하 위 우 인 완 기 화 아 취 기 실 환 순

反 本하고代 文 以 質하고居 高 思 墜하며持 滿 戒 溢하여念 玆 在 玆하면

반 본 대 문 이 질 거 고 사 추 지 만 계 일 념 자 재 자

永 保 貞 吉하리오

영 보 정 길

兼 太 子 率 更 令 勃 海 男 臣 歐 陽 詢 奉 勅 書하노라

겸 태 자 솔 갱 령 발 해 남 신 구 양 순 봉 칙 서

 

<본문해석>

 

貞觀六年.孟夏之月.皇帝避暑乎九成之宮.此則隨之仁壽宮也.

冠山抗殿.絶壑爲池.고水架楹.分巖송闕.

정관 6년 초여름(孟夏之月)에 황제께서 구성궁으로 더위를 피하셨으니 이것은 곧 수나라의 인수궁이다.

산을 뒤로 하여 궁전을 세우니 깎은 듯한 골짜기가 못이 되었다. 물위에 기둥을 놓아 다리를 놓으니 바위를 나누어 대궐이 우뚝 솟아 있다.

 

高閣周建長廊四起.棟宇膠葛.臺사參差.仰視則초체百尋.

下臨則정嶸千인.珠璧交暎.金碧相暉照灼雲霞.蔽虧日月

높은 누각을 두루 세우고 긴 복도를 네군데 세워

용마루와 처마를 얽고 망루를 들쭉 날쭉 세우다.

고개를 들어 먼데 바라보니 모든 곳 살필만 하고

아래를 바라보니 가파른게 천길이라 구슬같은 벽이

서로 비추는구나 고운 색채 서로 빛나 구름과 노을

비추니 해와 달이 보이지 않는구나.

 

觀其移山廻澗.窮泰極侈.以人從欲.良足深尤.至於炎景流金.無鬱蒸之氣.微風徐動.有凄淸之凉.信安體之佳所.誠養神之

그 산을 옮기고 골짜기 물을 돌리는 것을 보면

泰를 다하고 侈가 극에 이르렀으니 사람이 욕심을

따르고자 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족히 깊히 허물할

만 하지만 炎景流金일지라도 우울한 기운이 없고 미풍이 서서히 불어 처청(凄淸)의 서늘함이 있음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안체(安體)의 아름다운 바요 진실로 양신(養神)의 승지이니 더하지는 못하다.

 

勝地.漢之丹泉.不能尙也.皇帝爰在弱冠經營四方.

逮乎立年.撫臨億兆.始以武功壹海內.終以文德懷遠人.

東越靑丘.

황제가 약관에 있어서

사방을 경영하였고 입년(30세)에 미쳐서는 억조창생을

어루만졌다. 처음은 무공으로써 해내를 통일하고 나중

에는 문덕으로써 遠人을 회유하도다. 동으로는 청구를

넘고

 

南踰丹교.皆獻琛奉贄.重譯來王.西기輪臺.北拒玄闕.竝地

列州縣.人充編戶.氣淑年和.邇安遠肅.群生咸遂.靈황畢臻.

남으로는 단교를 넘어 구슬을 드리고 폐백을 받들어 통역을 거듭하여 來王하다. 西로는 輪臺까지 미치고 북은 현궐에 이르기 까지 기운은 맑고(氣淑) 연사는 풍년이어서(年和) 가까운데는 편안하고 먼데는 조용하여 온누리 다 잘살고 신령의 베품이 다 이르렀으니,

 

雖藉二儀之功終資一人之慮. 遺身利物.櫛風沐雨.百姓爲心.

憂勞成疾.同堯肌之如석.甚禹足 之변지.針石屢加.주理猶滯

비록 음양(二儀)의 공을 빌린다 하지만 결국 온 몸은 치지 않고 물을 이롭게하고 바람에 빗질하고 빗물에 목욕하며 백성을 마음으로 하고 근심하여 수고로운 병이 된 것은 요임금의 살결이 고기포와 같고,우임금

발의 굳은살(변지)보다 심하여 침석을 자주 가했어도 주리가 유체하다

 

爰居京室.每弊炎暑.群下請建離宮.庶可怡神養性.聖上愛一夫 之力.

惜十家之産.深閉固拒.未肯俯從.

지금 경실에 있어서는 늘 염서에 시달려 지치니

군하가 청하기를 이궁(離宮)을 세우면 바라건대 신령을 즐겁게하고 성상은일부의

힘을 귀히하고 십가지산(十家之産)을 아껴서 깊게 닫고 굳이 마다하여 즐겨 부종치 않았다.

 

以爲隨氏舊宮.營於?代.棄之則可惜毁之則重

勞.事貴因循.何必改作.於是?彫爲樸.損之又

損.去其泰甚.葺其頹壞.雜丹?以沙礫.間粉壁以

塗泥.玉?接於土階.茅茨續於瓊室.仰觀壯麗.

可作鑒於旣往俯察卑儉.足垂訓於後昆.

말하기를 수씨(隨氏)의 구궁(舊宮)은 예전에 지었으니 이것을 버리면 아까울만 하고 이것을 헐려면 품이 겹친다.일은 인순(因循)을 귀히 하니 어찌 반드시 개작(改作)하겠는가. 이때에 착조(?彫)하기를 검소하게 하고 덜고 또 덜어서 그 태심(泰甚)을 버리고 그 퇴괴(頹壞)를 기워서 단지(丹?)를 사력(沙礫)으로써 섞어하고 분벽(粉壁)은 도니(塗泥)로써 하고,옥체(玉?)는 토계(土階)에 접하였으며, 모자(茅茨)가 경실(瓊室)에 이어졌으니,우러러 장려함을 보면 기왕이 거울이 될만하며,굽혀서 비검(卑儉)함을 살피면 족히 후손에 수훈(垂訓)할 수도 있다.

 

此所謂至人無爲.大聖不作.

彼竭其力我享其功者也.

이것은 이른바 지극한 사람은 하는 바가 없고 대성은 짓지 않은 것이니

그는 힘을 다했고 나는 그 공을 누린 자이니라.

 

♣<인물탐구 ; 당 태종,위징,구양순>

 

당태종(唐太宗)이세민(李世民)과 위징(魏徵)

 

당(唐) 나라 제 2 대왕 태종(太宗 : 서기 626 년 –서기 649 년)의 연호(年號)는 정관(貞觀)이다. 중국 봉건 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 피운 시기 중 하나이기 때문에 사가(史家)들은 정관지치(貞觀之治)라고 당태종의 정치 공적을 찬양하고 있다.

특히 당태종(唐太宗)의 명재상(名宰相) 위징이 정관지치(貞觀之治)를 이루는데 큰 역할을 했다. 당태종(唐太宗) 때 사회가 안정되고 농업 생산량이 증가되어 백성들의 생활이 개선되어 유족한 생활을 하게되었다.

당태종(唐太宗)은 대신(大臣)들의 건의에 의하여 봉선태산(封禪泰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봉선태산(封禪泰山)은 고대로 부터 제왕들이 왕에 등극된 후 태산(泰山)에 올라가 천제(天帝)에게 제사 지내는 큰 예의(禮儀)이었다. 봉선태산(封禪泰山)의 행사 규모가 크기 때문에 경비가 막대하다는 것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정관(貞觀) 5 년(서기 631 년)에 여러 대신들이 태종(太宗)에게 봉선태산을 요구했다. 그러나 태종(太宗)은 거절하였다. 정관(貞觀) 6 년(서기 632 년)에 또 다시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이 당태종(唐太宗)에게 봉선태산(封禪泰山)을 요구하였다.

단지 직간(直諫)하는 신하 간신(諫臣) 위징(魏徵) 만 백성들의 피땀으로 이루어 놓은 국고를 낭비하는 처사임과 동시에 시기상조라고 극구 반대하였다.

그래서 당태종(唐太宗)은 위징에게 ”대가도요구아거봉선태산(大家都要求我去封禪泰山), 지유니인위불행(只有你認爲不行), 시부시인위아공로불구고(是不是認爲我功勞不够高)?” 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들이 나 더러 봉선태산을 실행하라고 요구하고 있는데 너 혼자 만 어째서 나의 봉선태산을 반대하느냐? 나의 공로가 높지 못하여 그러느냐?” 는 뜻이다.

위징답왈(魏徵答曰) ”구고료(够高了).” 다시 말하면 ”폐하의 공로는 지고(至高)합니다.” 는 뜻이다.

태종(太宗) : ”시덕행불후(是德行不厚)?” 다시 말하면 ”그럼 나의 덕행이 모자란단 말인가?” 는 뜻이다.

위징(魏徵) : ”흔후료(很厚了)” 다시 말하면 ”아닙니다. 짐의 덕행도 후합니다.” 는 뜻이다.

태종(太宗) : ”시국가불안정(是國家不安定)?” 다시 말하면 ”그럼 국가가 불안정하다는 말인가?” 는 뜻이다.

위징(魏徵) : ”이경안정료(已經安定了).” 다시 말하면 ”아니오. 국가도 이미 안정상태에 있습니다.” 는 뜻이다.

태종(太宗) : ”시사방만이융적환몰신복(是四方蠻夷戎狄還沒臣服)?” 다시 말하면 ”사방에 있는 주변 국가의 민족들이 굴복해서 신하의 예절로 우리 나라를 섬기지 않느냐?” 는 뜻이다.

위징(魏徵) : ”신복료(臣服了)” 다시 말하면 ”아닙니다. 신복(臣服)합니다.” 는 뜻이다.

태종(太宗) : ”시년성불풍수(是年成不豊收)” 다시 말하면 ”매년 풍작을 이루지 못했느냐?” 는 뜻이다.

위징(魏徵) : “연성흔호(年成很好)” 다시 말하면 ”아닙니다. 매년 풍작을 이루었습니다.” 는 뜻이다.

태종(太宗) : ”나마시부서부도(那麽是符瑞不到)?” 다시 말하면 ”상서로운 징조가 없느냐?” 는 뜻이다.

위징(魏徵) : ”부서야도료(符瑞也到了)” 다시 말하면 ”상서로운 징조가 있습니다.” 는 뜻이다.

태종(太宗) : ”저육개조건도구비료(這六個條件都具備了), 나아위즘마불능봉선태산니(那我爲怎麽不能封禪泰山呢)?”

다시 말하면 ”이상 여섯 개의 구비조건을 모두 충족시켰는데 어째서 나 더러 봉선태산을 아직 실행하지 말라고 권유 하느냐?” 는 뜻이다.

 

위징간절지설(魏徵懇切地說) ”폐하(陛下), 아상급이타개비방(我想給您打個比方). 가여설(假如說), 유개인득료일장대병(有個人得了一場大病), 십년와상불기(十年臥床不起), 현재경과정심치료복원료(現在經過精心治療復原了), 축점회복정상(逐漸恢復正常). 취재저개시후(就在這個時候), 양저인배상일석미(讓這人背上一石米), 일천주상일백리지(一天走上一百里地), 나타수둑료마(那他受得了吗)? 수말동란부지십년(隋末動亂不止十年), 국가초보안정(國家初步安定), 상란환몰유득도완전치리(喪亂還沒有得到完全治理), 국가백성불능설완전부유료(國家百姓不能說完全富裕了). 저시봉선태산(這時封禪泰山), 향상창선유아문대당적사업이경고성(向上蒼宣喩我們大唐的事業已經告成), 신인위공파부도시후파(臣認爲恐怕不到時候吧)?”

 

다시 말하면 ”위징(魏徵)은 다음과 같이 폐하께 간절히 말했다. 폐하! 소인이 생각하고 있는 비슷한 예를 하나 들어 올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 차례 큰 병에 걸렸습니다. 10 년 동안 병석에 누어서 일어나지 못했다고 가정 합시다. 성심성의껏 치료한 결과 이제 겨우 신체가 점점 회복되어 거의 정상상태로 되돌아 왔다고 합시다. 이때 이 사람이 등에 쌀 한 섬(石)을 짊어지고 하루에 100 리(里) 길을 걸었다고 합시다. 이 사람의 건강이 어떠하겠습니까? 수말(隋末) 농민(農民) 대기의(大起義)는 동한말(東漢末) 황건기의(黃巾起義) 이래로 가장 큰 농민들의 봉기(蜂起) 아닙니까? 왜냐하면 수(隋) 나라 말기(末期) 농민봉기(農民蜂起)에 참가한 농민의 숫자가 수 백만 명을 헤아리며 장장 10여 년 동안은 동란 아니었습니까? 이제 수말동란(隋末動亂)이 멈춘지 겨우 10여 년을 경과했습니다. 이제 대당(大唐)은 초보적인 안정 단계에 처해 있으며 재난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국가와 백성들이 아직 완전히 부유해진 것은 아닙니다. 차제에 봉선태산을 실행하여 상제(上帝)에게 우리 대당(大唐)의 사업의 완성을 벌써 부터 알린다는 것에 대하여 소신은 두려워하는 바이며 아직 봉선태산의 때가 이르지 않했다고 여깁니다.” 는 뜻이다.

 

위징(魏徵)은 정확한 비유를 들어 성실하고 간절한 언사를 사용해서 충정(忠貞)이 철철 흘러 넘치는 말씨로 직언(直言)했는데 직언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거북스러움을 피하고 태종의 안색을 살펴가며 말했다.

당태종(唐太宗)은 위징(魏徵)에게 반박할 말이 없었으며 즉시 봉선태산(封禪泰山)의 시기를 연기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자존심(自尊心)과 허영심(虛榮心)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남의 잘못을 지적하여 바로잡아 시정하려고 하거나 비난하거나 규탄하려고 할 때는 반드시 결과를 한 번 더 생각해 봐야한다. 자칫 잘못하면 상대방의 역반심리(逆反心理)가 나타나서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 그러나 각종 수단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상대방에게 암시 효과를 나타낼 수 있게 해 줄 경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구양순(歐陽詢, 557-641)

 

중국 당나라 초기의 서예가. 자는 신본(信本)이고, 담주임상 사람이다. 당대의 4대가(우세남, 구양순, 저수량, 안진경) 중의 한사람이다. 어려서 부터 총명하였고 학문을 닦았다. 후진 지도를 맡다가 정관 십오년 팔십사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진(陳)나라의 광주자사였던 아버지 흘이 반역자로 처형된데다가, 태어나기를 키가 작고 얼굴이 못생겨서 남의 업신여김을 받 는 등, 어릴 적부터 불행한 환경을 참고 견디며 자랐다. 그러나, 머리는 유난히 총명하여 널리 경사(經史)를 익혔으며, 수양제를 섬겨 태상박사가 되었다. 그 후 당나라의 고종이 즉위한 후에는 급사중(給事中)으로 발탁되었고, 태자솔경령 홍문관학사를 거쳐 발해남으로 봉해졌다. 그의 서명(書名)은 멀리 고려에까지 알려졌으며, 이왕(二王), 즉 왕희지 왕헌지 부자의 글씨를 배웠다고 하는데, 현존하는 <<황보탄비>> <<구성궁예천명>> <<황도사비>> 등의 비와 <<사사 첩>> <<초서천자문>>을 보면, 오히려 북위파의 골격을 지니고 있어, 가지런한 형태 속에 정신내용을 포화상태 에까지 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의 글씨는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해법(楷法)의 극칙(極則)>이라 하며 칭송하고 있다. 그의 아들 통(通)도 아버지 못지 않은 서예가로서 유명하다.

구양순체는 구양순의 서체로서, 자획과 결구가 함께 방정(方正)하고 근엄하여 한 자 한 자를 쓰는 데에 순간이라도 정신적 이 완을 불허하는 율법적인 특색을 가진다.

구양순은 왕희지체를 배웠지만 험경(險勁)한 필력이 왕희지보다 나아서 자신의 독창적인 서체를 창안했다. 구양순의 서적은 비 서(碑書)와 서첩으로 전해지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이다. 그가 쓴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은 불후의 명작인데 이 때문에 구양순의 체가를 이른바 '구성궁체' 또는 '구체'(歐體)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왕희지체가 무색할 정도로 구양순체가 유명하였다.

 

*구양순의 서풍

당 시초에는 왕희지의 서를 배웠고 후에는 서풍이 변하여 필력이 강하기로는 당대에 따를 사람이 없었다. 그의 서는 굳세고 늠늠하며 잘 정돈된 남파의 특징과 칼로 베듯 도끼로 찍 은 듯한 굳센 북파의 영향을 함께 받았다.

 

★ 구양순체(歐陽詢體)

중국 당나라 초의 서예가 구양순의 서체.

자획(字畵)과 결구(結構)가 함께 방정(方正)하고 근엄(謹嚴)하여 한 자 한 자를 쓰는 데도 잠시라도 정신적 이완을 불허하는 율법적(律法的)인 특색을 지녔다.

구양순은 왕희지체를 배웠다고 하지만 험경(險勁)한 필력이 왕희지보다 나아서 자신의 독창적인 서체를 창안하였다.

구양 순의 서적(書蹟)은 비서(碑書)와 서첩으로 전하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이다.

한국에서는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왕희지체가 무색할 정도로 구양순체가 유행했었다.

 

*구양순체의 특징

당대 해서 중에서 가장 세련미를 지니며 귀족적이 서체가 바로 구양순체이다.

구양순은 젊어서 왕희지 부자의 서체를 공부하여 그이 결체는 강건하면서도 세차고 잘 정돈된 형을 취하여 준엄하고 세찬점 즉 붓을 댈때 면도날도 베고 도끼로 찍는 듯한 명쾌한 날카로운 맛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구양순은 한가지 양식에 사로 잡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쓴 글씨는 모나면서도 붓자국이 둥글둥글 하고 온화하면서도 힘차다.

 

구양순체의 기본글자의 취하는 형태는 안진경체의 향세와 달리 배세구조를 취한다.

 

★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

구양순이 황제(太宗)의 명에 의하여 76세에 서하여 정관육년에 각하였다. 이 비는 구성궁에 있는 泉을 예찬, 즉 임금의 음덕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심경이 높고 품격이 좋다.

특징으로는 점, 획이 가늘고 직선적이고 자형이 길고 잘 정돈되어 있으며 점, 획의 간격이 고른 가 운데 변화가 있다. 方筆이 많아 다소 모가 나고 단정하고 근엄하며 背勢에 의해 점, 획이 중심으로 모아지며 긴장감이 돈다.

"근심 걱정이 병이 되니 살갗이 포(脯)와 같이 된 요임금과 같고, 심하기가 발에 굳은살이 박힌 우임금 같네."라는 뜻이다.

구성궁예천명은 중국 당나라 시대의 구성궁이라는 궁궐 안에서 샘물이 저절로 솟아나는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문이다.

중국 산시성[陝西省] 린유현[隣遊縣]의 고궁터에 있는 당나라 때 세운 비석으로 632년 여름, 당 태종이 수나라 때의 인수궁(仁壽宮)을 수리하여 구성궁(九成宮)이라 개칭하고 이 곳에 피서하러 갔을 때 궁의 정원 한 모퉁이에서 단맛이 나는 샘물이 솟아 이를 기념하여 건립하였다 한다. 이 비석의 명문은 당시의 시중(侍中) 위징(魏徵)이 칙명에 의하여 찬(撰)하고, 구양순(歐陽詢)이 썼다.

이것은 구양순이 76세 때에 쓴 작품으로 그의 대표작 중 첫째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단정하고 명랑한 서풍과 뛰어난 품격미를 과시한 작품으로 예로부터 해서(楷書)의 극치로 칭송되고 있다. 비문은 24행이며, 50자로 되어 있다. 그 탁본은 이미 심하게 마멸되어 그 동안 수 많은 감상자들이 몰려들었던 사실을 말하여 준다.

이와는 별도로 송탁본(宋拓本)의 우수한 서첩(書帖)이 오늘날에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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