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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음악

잉그릿드 버그만

by 권석낙 2019. 2. 1.


 잉그리드 버그만 (INGRID BERGMAN)

스웨덴 (1915.8.29~1982.8.29)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태어난 잉그리드 버그만은 2살이 되던 해 어머니를 잃고 사진관을 경영하던 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12세때 아버지 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숙부의 밑에서 자라게 된다. 1933년 스웨덴 왕립 연기학교(The Royal Dramatic Theater)에 입학해 연극을 공부하기 시작한 그녀는 1934년 <Munkbrogreven>으로 영화계에 데뷔한다. 이 영화로 인해 스웨덴에서 촉망 받는 여배우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 그녀는 구스타프 몰란더스의 <인터멧조>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다. 

 

1939년 헐리우드로 진출한 잉그리드 버그만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제작한 데이비드 O. 셀즈닉의 눈에 띄게 되고 <아담의 네 아들>, <천국으로 가는 장의사>,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에 출연하면서 연기 세계의 폭을 넓혀간다. 그리고 1942년 파라마운트 창사 50주년 기념 대작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캐스팅이 될 뻔 했지만 그만 중도에 탈락을 하게 되고 같은 해 제작된 <카사블랑카>에 출연을 하게 된다. <카사블랑카>가 그녀의 출연으로 인해 성공하게 되자 파라마운트는 다시 그녀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캐스팅 한다. 게리 쿠퍼와 함께 출연한 이 영화로 그녀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된다.

 

이듬해인 1944년 <가스등>으로 첫 번째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을 수상한 그녀는 게리 쿠퍼와 함께 <여행 가방>에 출연하고,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스펠바운드>에서는 정신과 의사역을 맡기도 한다. 하지만 <스트롬볼리>에서 함께 작업한 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와의 염문으로 배우 생활에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미국 상원으로부터 "할리우드의 명예를 더럽힌 배우"로 낙인 찍히기까지 했던 잉그리드 버그만은 1956년 아나톨레 리트바크 감독의 <아나스타샤>로 재기에 성공하게 된다.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좋은 반응을 받은 이 작품으로 그녀는 두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게된다

 

1972년 그녀는 암선고를 받고 건강이 악화되어 감에도 불구하고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과 <가을 소나타>에 출연하여 좋은 연기를 펼쳤고,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으로는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리고 에미상 수상식 참여를 끝으로 1982년 8월 29일 자신의 생일 날 친구들과의 생일 파티 후 조용히 숨을 거둔다.

 

스타로서의 고귀함과 순수함을 갖춘 배우로 평가받는 잉그리드 버그만은 북유럽의 액센트와 화장기 없이도 고혹적인 풍모로 당대의 스크린을 풍미했던 글래머 스타들을 압도하는 배우였다. 그녀의 우아한 미소와 범접하기 힘든 자태는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녀를 헐리우드 최고의 여배우로 기억하게 한다

카사블랑카 영화보기

 

 Casablanca - As Time Goes By - The Full Original Ver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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