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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學♡書堂

麻三斤

by 권석낙 2022. 11. 3.

벽암록 제12칙. 동산화상의 삼 세근(麻三斤)

 

“세근 짜리 삼베가사 입은 그대가 부처라네”

 

{벽암록}제12칙에는 유명한 동산수초(洞山守初: 910~990) 화상의

삼베 세근에 대한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어떤 스님이 동산수초화상에게 질문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동산 화상이 말했다. “삼 세근(麻三斤)이다.”

 

擧. 僧問洞山, 如何是佛. 山云, 麻三斤.

 

‘삼세근’은 가사 걸친 수행자 상징

부처를 다른 데서 찾지 말라는 뜻

 

동산은 두 사람이 유명한데,

당대 조동종의 개창자인 동산양개 화상과

동산수초(洞山守初(910~990) 화상이 있다.

여기는 운문문언의 제자인 동산수초 선사이다.

이 공안은 {무문관} 18칙에도 제시하고 있는데,

 

{전등록}23권 명교대사전과 {오등회원}15권 동산전 등에 수록하고 있다.

동산 화상이 처음 운문 화상을 참문하고 깨달음을 체득한 이야기는

‘평창’에 자세히 싣고 있으며 {무문관}15칙에도 제시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동산 화상에게 “무엇이 부처입니까?”라고 질문하였다.

스님이 질문한 부처는 어떤 부처를 말하고 있는가?

부처의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

삼신(三身) 가운데 어떤 부처인가? 화신인 석가불인가.

보신인 아미타불인가. 법신인 비로자나불인가?

도대체 부처란 무엇인가?

이 문제를 분명히 밝히지 못하면 부처를 체득할 수가 없다.

 

여기서 질문하는 스님은 부처란 고귀하고 위대하고 존엄한

청정하신 부처의 이미지를 가지고 “무엇이 부처입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다.

부처가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동산은 곧장 “삼 세근(麻三斤)”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무문관〉21칙에 어떤 스님이 “무엇이 부처입니까?”라고 질문하니,

운문은 “똥 젓는 막대(乾屎)”라고 대답한바 있다.

 

{벽암록} 제7칙에는 혜초가 법안 선사에게 “무엇이 부처입니까?”라는

질문에 법안은 “그대는 바로 혜초이다.”라는

선문답과 똑같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동산 화상이 대답한 ‘삼 세근(麻三斤)’은 어떤 것인가.

먼저 이 말의 의미부터 이해해야 한다.

[통전(通典)] 제6권에 의하면 당나라에는 세근(三斤)의 마사(麻絲)가

하나의 단위로서 한 뭉치 마사(麻絲)의 무게가 세 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삼 세근의 실은 가사 한 벌(승복)을 만들 수 있는 재료이다.

당시에는 삼베(麻布)로 가사나 승복을 만들었다.

동산의 스승인 운문문언의 〈비문〉에도 “兩斤麻 一段布”

혹은 “三斤麻 一匹布”라는 문답이 있다.

 

{전등록} 10권 ‘조주’장에 어떤 스님이 질문했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고 했는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조주 선사가 말했다.

“노승이 청주에 있을 때 한 벌의 승복을 만들었는데

마포의 무게가 7근이나 되었지.”라고 전하고 있다.

 

원오는 평창에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 공안은 꽤 많은 사람들이 잘 못 알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씹기 어려워 입에 갖다 댈 수가 없다.

왜냐하면 담박하여 맛이 없기 때문이다.

옛 사람들은 부처에 대한 질문에 많은 대답을 하였다.

어떤 사람은 ‘대웅전 안에 계신 분’이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32상(三十二相)을 갖춘 분’ 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장림산 밑에 있는 지팡이’라고 했다.

그러나 동산스님은 ‘삼 세근(麻三斤)’ 이라고 했으니

참으로 옛 사람의 혀를 꼼짝 달싹도 하지 못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이런 말 저런 말을 둘러대어,

‘동산스님이 그 때 창고에서 마포(麻)를 저울질하고 있었는데,

어떤 스님이 부처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했기 때문에

‘삼세근(麻三斤)이라고 대답한 것이다’라고 하고,

또는 ‘동문서답(東問西答)을 하였다’ 고 한다.

또는 ‘그대가 부처인데 다시 부처를 물었기 때문에

동산스님은 우회해서 대답한 것이다’ 라고도 말하고 있다.

더욱이 안목 없는 녀석들은 한결같이 ‘삼세근(麻三斤)이

바로 부처이다.’라고 말하고 있으나 전혀 맞지 않는 소리다.

너희들은 만약 이처럼 동산스님의 말을 더듬거렸다가는

미륵부처가 하생(下生)할 때까지 참구해도 불법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즉 “부처란 무엇인가?”라는 스님의 질문에 동산 화상이

“마 세근”이라고 대답한 것은 “세근(三斤)의 마사(麻絲)로

만든 가사(승복)를 걸친 스님이 바로 부처이다”라고 대답한 것이다.

‘질문하고 있는 그대가 바로 부처일세!’라는 의미이다.

 

법안 화상이 “그대가 바로 혜초일세!”라고 대답한 것처럼,

‘혜초 그대가 바로 부처다’라고 단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부처를 밖에서 찾아도 찾을 수가 없고 얻을 수도 없다.

또한 부처란 어떤 형체가 있는 존재도 아니다.

결국 부처란 자기 자신이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체득해야 하는 것이다.

 

선에서 말하는 부처는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지금 여기서 자신의 일에 번뇌 망념이 없는

불성의 지혜작용을 전개하는 자기의 본래면목을 말한다.

본래 면목이란 자기의 참된 모습과 지혜의 안목을 구족한

자기 자신이 지금 여기서 지혜로운 삶을 전개하는 것을 말한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부처의 삼신(三身)은

지금 여기서 불성의 지혜로운 삶으로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다.

보살의 원력과 서원을 지금 여기 자신의 일을 통해서 실현하는 것이

보신이요, 시절인연에 맞추어 다양하게 변화한 모습으로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이 화신이고,

자신의 원력과 지금 여기서 시절인연의 일을 지혜롭게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불성의 지혜작용이 법신인 것이다.

 

{금강경}에서 “모든 모양을 모양이 아닌 것으로 파악해서

볼 수 있는 반야의 지혜를 구족한다면

곧바로 여래를 친견할 수 있다(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라고 설한다.

여기서 말하는 여래도 외부에 존재하는 여래가 아니라

각자 자기 자신의 깨달음의 당체인 법신 여래를 말한다.

{금강경}에서 음성으로나 모양으로 여래를 볼 수 없다고

설하고 있는 말씀도 잘 사유하고 음미해야 한다.

 

설두 화상의 게송을 통해서 설두의 견해를 살펴보자.

 

처음 “해(金烏)는 급하고, 달(玉兎)은 빠르다.

멋지게 근기에 응수 했으니 어찌 경솔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은

“무엇이 부처입니까?”라는 스님의 질문에

동산은 신속하고도 적절하게 “삼 세근”이라고 대답한 것을 옳은 것이다.

해와 달이 급히 지나가는 것처럼, 스님의 질문에 시간을 맞추고

학인의 근기에 대응하여 적절하게 잘 대답하였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삼 세근(麻三斤)이라는 말로서 학인을 상대했다고

동산의 안목(견해)을 파악하려 한다면,

절름발이 자라와 눈먼 거북이 빈 골짜기로 들어가는 꼴이다.”는 말은

부처나 삼 세근(麻三斤)이라는 말로 대답했다고

부처나 삼 세근(麻三斤)이라는 말에 집착한다면

동산 화상의 진면목을 볼 수가 없다는 의미이다.

 

또 “꽃도 수북수북, 비단도 수북수북,

남쪽에는 대나무, 북쪽에는 나무.”라고 읊은 말은 고사가 있지만

생략하고, ‘봄이면 살쾡이가 천지에 만발하고,

가을이면 온 산에 비단의 단풍이 가득하며,

남쪽지방에는 대나무가 많고,

북쪽 지방에는 나무가 많은 산의 모습이 그대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의 세계가 아닌가?’라는 의미로 읊고 있다.

 

마지막에 “그래서 장경 화상과 육긍 대부를 생각하니 웃어야지, 통곡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줄 알았네. 아이쿠()!”라고 읊고 있다. 이 역시 고사 있는 말인데, 생략하자. 말하자면 설두는 동산이 “삼 세근”이라고 대답한 것은 세간의 인정(人情)과 분별적인 상식으로는 깨달을 수가 없으니, 수행자들은 이 공안을 잘 사유하여 참구해야 한다는 주의를 하고 있다.

 

♣마삼근麻三斤/법전스님

 

석마천임경石馬穿林徑하고

철우도해문鐵牛渡海門이로다

일언요경상一言寥景象하니

조우모운둔朝雨暮雲屯이로다

돌로 만들어진 말은 숲속의 오솔길을 지나고

무쇠를 부어 만든 소는 바다 저쪽으로 건너간다.

단한마디에 온 세상이 고요해지니

아침엔 비내리고 저녁에는 구름끼는구나.

 

동산수초洞山守初선사에게 어떤납자가 물었습니다.

“여하시불如何是佛이닛고. 어떤것이부처입니까?”

선사께서대답했습니다.

“마삼근麻三斤이니라. 삼서근이니라.”

 

동산스님의 ‘삼서근’ 화두는 참으로 씹기가 어려워도 대체 입을 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담박하여 맛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금에 앞뒤가 꽉 막힌 많은 납자들이 잘못알고 있는 대표적인 공안중의 하나입니다. 예로부터 선지식들은 부처님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이러쿵 저러쿵하면서 참으로 많은 답변들을 줄줄이 늘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동산선사는 일언지하에 한마디로 잘라서 ‘마삼근’이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그 동안 자기 입이라고 마음 놓고 나불거리던 모든 이의 혓바닥을 옴짝달싹도 못하도록 했다고 할 것입니다. 참으로 제대로 된 답변중의 답변이요, 활구중의 활구라고 할 것입니다.

 

예로부터 많은 납자들은 흔히 이말 저말 둘러대면서 ‘마삼근’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동산선사가 그때 창고에서 삼을 저울질하고 있는데 때마침 어떤 납자가 부처를 물었기에 이같이 대답하였다”고 하기도 하고, 또는 “동산선사가 동문서답했다”하기도하고, 또는“ 그대가 부처인데 다시 부처를 물으니 동산스님이 한바퀴 핑돌려 우회적으로 답변했다”라고도 합니다.

 

더욱이 썩어 빠진 놈들은 한결같이 말하기를,

 

“이 마삼근이 바로 부처이다”라고 하는데 이는 전혀 앞뒤를 모르고 하는 엉터리 소리일 뿐입니다. 그래서 설두선사는 ‘만약 삼서근을 상대의 근기에 맞춘 답변으로 이해한다면 마치 절름발이 자라와 눈먼 거북이가 빈골짜기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등줄기가 서늘해 지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세치혀로 깝죽대고 있으니 어느 세월에 미혹에서 벗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결제대중들이 이와같이 동산선사의 마삼근에 더듬거리면서 우물쭈물 답변하려고 하다가는 서강의 물을 다 마실때까지 참구하여도 절대로 깨치지 못할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말이란 도를 담아 내는 그릇일 뿐인데, 고인의 마음은 전혀 알지 못한 채 다만 그 말만 가지고 따지니 어찌 그것을 제대로 알아 차릴 수 있겠습니까?선인들께서는 도란 본디 말로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말로써 도를 나타낼수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도를 깨치고 나면 반드시 그 말을 잊어야 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운문종의 동산수초선사는 운문문언선사의 법을 이었습니다.

 

어릴때 부터 선근이 있어 종소리가 들리기만 하면 갑자기 밥을 먹다가도 수저질을 뚝 그치고 서똑바로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일어날 줄 몰랐습니다. 그런 선사를 어머니 여씨는 일부러 흔들어 깨워서 밥을 먹이지도 않았고 또 그 시간에 없어져도 일부러 찾지도 않았습니다. 16세에 꿇어 앉아 출가하기를 청하니 모친은 바로 허락하였습니다. 계를 받은 이후에 율장을 열람하고 나서 천하를 돌아다니며 안거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어느 날 운문선사회상을 찾아가니 운문선사가 물었습니다.

 

“어디서 왔느냐?”

“강남의 사도渣渡에서 왔습니다.”

“여름에는 어디에서 살았는고?”

“호남보자사報慈寺에서 지냈습니다.”

“언제 그곳을 떠났느냐?”

“8월25일입니다.”

“이런 멍청한 놈. 내가그걸물었느냐?”

그 자리에서 몽둥로 세방망이를 내리치면서 말했습니다.

“큰 방으로 꺼져버려.”

머리에 혹 세개를 달고서 그 자리를 물러 나온 선사는 저녁에 다시 입실하여 운문선사의 턱밑으로 바짝 다가가 다시 물었습니다.

“도대체 제가 낮에 무엇을 잘못 대답한 것입니까?”

“이 멍청한 놈아! 강서와 호남의 회상에서도 그렇게 대답했겠구나.”

그 말에 동산선사는 크게 깨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뒷날 인적이 끊긴 곳에 암자를 세우고, 한톨의 쌀도 저축하지 않고, 한포기채소도 심지 않고서 항상 시방으로 왕래하는 모든 납승들을 맞이하여, 그들에게 자기의 본래면목을 얽어매는 못과 문설주를 모조리 뽑아 주겠습니다. 그리하여 땟국물에 누렇게 젖은 적삼을 훌훌 던져 버리고서 그들에게 청정한 경지에서 할 일없는 사람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당당히 말하고는 운문선사를 하직했습니다.

 

그리하여 이후 동산洞山에서 법석을 펴고는 납승들을 지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 선사는 참선학도들에게 대갈일성으로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 가운데 말이 있는 것을 사구死句라고 이름하며, 말가운데 말이 없는 것을 활구活句라고한다.

 

제방에서는 줄탁동시의 안목은 갖추었으나 줄탁동시의 용用은 갖추지 못하고 있으니, 여기에 이르러서는 실로 사람을 얻기란 어렵다. 다만 부동不動의 일진一塵과 불발不撥의 일경一境만을 좋아하여 사事를 보는 것을 문득 도道라고 하니 이러한 무리가 동서남북에 부지기수이다. 요컨대 형식을 간략하게 하여 사람을살리는 안목은 어느 누구도도 무지 말하지 않고 다만 가히 말만적게 하여 모두 앉아 있기만할 뿐 근원을 통달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음계陰界에 떨어져서 망령되이 편안하다고 하면서 죽음의 물에 떨어지는 줄을 알지 못하고 꼬리없는 원숭이만 희롱하고 있다. 죽는 날에 북소리는 이미 그치고 원숭이는 도망가고 손과 발과 온몸에 미친 듯이 경련이 일어나면 후회해도 소용없느니라. 만약 진정한 납자라면 얼어 죽고 배가 고파 죽더라도 끝까지 누린 냄새나는 장삼은 입지 말아야 한다.”

 

이런 기상을 가진 선사였기에 ‘여하시불如何是佛’을 물으니 ‘마삼근麻三斤’이라고 한마디로 말했던 것입니다. 하안거 반산림을 맞은 총림의 결제대중들은 ‘부처를 물었는데 왜 삼서근’이라고 대답했는지 이 공안을 통하여 자기의 한철동안의 중간 살림살이를 스스로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동산지도마삼근洞山只道麻三斤하고

조주포삼칠근중趙州布杉七斤重이라하니

시인요회개중의時人要會中意인댄

명명계향오경제明明鷄向五更啼로다

동산은겨우삼서근이라고말했고

조주는삼베적삼무게가일곱근이라했다.

납자들이그속의뜻을알고자할진대

분명히수탉은오경이되면우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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