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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감상

이별의 노래

by 권석낙 2019. 1. 30.

소프라노 김윤자의 목소리..

박목월 시 '이별의 노래'

 

 

 

시인 박목월님의 사랑과 이별에 대한 이야기와 노래입니다.

실비아님이 가을이 오면 흥얼거리신 다기에..^^

 

 

 

    이별의 노래  박목월 시, 김성태 작곡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에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가곡 - 이별의 노래(박목월 시 김성태 작곡) 소프라노 김윤자

 

 

 

 

 

 

 

 

 

 

이별의 노래

 

‘이별의 노래’는 그의 나이 마흔에 처자식을 거느린 가장으로 여대생을 사랑하고 이별하는 감정을

노래한 시다. 유부남인 자신을 사랑하는 여대생을 사랑하다가 현실의 냉정한 벽을 넘지 못하고

눈물 흘리며 이별을 해야 했던 시인의 슬픔이 깊게 녹아있는 시다.

 

목월의 이런 사랑은 6,25 전쟁이 끝나고 시작된다. 대상은 여대생이었다.

국문과 학생이었던 그녀는 목월을 뜨겁게 사랑했다. 목월이 친구를 불러내어 그를 설득해도 소용이 없었다.

 

<사진 : 영화 자유부인의 한장면>

 

그녀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죄가 되나요”라는 확신을 가지고 목월에게 다가왔다.

1954년 그들 둘은 결국 제주도로 사랑의 도피를 감행한다. 이들의 동거는 길지 않았다.

이것을 알고 목월의 부인 유익순 여사는 제주도에 그들이 동거하는 곳을 방문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한복 한 벌씩과 생활비로 쓸 금일봉을 전달하고 서울로 돌아온다.

이후 이들의 동거는 끝이 났다. 어느새 제주도에도 가을이 와 있었다.

 

<박목월 시인과 부인 유익순 여사>

 

가슴 아린 사랑과 이별의 슬픔이 있었기에 목월은 아름다운 시를 만들어 냈으리라.

이런 사랑에 우리가 “불륜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으리라.

 

이때 그녀와 헤어지면서 쓴 시가 가곡으로 널리 애창되고 있는 유명한 ‘이별의노래’다

목월은 첫사랑의 상처를 가지고 있었기에 시인이 된 사람인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시절 그는 옆집의 동갑내기 여학생을 좋아했다.

그가 대구 계성중학교를 다닐 무렵 첫사랑의 소녀가 결혼하였다는 것을 어머니를 통해 알게 된다.

그들의 나이 15세 때였다. 당시에는 조혼이 유행할 때였다.

 

목월은 그녀와 결혼하게 될 것을 믿었고 운명이라 믿었다.

이를 위해 국민학교 6학년 때 1년 동안 앞산에 올라가 새벽기도를 드렸을 정도였다.

절망의 나날을 시심을 키우며 졸업한 목월은 금융조합에 취직을 한다.

그리고 자신의 고향 경주를 근무지로 선택한다.

떠나간 첫사랑의 추억과 결혼한 그녀의 그림자라도 밟기 위함이었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것이란 예감과 달리 그녀는 결혼에 실패하고 친정에 와서 살고 있었다.

 

해설 : 김경식 시인    

 

 

 

 

이별의 노래  박목월 작사: 김성태 작곡 (1950년작품)

 

'이별의 노래'에 얽힌 사연은 박목월씨의 생전의수필집 "구름에 달가듯이"에 밝혔다.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여인과의 애달픈 이별을 그의 글에서 주인공의 신분, 이름, 만난 계기, 시기는

말하지 않았지만 비밀로 하는 이유에 대하여 그는
"자기 평생에 가장 소중한 이름 하나를 감출 줄 모르는 헤프고 어리석은 바보도 없을 것이다. 만난 시기도

수천년 전 같기도 하고, 바로 어제 같기도 하다,이와 같은 추억은 시공을 초월해서 살아있는 것인데..."

라고 해명 하였다.

 

노래의 주인공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연한 하늘빛 갑사 치마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고 한다.

그 다음의 재회는 화약냄새가 감도는 거리의 한 모퉁이에서 였는데 그때 눈발이 내리고 있었다.
세번째 해후한 그날은 유달리 눈부시게 햇빛은 빛났고 그 눈부신 햇빛 사이로 소복을 입고 걸어오는

한여인을 발견했는데 그녀는 불꽃에 싸여 있었다고 한다.

석고처럼 창백한 그녀의 얼굴은 아름다웠고 증병을 앓고있던 그녀는 그날 밤 자신의 병실을
지켜달라고 청했다고 한다.

 

병실에서 그녀외 시인이 축배를 들고 있을 때 창밖에는 봄날의 밤이 신비스럽게 커튼사이로 스며들었고

꽃병에는 개나리꽃이 가득 꽃혀 있었다고 회상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가을 어느 날 하오 5시30분경 갑자기 그의 시계는 멎었고, 사랑의 밀애를 나누었던 그녀는

끝내 하늘나라로 떠나고 말았다.

 

그때 그는 비통한 심정으로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불어”,..하며 이별의 노래를

그녀에게 조용히 읊어내려 갔고, 그리고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라는 표현을

낭만적인 것 같지만 실상 그는 “나는 하얗게 재가 되어 삭아내린 기분”이라고 당신의 비애를 표현했다.

 

훗날 작곡을 한 김성태씨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그녀"는 대구 여성으로 박시인이 대구 금융조합에

근무할 때 사무실에서 첫 대면 했으며 6.25동란시 대구 피난지에서 재회하여 3년간 연애를 한것같다고

말하였다.

 

시인은 대구 계성고를 졸업, 1939년 문단에 데뷰한후 초기에는 동시를 주로 썼는데 지금 세살먹은 아이도

곧 잘 부르는 유명한 동요<송아지>도 그가 쓴 동시이다.

지금 그의 고향인 경주 황성공원에는 <얼룩송아지>노래 비가 서있다.

 

1949년에 그는 이화여중 교사로 부임하면서 서울에 정착하였고 그후 한양대학 교수로 강단에 서면서

많은 시를 남겼다. 대표작품으로 <나그네>가 있는데 이시는 작곡가 이요섭씨에 의하여
1974년 작고 되어져 가곡으로 만들어져 있고 1978년 3월 28일

<이별의 노래를 남긴채, 그도 우리와 이별을 하고 말았습니다>.

 

시 <이별의 노래>에 곡이 붙여진 것은 그녀가 숨진이후 며칠 지나서 대구에서 작곡가 김성태를 만난 날

김성태는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해군 정훈 악대를 조직해 지휘를 맡고 있으면서 부산, 대구에서

주로 활동하였는데, 그날도 김성태는 친구인 박시인도 만날 겸 군악대 일도 있고해서 대구에 찾게된

1942년 11월초 날씨가 쌀쌀한 늦 가을 밤 두사람은 술집에 앉아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술을 마시다가,

문득 박시인이 새로 지은 시 라면서 <이별의 노래>가 적힌 쪽지를 내밀었다고 합니다.

 

시를 속으로 읽는 순간 몽클하는 감동이 솟구치면서 너무도 아름답고 깨끗한 시상에 빨려드러 갔다고

김성태는 말하였다. 그리고 그날 박시인과 헤어져 여관으로 돌아온 즉시, 시의 감흥을 멜로디로 나타냈고

오선지가 없어서 백지에 오선을 긋고 악보를 그림으로서 이 가곡은 그날 밤에 탄생 하였던 것이다.


김성태 박사는 1910년, 11월9일 서울 중국 광희동 1가 88번지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중량천 부근의 땅을 소유한 집안이었기에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 하였다.
김성태는 조부가 세운 교회에 다니며 합창단원으로 노래를 불렀고 성탄절에는 독창도 하면서 음악을

알게 되었다. 훗날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한 후에도 흥난파에게서 바이얼린을 배웠는데
연희전문의 현제명 선생이 음악부를 조직해서 합창과 교향악 활동을 지도하고 있을때 현제명은 어떻게

알았는지 김씨가 바이올린도 잘한다는 소식을 듣고,김씨의 스카우트를 학교에 추천하였고 음악을 너무도

사랑했던 그는 상과에서 음악과로 전공을 바꿔 합창과 바이올린을 연주하였던 것이다.

 

1934년 약관 24세때 연전 졸업과 동시에 체계적인 음악수업을 받기위해 도쿄 고등 음악학교(현, 일본국립

음대)작곡과에 유학, 일본에서 작곡을 전공한 최초의 국내 작곡가가 되었다.
집안은 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음악 공부를 반대하여 돈을 대어주지 않았지만 그의 소망을 아는 부인이

부모 몰래 패물을 팔아서 일본유학을 보내었다고 한다.

 

“아내가 아니면 오늘의 저는 아마 없을 겁니다”하며 그는 부인에게 감사하였다.

1939년4월초 유학을 끝내고 귀국하자 마자 전임 이흥렬씨의 뒤를 이어 경성 보육학교 음악주임이 되어

사회의 첫발을 내 디뎠고, 이후 1941년 보성전문학교 음악강사로 옮겨 해방때 까지 재직하다 해방 직후

창립된 경성 음악학교<현, 서울음대> 조교수겸 교무과장이 되어 후학을 지도하면서

1876년 서울 음대학장으로 정년 퇴직할때까지 재직하였다.

그의 작품으로는 <동심초> <산유화> <추억> <한송이 흰백합화>등의 우리 가곡을 남겼다.


 


짤림 대기조 : 수원시립합창단의 '이별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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