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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講座

七步詩

by 권석낙 2019. 9. 25.

 

煮豆燃荳箕(자두연두기) : 콩깍지를 태워 콩을 삶는다.

조식(曹植) 192~ 232
중국(中國) 삼국시대(三國時代) 위(魏)나라의 시인(詩人)이다.
자는 자건(子建). 시호는 진사왕(陳思王)이고 중국의 가장 위대한 서정시인(敍情詩人) 중 한사람으로 불리며,
아버지는 삼국시대(三國時代)를 주름잡던 유명한 장군 조조(曹操)이다.
아버지가 중국의 1/3에 해당하는 북부지방을 지배하고 있을 때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식(曹植)


조조가문(曹操家門)은 시인가문(詩人家門)이라
불렸을 정도로 시문(詩文)에 조예가 깊은 명사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뛰어난 세명이 있었다.
그들을 3조(三曹)라하여 "조조(曹操)와 두 아들 조비(曹丕), 조식(曹植)"을 역사가들은 손꼽는다. 
그 셋 중에서도 조식은 아버지 조조와 형 조비보다 재능이 더 뛰어났던 詩人이다.
그러다보니 아버지인 조조로부터 늘 깊은 사랑을 받으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실제로 조조는 조식이 일찍부터 보여준 문학적 재능에 깊은 감명을 받아 조비 대신 조식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마음을 정했을 정도로 애정을 보인적도 있었다.
이러다보니 조식은 커가면서 늘 형 조비에게 시기와 질투를 받았는데,
서진시대(西晉時代) 진수(陳壽)가 쓴 정사(正史) "삼국지(三國志)"에서는 
조비가 동생 조식을 더욱 괘씸하게 여기게 된 것은
당시 소년이었던 조식이 나중에 형의 아내가 된 견(甄) 부인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조조(曹操)에게는

자식을 낳은 15명의 비(妃)와 총 24명의 아들 그리고 5명의 딸이 있었다고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는 기록하고 있다.

자식을 낳지 못한 비(妃)까지 합하면 대략 40~50명은 넘을 듯 하다.
조조의 맏아들 조앙(曹昻)
약관(스무살)의 나이에 "효렴"(孝廉:부모에게 효도를 하고 충성심이 강한자를
20만 명 중에 한 명 꼴로 나라에서 선발하여 모범인으로 여겨 관직을 주고 관리했었다.

따라서 효렴에 천거되면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그 집안과 고을까지도 큰 경사로 여겼던 것이 당시의 실상이었다.)으로

천거 되었던 품행이 반듯한 아들이 그다.

당시 조조는 장수가 이끌던 진영을 공격하여 장수에게서 항복을 받아냈으나,
조조가 장수의 형인 장제의 아내를 강제로 첩으로 만들어 버리자 장수는 크게 원한을 품었고,
이 사실을 듣게 된 조조가 장수를 죽이려 했으나, 그 계획이 누설되어 장수가 먼저 조조의 진영을 쳐들어와 조조의 군사들을 대파하였다.
조조는 위기에 몰려 장수의 부하들에게 긴박하게 쫏기는 몸이 된다.
죽느냐 사느냐 긴박한 상황에 몰리자 조조의 맏아들 조앙(曹昻)은

자신이 타고있던 말을 아버지 조조에게 건네 태워 보내고 자신은 장수의 군사들과 맞서 싸우다
현장에서 죽었다고 전하는 아들이 바로 충성스런 조앙(曹昻)이다.

 



 

조앙(曹昻) 밑으로 조비(曹丕)의 바로 위의 형이 조삭(曹?)인데,
기록에는 자세한 내용이 없는것으로 보아 어린나이에 아들 중에 가장 먼저 죽은것 같다.
그 다음이 조비(曹丕)이고 바로 밑 동생이 조창(曹彰)이고, 그 다음 다섯째가 지금 소개하는 조식(曹植)이 된다.

서기 220년 조비(曹丕)는 치열한 경쟁속에 동생 조식을 누루고 후계자로 낙점을 받았고,
아버지 조조(曹操)가 죽자 뒤이어 위왕(魏王)에 오른다.
왕에 오르자, 동생 조식을 시기하고 은근히 괴롭히는 일이 줄기는 커녕 점점 더 심해졌다.

그에 따른 조식(曹植)의 좌절과 불행은 그가 지은 詩 대부분의 주제가 되었을 정도였다.

 



 

조식(曹植)은 형들인 조비(曹丕)와 조창(曹彰)과의 후계자 권력 다툼에서 밀려났지만,
그의 詩를 흠모하고 문학적인 정서와 깊이를 따르는 조정의 여러 대신들을 비롯해
전국의 많은 문사(文士)들이 그의 주변으로 모여들자
경쟁의식을 강하게 느낀 형 조비는 은근한 위기감을 느낀
다.
마침내 동생 조식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럴듯한 명분과 구실을 찾는데...
마침 아버지 조조의 장례식에 문상조차 오지 않은 것에 대한 불효죄를 물어
죽이고자 마음 먹고 동생 조식을 불러들여 다그치는데...

"네가 시를 잘 짓는다고 소문이 온 궁 안 밖과 도성(都城)인 허창(許昌)에 파다하다는데,
그렇게 잘 짓는다면 내 앞에서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 시를 지어보이라"고 윽박지른다.
"나와 너는 같은 형제이니 형제(兄弟)의 정(情)을 넣어 시를 짓되 절대로 형제(兄弟)란 글은 한 글자도 넣어서는 아니된다
만약 합당한 시를 지으면 네 목숨은 살려줄 수 있지만, 짓지 못하면 너에 대한 소문은 모두가 헛소문으로
돌아가신 아버님과 나를 비롯한 세상을 능멸한 죄이니
절대로 용서 할 수 없으므로 죄를 물어 네 목숨을 거두겠다"
고 몰아세운다.

 

조식(曹植)은 대신들이 가득 모여 숨을 죽이며 지켜보는 대청에서
부들부들 떨며 스스로 걸음을 옴겨가 일곱 발자욱 중 마지막 일곱 번 째 발자욱에 가서 드디어 운을 떼는데...

이때 지은 詩가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 그의 名詩로 지금까지도 애송되는 조식(曹植)의
"칠보시(七步詩)"가 그것이다.

 



 

칠보시(七步詩): 일곱 걸음만에 지은 시

 

煮豆燃荳箕(자두연두기) 콩깍지를 태워 콩을 삶는다.

      豆在釜中泣(두재부중읍) 콩이 가마솥 안에서 눈물 흘리네

        本是同根生(본시동근생) 본래는 같은 뿌리에서 생겨났건만

       相煎何太急(상전하태급) 어찌 이리도 급하게 다려대는가~

 

조식(曹植)이 시를 지어 읊으며 울먹이자...

좌중에 모였던 대신들을 비롯한 많은 관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속에 흐느꼈고,
어떻게든 구실을 잡아서 죽이려던 형 조비(曹丕)도 끝내 눈물을 주루룩 쏟으며

안타까운 형제의 정에 그만 흐느껴 울고 만다.

결국 동생 조식(曹植)을 죽이지 못하고 살려 보내며

"다시는 도성(都城)으로 돌아올 생각은 말라"허창(許昌)에서 먼 봉지로 떠나보낸다.
조식은 그 후로도 늘 형 조비의 경계속에 자주 봉지를 옴겨다녀야 했고
평생을 유랑생활을 하다시피 떠돌며 불우한 인생을 살다가 41세의 일기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 주(註) -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에 실린 "조식정사(曹植正史)"의 내용을 살펴보면
처음엔 총명한 조식이 조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조비에 비해 처세가 좋지 못하고 음주에도 절제가 없는 모습을 보이는 점과
천자(天子)만이 다닐 수 있는 동쪽 성문(城門)을 조식이 수레를 타고 거만하게 지나갔던 사건 때문에
조조의 군사(軍師)로 있던 순욱(荀彧)에게 크게 혼이 난 이후부터
후계자 구도에서 멀어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게다가 조식을 중심으로 커진 세력을 경계한 조조가
아들 조식을 보좌하던 똑똑하고 머리가 비상한 양수(楊脩)를 괴심죄를 쒸워 죽인다.
양수(楊脩)는 조조의 마음을 휜히 꽤뚫어보며 무뢰하게 앞서감을 괘씸하게 여겨 아버지가 주살하자,

조식은 점점 불안을 느낀다.
후계자 탈락의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조조의 사촌동생이면서 장수였던 조인(曹仁)이 번성에서 관우(關羽)에게 포위당했을 때
조조가 아들의 능력을 시험해보고자 조식을 장군으로 임명해 전쟁지역으로 보내려고 불렀는데,
술에 취해 골아떨어져 영(令)을 받들지 못하는 일까지 생기자,

조조는 크게 화를 내며 아들에게 주었던 장군의 직위를 박탈해버렸다.
삼국지(三國志) "진사왕식전(陳思王植傳)"을 인용한

"위씨춘추(魏氏春秋)"에서는, 형 조비가 억지로 술을 먹여 일부로 취하게 만들었다고 적고 있으니...
어느것이 사실인지는 모르나

아버지가 불렀으나 술에 취해 가지 못한 것은 사실인 듯 하다.

 



 
후계자를 두고 다툼 끝에

바로 위 친형 조비(曹丕)가 아버지 뒤이어 왕위에 오르자,
양수(楊脩)와 함께 조식의 보좌를 맡던 그의 친위세력들도

이런저런 죄를 쒸워 하나 둘 조비에게 죽임을 당했다.
조식은 궁궐에서 먼 변방의 봉지를 떠돌며 형 조비에게 자주 장문의 상소를 올려 나랏일에 대해 논하며

자신의 재능을 펼칠 관직을 청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고,
결국 아내까지 원인 모르게 살해당하고 연이어 딸도 잃는 등,

절망하며 근심속에 살다가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정사(正史)는 기록하고 있다.

 




조식(曹植)은 일찍부터

문학적(文學的) 재능(才能)이 뛰어났다
어느날 조조가 땅을 파다가 동(銅)으로 만들어진 참새를 우연히 발견했는데,

그 장소에 웅장한 누각 세채를 모아서 짓게하고
누대의 이름을 "동작대(銅雀臺)"라 이름 지었다.
누대가 완성되자 완성을 기념하는 만찬을 열고 두 아들 조비와 조식을 불러 글을 짓게 했는데,
동생 조식이 지은 "동작대(銅雀臺) 부(賦)"는 그 뜻이 웅대하고 깊은 표현이 형 조비가 지은 문장을 능가하여
그때부터 부친 조조의 총애를 듬뿍 받았다.

 

지금 소계하는 "칠보시(七步詩)"를 소계하고 난 뒤

다음편으로 조식이 지은 또 다른 명작 "동작대(銅雀臺) 부(賦)"를 소개 할까 한다.

 

아무튼

한 때는 조조가 후계자로 조식을 염두에 두고 책사 사마의로 하여금 개인교습을 부탁했을 정도로
똑똑하고 총명함에 기대를 걸기도 했었던 아들이 바로 조식이다.
그는 늘 서성적이며 우수(憂愁)에 젖은 시들을 주로 지으며 술에 쩔어 지냈는데,
형 조비의 감시와 속박에 대한 내적인 반항이 강했음을 그의 시문에는 강하게 나타나 있다.
또한 그는 훗날까지 이어지는 5언시의 기초를 굳혔던 시인으로 중국 시문학사에서 한 획을 긋는 대단한 시인 중 한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악부(樂賦)에도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겼으며,
고도의 서정성의 발휘, 화려한 수사 등 다방면에 걸쳐 뛰어났고,
기개 넘치는 건안의 풍골은 그로써 대표 된다고 중국고문학사(中國古文學史)을 비평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 뛰어난 조식(曹植)보나도 더 뛰어난 조조의 아들이 사실은 한 명 더 있었다.
그가 바로 "조충(曹沖)"으로 여덜번째 아들이 바로 그다.
조비와 조식은 모두 변 황후 소생인이었으나 조충은 환부인 소생이다.
그는 열 세살에 병으로 죽었다고 정사인 "삼국지 위서(三國志 魏書)"는 적고 있으나
나관중(羅貫中)이 지은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똑똑함을 질투한 형 조비가 잠자는 조충의 방에다 독사를 풀어서 뱀에 물려 죽게하였다고 쓰고 있다.
아무튼 아버지 조조에 뒤이어 왕에 오른 조비(曹丕)마져도 "조충이 지금까지 살았다면 내가 이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고,
조조도 병든 조충(曹沖)을 바라보며 당시 천하제일의 의사였던

화타(華咤)를 홧김에 죽인 것을 몹시 후회했다고 위서(魏書)는 적고 있으니...
조충(曹沖)은 어린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나이에 비해 똑똑했던 그의 일화는 유명하여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전해오는 이야기 두가지를 소개하자면

 

첫째로... 코끼리의 몸무게 알기
북방 지역의 위(魏)나라 조조(曹操)가 남방 지역 오(吳)나라 왕 손권(孫權)으로부터 코끼리 한 마리를 선물 받았다.
북방지역 사람들은 일찍이 이렇게 큰 동물을 본 적이 없었다.
조조는 코끼리의 몸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했다.
그렇지만 코끼리의 몸무게를 잴 수 있을 만큼 큰 저울은 없었다.

또한 코끼리의 몸무게를 잴 수 있는 방법을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했다.
이때 조조의 다섯 살 난 아들 조충(曹沖)이 아버지의 궁금증을 풀어주겠다고 나섰다.
그는 코끼리 부리는 사람을 시켜 코끼리를 강에 떠 있는 배로 데리고 가도록 하였다.
코끼리의 무게 때문에 배는 물 속으로 어느정도 잠겼다.
그는 또 다른 배를 타고 가서 코끼리가 타고 있는 배가 어디까지 가라앉아 있는지 표시를 해 두었다.
그런 뒤에 코끼리를 내리게 하고 배에 돌을 실으라고 하였다.
이미 표시해둔 곳까지 배가 잠겼을 때 조충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 돌들을 꺼내어 그 무게를 달아보면 될 것입니다.
돌들의 무게를 모두 합하면 코끼리의 무게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쥐가 갉아먹은 말안장에 관한 이야기로
조조는 말을 무척이나 아꼈고 값비싼 안장들도 몇 개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광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 광에 보관되어 있는 안장을 살펴보다가 쥐들이 안장을 갉아먹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조조가 자신을 쉽게 용서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두려워했다.
그래도 조조에게 안장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고하고 벌을 받는 편이 나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때 조충이 다가왔다. 조충은 그 사람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는 무슨 까닭인지 물었다.
조충은 자초지종을 들은 뒤 아버지에게 보고하기 전에 사흘의 말미를 달라고 하였다.
다음날 조충은 주머니칼로 자신의 옷에 작은 구멍을 뚫었다. 그 구멍들은 마치 쥐가 갉아먹은 것처럼 보였다.
조충은 부루퉁하게 골이 난 표정을 짓고는 아버지를 뵈러 갔다.

"아버지, 쥐들이 옷을 갉아먹은 사람에게는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진다고 하던데,
오늘 아침에 보니 제 옷에 쥐들이 갉아먹은 자국이 남아 있어요. 옷이 못쓰게 되고 말았어요."
조조가 조충의 걱정을 덜어주려고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얘야, 그런 터무니없는 말은 믿지 마라. 걱정할 것 없다."
잠시 후 광을 지키는 사람이 쥐들이 안장을 갉아먹은 사실을 보고하러 왔다. 조조는 웃으며 말했다.
"쥐들이 내 아들놈의 옷도 갉아 먹었다네, 그러니 쥐들이 안장을 갉아먹었다고 해서 놀랄 일이 아니지.
앞으로는 더욱 신경을 쓰도록 하게나."

조충(曹沖)은 영리하고 재주가 넘치는 소년이었다.

또한 어려운 처지에 처한 사람들을 동정하는 마음도 지니고 있어서,
죄를 지었지만 정상이 참착되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변호해주기도 하였다.
조조도 이러한 조충을 가장 사랑하였으며 자신의 후임으로 삼고 싶다고 여러 번 말하기도 했을 정도로 기대가 컸었다.
그러나 그 기대와는 달리 조충(曹沖)은 열 세살의 어린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각설하고...
세상을 살다보면 남보다 재주나 머리가 뛰어남에 주목을 받아 빠르게 출세하는 이도 종종 있지만
조식처럼 질투와 시기를 받아 불우한 일생을 보내는 경우도 종종 있는게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현실이기도 하다.
따라서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하지 않던가~

난세에는 늘 그 어지러움을 헤쳐나가는 지도자나 장수를 민중들은 갈망하며
그 민중들 사이에서 영웅은 어김없이 나타나 명석한 판단력과 지도력으로 난세를 돌파했던 일화들을
역사서(歷史書)들은 늘 드라마틱하게 그리고 있다.
한편으론 남보다 너무 뛰어났기에 표적이 되어 피지도 못하고 사라진 안타까운 천재들도 얼마나 많았던가~
옛부터 권력은 부자지간(父子之間)에도 결코 나눌 수 없다고 했다.
하물며 형제지간(兄弟之間)에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했다.

권력은 기껏해야 십년을 넘기기 어렵다고 했지만
좋은글은 만년(萬年)동안 향기를 풍긴다고 했다.
이긴자가 진자를 보듬어 안는

넓은 아량과 화합의 지혜가 반듯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되는 시점이

지금이 아닌가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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