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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筆♡揮之

蘭皐

by 권석낙 2019. 9. 21.

 



 

 



 

                                               개다리 소반에 멀건 죽 한 사발

                                               하늘과 구름이 다 얼비치는구나

                                               주인 양반 부끄럽다 말하지 마오

                                               나는 靑山(청산)이 물에

                                               거꾸로 비치는 게 더욱 좋다오

 



 

                             芝山房은 金炳淵(김병연)의 詩(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풍자와 조롱으로 세상을 외눈으로 보는 것이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심정이야 왜 모르랴!

                             그러나 위의 詩는 다르다.

                             세상을 떠돌다가 어느 가난한 집에 들러 멀건 죽을 대접받았다.

                             멀건 죽이나마 대접하는 그 마음이 얼마나 고마웠으랴!

                             金炳淵은 평소 그답지 않은 詩를 읊어 그 고마움을 표시한다.

                             이 詩는 아마도 金炳淵이기에 쓸 수 있었으리라.

                             가만히 음미하노라면 당시 정경이 떠올라 마음이 짠해지기까지 한다.

 

 

 

 

  金炳淵[김병연 : 1807년(순조 7)∼1863년(철종 14)]. 조선 시대의 방랑 시인.

  본관은 新安東(신안동). 자는 난고(蘭皐), 별호는 김삿갓 또는 김립(金笠). 양

  주 출생이다.

  宣川(선천) 부사였던 할아버지 金益淳(김익순)이 홍경래의 난 때 투항한 죄

  로 온 집안이 멸족을 당하였다. 노복 金聖洙(김성수)의 구원으로 형 金炳河

  (김병하)와 함께 황해도 谷山(곡산)으로 피신해 공부하였다. 후일 멸족에서

  폐족으로 사면되어 형제는 어머니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버지 金安根(김안근)은 홧병으로 죽었다. 모친은 자식들이 폐족자

  로 멸시받는 것이 싫어서 강원도 영월로 옮겨 숨기고 살았다. 이 사실을 모르

  는 김병연이 과거에 응시, "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논정가산충절

  사탄김익순죄통우천)"이라는 그의 할아버지 김익순을 조롱하는 시제로 장원

  급제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내력을 어머니에게서 듣고는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

  책과 폐족자에 대한 멸시 등으로 20세 무렵부터 처자식을 둔 채 방랑의 길에

  오른다.

  이 때부터 그는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고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은

  채 방랑 생활을 시작하였다. 금강산 유람을 시작으로 각지의 서당을 주로 순

  방하고, 4년 뒤에 일단 귀향하여 1년 남짓 묵었는데, 이때 둘째아들 金翼均(김

  익균)을 낳았다.
  또다시 고향을 떠나서 서울‧충청도‧경상도로 돌았으며, 陶山書院(도산서

  원) 아랫마을 서당에서 몇 해 훈장 노릇도 하였다. 다시 전라도‧충청도‧평

  안도를 거쳐 어릴 때 자라던 곡산의 김성수 아들집에서 1년 쯤 훈장 노릇을

  하였다.

  충청도 계룡산 밑에서, 찾아온 아들 김익균을 만나 재워놓고 도망쳤다가 1년

  만에 또 찾아온 그 아들과 경상도 어느 산촌에서 만났으나, 이번에는 심부름

  을 보내 놓고 또 도망쳤다. 3년 뒤 경상도 진주 땅에서 또다시 아들을 만나 귀

  향을 마음먹었다가 또 변심하여 이번에는 용변을 핑계로 도피하였다.
  57세 때 전라도 同福(동복) 땅에 쓰러져 있는 것을 어느 선비가 나귀에 태워

  자기 집으로 데려가 거기에서 반년 가까이 신세를 졌다. 그뒤 지리산을 두루

  살펴본 뒤, 3년 만에 쇠약한 몸으로 그 선비 집에 되돌아와 한많은 생애를 마

  쳤다.
  뒤에 김익균이 유해를 강원도 영월군 의풍면 태백산 기슭에 묻었다.

  그의 한시는 풍자와 해학을 담고 있어 戱畵的(희화적)으로 한시에 파격적 요

  인이 되었다.

  그 파격적인 양상을 한 예로 들어 보면,

 

  스무나무 아래 앉은 설운 나그네에

  망할 놈의 마을에선 쉰밥을 주더라
  인간에 이런 일이 어찌 있는가
  내 집에 돌아가 설은 밥을 먹느니만 못하다

  二十樹下三十客
  四十村中五十食
  人間豈有七十事
  不如歸家三十食

 

  전통적인 한시의 신성함 혹은 권위에 대한 도전, 그 양식 파괴 등에서 이러한

  파격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국문학사에서는 ‘김삿갓’으로 칭해지는 인물이 김병연 외에도 여럿 있었음을

  들어 김삿갓의 이러한 복수성은 당시 사회의 몰락 양반 계층의 편재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과거 제도의 문란으로 인하여 선비들의 시 창작기술은 이 같은 절망적

  파격과 조롱‧야유‧기지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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