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영은 《진초천자문(眞草千字文)》을 8백첩이나 써서 강동의 여러 사원에 나누어 주었다고 하는 만큼 여러 종의 천자문이 전해지고 있다.《선화서보(宣和書譜)》에 진초천자문칠이라고 기재 되어 있는 것으로도 짐작이 된다.
그 중에서 가장 오랜 것은 송나라 대관(大觀)3년(1109)에 설사창(薛嗣昌)이 모각한 관중본(關中本)이고 그밖의 명나라 말기에 유광양(劉光暘) 모각한 보묵헌본(寶墨軒本), 청대에 나언성(那彦成)이 모각한 용사기본(龍師起本)등이 지영천자문의 각본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가장 오래된양식을 구비하여 지영의 글씨로 보아 정당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관중본(關中本)이다.
관중본(關中本)은 매행 10자, 표제를 합쳐서 2백 2행이고, 권후(卷後)에 설사창(薛嗣昌)의 발문(跋文) 15행이 있다. 그 발문은 우선 지영이 글씨에 뛰어 나고, 항상 연습을 했다는 말을 한 다음,「장안(長安)의 최씨(崔氏)가 소장하는 진적(眞蹟)이 특히 우수하므로, 석공을 시켜서 모각하여 조사(漕司)의 남청(南廳)에 보존하기로 했다.
대관기축(大觀己丑) 2월 11일, 낙안(樂安) 설사창기(薛嗣昌記)」라고 써있다.
설사창(薛嗣昌)은 자(字)를 항종(亢宗)이라 하고, 설향(薛向)의 아들 설소팽(薛紹彭)의 아우 로서, 재주(梓州) 섬서(陝西) 전운부사(轉運副使)를 지냈다. 그러므로 조사(漕司)라고 한 것은 장안에 있었던 전운사(轉運使)의 관청(官廳)을 가리키는 것이다. 석각(石刻)은 그 발문 뒤에 「질방강모(姪方綱摹) 이수영(李壽永) 수명간(壽明刊)」이라는 10자가 새겨 있는 게 원석(原石) 이고, 번각(翻刻)에는 그게 없다고 한다. 그 각석은 삼석(三石)으로, 계8단(計8段)에 새겨져 있으며 , 현재 섬서성박물관(陝西省博物館)에 있다고 한다. 그 각석의 마지막에 명나라 홍무연간(洪武年間)의 발문이 있어, 영상관(迎祥觀)에 있었던 것을 횡궁(黌宮)으로 옮겼다는 말을 하고 있다. 섬서성박물관(陝西省博物館)은 옛날 비림(碑林)이고, 서안의 부학(府學)이므로, 명나라 초기부터 거기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관중본(關中本)은 율려(律呂)를 율소(律召)로 하고, 당조(唐朝)의 피휘자(避諱字)는 결필(缺筆)하고 있지 않다. 결체(結體)도 진적본(眞蹟本)과 매우 비슷하며, 다만 각본인 때문에 세치(細緻)한 봉선(鋒先)이 잘 나타나지 않고 약간 무딘 느낌을 준다. 청나라 옹방강(翁方綱)은 송나라 초기 사람이 쓴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격조가 높고 청경(淸勁)한 이 필치는 송대 사람이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지영의 진적의 직접적인 모륵(摹勒)은 아니라 하더라도, 역시 지영(智永)의 필적을 전사(轉寫)해서 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 천자문을 쓴 지영 智永 [진(陳)~수(隨)]선사에 대해서는,
중국 수(隋)나라의 서예가로서 왕희지(王羲之)의 7대손이며, 휘지(徽之)의 손자이다. 지영은 글씨를 빼어나게 잘썼으며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형 혜흔(惠欣)과 함께 불문(佛門)에 들어가 저장성[浙江省]의 왕희지 분묘 가까이에 있는 영흔사(永欣寺)에서 살았다.
선조의 유업을 계승할 일념으로 서예에 정진하여 영흔사에서 희지의 서체를 공부한 지 30년만에 해(楷) ․초(草)를 병서한 《진초천자문(眞草千字文)》 800여 권을 각 지방의 여러 절에 기증하였다 한다. 이것은 왕희지 서법의 전형(典型)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 밖의 작품에 여청재첩(餘淸齋帖)의 《귀전부(歸田賦)》가 있다.
진초천자문은 지영의 글씨로 표일하면서도 근엄하다. 당나라 초기대가들의 초서에서도 그 영향을 찾아볼 수 있으며 손과정의 서보도 같은 계보로 볼 수 있다.
이 귀중한 탁본의 가치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고심하다가 초서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게 해야겠다는 마음에서 해설문을 첨부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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