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송팔대가의 한사람인 송나라 <구양수의 취옹정기>를 명 4대 서예가의 한사람인 문징명이 쓴 서첩 출판물을 대만 고궁박물원 서예탐구여행에서 구입했습니다.
2014년 1월 11일부터 1월 15일까지 4박 5일의 대만고궁박물원 서예탐구여행을 다녀왔는데, 고궁박물원에서는 2014년도의 기획물로 명 4대 서예가들의 특별전을 열고 있었습니다.
그 중 문징명은 두번째 전시예정으로 2월 9일 부터 전시가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이 글의 제목인 <취옹정기>는 취옹이라는 호를 가진 구양수가 즐겨 찾던 정자의 이름으로 그가 저주태수로 있으면서 백성들과 함께 즐기면서 취옹이라는 아호에 담긴 내력을 담은 명문장입니다.
이 명필 명문장이 서예를 공부하는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올립니다.
<취옹정기>
醉翁亭記 (취옹정기)
環滁는 皆山也라. 其西南諸峰에 林壑
(환저는 개산야라 기서남제봉에 임학)
저주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모두 산이다.그 서남쪽의 여러 봉우리는
尤美하여 望之蔚然而深秀者는 瑯琊也라 山行六七
(우미하여 망지울연이심수자는 낭야야라 산행육칠)
숲과 골짜기가 특히 아름다운데, 바라보아 울창하게 깊고 수려한 곳이 바로 낭야산이다.
里에 漸聞水聲潺潺한데 而瀉出于兩峰之間者는
(리에 점문수성잔잔한데 이사출우양본지간자는)
산을 육칠리 걸어 올라가면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점차 들리는데 두 봉우리 사이로 쏟아져 나오는 것이
釀泉也라 峰回路轉에 有亭翼然하여 臨于泉上者는
(양천야라 봉회로전에 유정익연하여 임어천상자는)
바로 양천이다. 산봉우리를 돌아 굽이굽이 길을 오르면 날개를 펼친 듯한 정자가 샘가에 임해 있는데
醉翁亭也라 作亭者誰오 山之僧智仙也라 名之
(취옹정야라 작정자수오 산지승지선야라 명지)
바로 취옹정이다. 정자를 지은 사람은 누구인가? 산승 지선이다.
者誰오 太守自謂也라 太守與客으로 來飮于此할새 飮
(자수오 태수자위야라 태수여객으로 래음우차할새 음)
이름을 붙인 자는 누구인가? 태수가 스스로를 이름한 것이다. 태수는 빈객들과 더불어 이곳에 와서 술을 마셨는데,
少輒醉하고 而年又最高라 故로 自號曰醉翁也라 醉
(소첩취하고 이년우최고라 고로 자호왈취옹야라 취)
조금만 마셔도 곧 취하곤 하였으며 또 나이가 가장 많아서 스스로 호를 취옹이라 하였다.
翁之意는 不在酒요 在乎山水之間也라 山水之
(옹지의는 부재주요 재호산수지간야라 산수지)
취옹의 뜻은 술에 있지 않고 산수 간에 있다.
樂은 得之心而寓之酒也니라 若夫日出而林霏
(락은 득지심이 우지주야니라 약부일출이림비)
산수의 즐거움을 마음으로 얻어서 술을 빌어 표현한다는 것이다.해가 떠서 숲의 안개가 걷히고
開하고 雲歸而巖穴暝하여 晦明變化者는 山間之朝
(개하고 운귀이암혈명하여 회명변화자는 산간지조)
구름이 돌아와 덮여서 골짜기가 어둑해지니, 어두웠다 밝았다 하면서 변화하는 것이 산 속의 아침과 저녁 모습니다.
暮也요 野芳發而幽香하고 嘉木秀而繁陰하며 風
(모야요 야방발이유향하고 가목수이번음하며 풍)
들꽃이 피어 향기 그윽하고 좋은 나무가 수려하게 자라 그늘이 무성하고
霜高潔하고 水落而石出者는 山間之四時也니 朝而往하고
(상고결하고 수락이석출자는 산간지사시야니 조이왕하고)
바람이 높고 서리는 깨끗하며 물이 줄어 돌이 드러나는 것이 산 속의 사계절이다.아침이면 산으로 가고
暮而歸에 四時之景이 不同而樂亦無窮也라 至於負
(모이귀에 사시지경이 부동이락역무궁야라 지어부)
날이 저물면 돌아오는데, 사계절의 경치가 같지 않아서 즐거움 또한 무궁하다.
者는 歌于途하고 行者는 休于樹하며 前者呼하면 後者應하고 傴
(자는 가우도하고 행자는 휴우수하며 전자호하면 후자응하고 구)
짐을 진 자는 길에서 노래 부르고, 길 가던 자 나무 밑에서 쉬며, 앞서 가는 자가 부르면 뒤에 처진 자가 답하고
僂提携하여 往來而不絶者는 滁人遊也라 臨溪而
(루제휴하여 왕래이부절자는 저인유야라 임계이)
몸을 굽혀서 노인과 어린 아이의 손을 잡아 주며 오고 가는 것이 끊이지 않는 것은 저주의 사람들이 노니는 것이다.
漁하니 溪深而魚肥하고 釀泉爲酒하니 泉香而酒洌이라 山
(어하니 계심이어비하고 양천위주하니 천향이주열이라 산)
시냇가에서 고기를 잡는데 시내가 깊어서 고기가 살쪄 있고,양천의 물로 술을 만드는데 샘물이 차고 맑아서 술이 향기롭다.
肴野蔌이 雜然而前陳者는 太守宴也라 宴酣之樂은
(효야속이 잡연이전진자는 태수향야라 연감지락은)
산나물로 만든 안주와 푸성귀가 뒤섞여서 앞에 차려져 있는 것은 태수가 차린 잔치상이다.잔치가 무르익는 즐거움은
非絲非竹이라 射者中하고 奕者勝하며 觥籌交錯하여 起坐
(비사비죽이라 사자중하고 혁자승하며 굉주교착하여 기좌)
현악기와 관악기 때문이 아니다.화살을 던지려 하는 자는 맞히려 하고 바둑을 두는 자는 이기려 하며, 벌주잔과 산가지가 뒤섞여 있고
而諠譁者는 衆賓歡也라 蒼顔白髮이 頹乎其間
(이훤화자는 중빈환야라 창안백발이 퇴호기간)
일어서고 앉고 하며 떠들썩하니 이는 여러 빈객들이 즐겁기 때문이다. 노쇠한 얼굴에 백발을 한 노인이
者는 太守醉也라 已而夕陽在山하고 人影散亂은 太守
(자는 태수취야라 이이석양재산하고 인영산란은 태수)
그 가운데 쓰러져 있는데, 이는 태수가 취한 것이다. 얼마 후에 저녁해가 산에 걸리고 사람 그림자 어지러이 흩어지는데
歸而賓客從也요 樹林陰翳하여 鳴聲上下는 遊人去
(귀이빈객종야요 수림음예하여 명성상하는 유인거)
이는 태수가 돌아가고 빈객들이 그를 따르는 것이다.숲은 어둑해지고 새소리 위 아래에서 들리니 이는 노닐던 사람들이 떠나
而禽鳥樂也라 然而나 禽鳥知山林之樂이요 而不知
(이금조락야라 연이나 금조지산림지락이요 이부지)
새들이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새들이야 산림의 즐거움 만을 알 뿐 사람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고,
人知樂하고 人知從太守遊而樂이요 而不知太守之樂其
(인지락하고 인지종태수유이락이요 이부지태수지락기)
사람들이야 태수를 따라 놀고 즐거워하는 것만을 알 뿐 태수가 손님이 즐러워하는 것을 즐긴다는 것은 모른다.
樂也라 醉能同其樂하고 醒能述以文者는 太守也라
(낙야라 취능동기락하고 성능술이문자는 태수야라)
취하면 능히 그 즐거움을 같이 할 수 있고, 깨어나면 글로써 기술할 수 있는 자가 바로 태수이다.
太守謂誰오 廬陵歐陽修也니라
(태수위수오 여릉구양수야니라)
태수는 누구인가? 여릉사람 구양수이다.
嘉靖 十六年 春二月二又一日 書 徵明
가정 십육년 춘이월 이십 일일 서 징명
<작품해설>
이 글은 구양수(1007~1072)가 저주태수로 좌천되어 폄적생활을 하고 있던 시기(1046)에지은 것이다.
이 글이 나오자 견해의 독창성과 문체의 참신성 때문에 문인들이 서로 다투어 베끼었으며, 상인들도 이 글을 구하여 세관에 바치면 세금을 면할 정도였다고 한다.
구양수는 저주의 태수로 있으면서 낭야산의 계곡에 성심과 귀옹의 두 정자를 세웠다고 하는데 이 글은 그 중의 하나인 취옹정의 유래와 그곳의 경치, 그리고 자신의 생활과 정취를 기술한 것이다.
구양수의 문장은 간결하며, 객관적인 묘사에 뛰어난데 이 글 역시 간결하면서도 생동적인 구양수만의 특유한 멋이 엿보이는 명문이다.
이 명문을 명나라 서예가 문징명이 쓴 명필 작품이다.
<인물탐구>
구양수(1007~1072) ;
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중국 송나라 때 시와 글씨로 유명했던 인물이다. 중국 사천성(四川省) 면양(綿陽)이 그가 태어난 고향이지만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대부분은 호북성(湖北省) 수주(隨州)에서 보냈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4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문구(文具)를 살 돈이 없어서 어머니가 모래 위에 갈대로 글씨를 써서 가르쳤다고 한다. 10세 때 당나라 한유(韓愈)의 전집을 읽은 것을 계기로 문학의 길로 들어선 계기가 되었으며 후일 그의 영향으로 시문혁신론(詩文革新論)을 주장하였다. 그가 주장한 시문혁신론은 어려운 문체로 문장의 화려함을 추구하지 말고 일상에서 사용하는 쉬운 문체로 시작(詩作)을 하자는 것이었다.
몇차례 과거시험에 낙방하였고 한림학사였던 서언(胥偃)을 찾아가 그의 문하생이 되었다. 1030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서언의 둘째딸과 혼인하였다. 첫 임지인 낙양(落陽)은 문학적인 정취가 높은 곳으로 구양수는 이곳에서 문인들과 어울리며 술과 여자 그리고 시를 즐기는 호방한 기질을 보여주었다. 1033년 아내가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1034년 양씨와 재혼하였다. 하지만 1036년 양씨마저 곧 사망하는 불행을 겪었고 설씨와 다시 혼인하였다. 한림원학사(翰林院學士) ·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의 관직을 거쳐 태자소사(太子少師)가 되었다. 인종(仁宗)과 영종(英宗) 때 범중엄(范仲淹)과 한기(韓琦)를 중심으로 한 새 관료파에 속하여 부정부패와 무능한 관료사회를 일신하는데 활약하였다. 특히 붕당론(朋黨論)을 주장하여 군자는 군자와 더불어 모이며, 소인배는 소인배와 더불어 모이는 것은 자연의 이치와 같다고 역설했다. 1058년 과거시험을 관장하는 지예부공거(知禮部貢擧)로 임명되어 자신의 소신이었던 시문혁신론을 바탕으로 과거의 유형을 개편하였다. 이때 과거에 지원한 증공(曾鞏)과 소식(蘇軾=소동파 蘇東坡)과 소철(蘇轍)이 합격하였다. 그에 앞서 소식의 부친인 소순(蘇洵)을 천거하여 등용한 일화는 유명하며 이들은 모두 구양수의 제자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 속하는 인물로 평가되었다. 1067년 신종(神宗) 때 동향후배인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당시 신법은 왕권의 강화와 부국강병을 위한 것으로 백성들에게는 더욱 힘겨운 정책이었다.
구양수는 다방면에 관심과 흥미를 가졌는데 바둑에도 상당한 수준이었으며 특히 서예(書藝)에 조예가 깊어 '구양수체'라느 서체가 있을 만큼 뛰어났다. 송나라 초기의 미문조(美文調) 시문인 서곤체(西崑體)를 개혁하고, 당나라의 한유를 모범으로 하는 시문을 지었다. 그의 문장과 시는 대중적인 인기가 높았으며 후대에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시로는 매요신(梅堯臣)과 겨루었고, 문(文)으로는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었으며, 후배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송대의 고문(古文)의 위치를 확고부동한 것으로 만들었으며, 전집으로 《구양문충공집》 153권이 있다. 《신당서(新唐書)》 《오대사기(五代史記)》의 편자이기도 하며, 《오대사령관전지서(五代史伶官傳之序)》를 비롯하여 많은 명문을 남겼다.
<인물탐구>
문징명 (1470~1559) ;
태어난 때 | 14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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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곳 | 중국 후난 성[湖南省] 헝양[衡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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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때 | 15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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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국가 | 중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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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국가 부속정보 | 명(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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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서예가·화가·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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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 Wen Zhengming (웨) Wen Chengming. 1470 중국 후난 성[湖南省] 헝양[衡陽]~ 1559.
중국 명(明)나라 때의 화가·서예가·학자.
본명은 문벽(文璧). 스승인 심주(沈周)와 함께 중국에서 존경받는 문인화가들의 유파인 오파(吳派)의 중심인물로 여겨진다.
강한 유교적 가풍을 지닌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을 많이 만났다. 천성적으로 민감하고 내성적이어서 53세 때인 1523년에야 비로소 학구적인 은둔생활을 버리고 세상에 나와, 조정의 인정을 받고 한림원(翰林院) 대조(待詔)로 임명되었다. 한림원에서 3년을 지낸 뒤 은퇴하여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을 남겼다. 그는 4가지 주요서체인 전서(篆書)·해서(楷書)·예서(隸書)·초서(草書)에 모두 능했다. 또한 미술품, 특히 서예작품 수집가·감정가로도 유명했다. 송대(宋代:960~1279)와 오대(五代:907~960)에 활동했던 옛날 화가들뿐 아니라 원대(元代:1271~1368)의 위대한 문인화가들도 존경했다. 하나의 화풍을 추구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그림에는 전반적으로 고인(古人)들의 화풍연구와 심사숙고의 정신이 담겨 있다. 그의 그림은 기법이 다양하여 세부를 꼼꼼히 묘사한 것이 있는가 하면 자유롭게 채색한 것도 있다. 제자로는 아들인 문가(文嘉:1501~83)와 조카인 문백인(文伯仁:1502~75) 등이 있으며, 대표작으로 〈춘심고수도 春深高樹圖〉·〈산우도 山雨圖〉·〈진상재도 眞賞齋圖〉 등이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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