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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감상

즐거운 편지 - 황동규

by 권석낙 2025. 5. 5.

 

 

즐거운 편지 -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황동규(黃東奎) : 1938년 4월 9일 평남 영유군 숙천 출생. 아버지가 소설가 황순원.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 영국 에든버러대학교에서 수학. 195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어떤 개인 날』(중앙문화사, 1961) 『비가』(1965/ 재판, 문학동네, 2004), 연작 시집 『풍장』(문학과지성사, 1999),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문학과지성사, 1994) 『몰운대행』(문학과지성사, 1991) 『미시령 큰바람』(문학과지성사, 1993) 『악어를 조심하라고?』(문학과지성사, 1995) 『외계인』(문학과지성사, 1997)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문학과지성사, 2000)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문학과지성사, 2003) 『꽃의 고요』(문학과지성사, 2006) 『겨울밤 0시 5분』(현대문학, 2009/ 복간, 문학과지성사, 2015) 『사는 기쁨』(문학과지성사, 2013) 『연옥의 봄』(문학과지성사, 2016) 『오늘 하루만이라도』(문학과지성사, 2020) 『봄비를 맞다』(문학과지성사, 2024) 등과, 시선집 『열하일기』(지식산업사, 1982) 『三南에 내리는 눈』(민음사, 1975) 『삶을 살아낸다는 건』(Human&Books, 2010) 외에 『황동규 시전집 1ㆍ2』(문학과지성사, 1998) 등 다수가 있다. 옮긴 책으로 바이런의 『순례』, 예이츠의 『1916년 부활절』, T. S. 엘리엇의 『황무지』 등이 있다. 서울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를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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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일에도 요령과 기술이 필요합니다. 먼저 위치 선정이 중요합니다. 고르고 평평한 바닥이 제격입니다. 시야가 확 트여 멀리까지 보이면 더욱 좋습니다. 기다림의 자세는 간결할수록 좋습니다. 그러니 까치발을 들고 있거나 제자리걸음을 하듯 서성이거나 지나치게 주변을 두리번거려서는 안 됩니다. 쉽사리 힘이 빠지기 때문입니다. 절대 오랜 시간을 견딜 수 없습니다. 느긋하지만 늘어지지 않고 편안하지만 흐트러짐 없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 결국 스스로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야 합니다. 진정한 기다림은 그때에야 비로소 끝이 납니다.

 

*박준 시인 / 중앙SUNDAY 2024. 10. 12.

 

황동규 시인은 올해로 등단 50주년을 맞는다. 반 세기 동안이나 그는 우리말을 정갈하게 빚었고 우리말의 숨결을 세세하게 보살펴 고아(高雅)하게 했다. 놀랍게도 '즐거운 편지'는 황동규 시인이 1958년 '현대문학'에 발표한 그의 데뷔작이다. 영화 '기쁜 우리 젊은 날'과 '편지' 등에서 낭송되어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이 시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의 원 제목도 '즐거운 편지'였다고 한다. 이제 이 시는 한국인의 애송시가 되었다. 만남과 이별의 회전 속도가 이처럼 빠른 시대에 이 시는 왜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가. 왜 여전히 막막하게 하는가. 헤어져 돌아가던 옛사랑의 뒷모습을 보게 하는가.

 

하늘이 먹먹하게 어두워지고 주먹눈이 막 내리는 날이면 어디 먼 산골이나 바닷가 민박집에라도 가고 싶어진다. 작은 넝쿨에 말라붙는 붉은 열매 같은 눈빛을 하고서 눈이 내리는 그 시간을 살고 싶어진다. 눈이 그치면 순백의 설원과 설원 위를 유행(遊行)하는 바람의 노래를 듣고 싶어진다. 그리고 멀리 두고 온 사람을 '가까스로' 떠올릴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적막한 시간에 나를 선택하지 않은 사랑을 떠올리는 일은 아주 사소한 일이 될 것이다.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이 될 것이다. 너무 사소하여서 손을 놓고 아무 일도 하지 못할 것이다. 너무 사소하여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그렇게 이 세상에서 잊혀진 듯 살 것이다. 폭설에 갇힌 순한 산짐승처럼 우는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그대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건넨 이별의 말은 나의 가슴에서 깨끗하게 씻어낼 것이다. 겨울 하늘에 뜬 달이 천강(千江)을 비추어도 그대는 나를 생각하지 말라. 그대가 나의 사랑을 다시 받아 안는 날이 와도 내가 아직 저 산골짜기 깊은 산막에서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하는 그런 아주 짧은 후일에도 그대는 나를 생각하지 말라.

 

*문태준 시인 / 조선일보 2008.01.04.

 

1연에서 화자는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 대신 그대를 생각한다는 말을 선택했다. 그대가 사소하게 여기는 나의 마음이니 감히 사랑한다는 말을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자인 ‘나’는 ‘그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데, 그대의 입장에서 보면 내 사랑은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 내가 그대를 사랑한다고 해서 지던 해가 다시 뜨거나 바람이 거꾸로 부는 일은 없다.

그래서 그 ‘사소함’을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이라는 평범한 자연현상에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그 자연현상은 늘 대하는 것이어서 대수롭지 않아 보이지만 사실은 사소한 것이 아니다.

그런 자연의 흐름 때문에 우리가 숨 쉬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표현 속에는 당신이 사소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상당히 중요한 것이라는 반어적 의미가 이미 담겨 있다.

 

사람이 세상을 사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살다 보면 매우 큰 시련에 봉착하여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 “가 있다. 그럴 때에는 누군가의 도움이나 위로가 필요한 법이다.

사랑하는 그대가 바로 그런 시련에 부딪쳐 괴로움을 겪는 상황을 설정해 보았다. 누구도 도움의 손길을 주지 않는 절망적 상황을 ‘한없이’라는 말로 나타냈다.

그런 상황이온다면 나는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그대를 부를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오랫동안 전해 오던 사소함’이란 말이 중요하다. 아무리 당신이 나를 사소한 존재로 여기고 내 마음을 무시한다 해도 자신의 사랑은 변함없이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는 의미를 나타낸 것이다.

후반부의 다짐은 자신의 사랑이 사소한 것이 아니라 소중한 것이라는 의미를 드러낸다. 그러나 화자의 표면적인 어법은 여전히 자신의 사랑을 ‘사소함’이라고 반어적으로 말한 데 이 시의 특색이 있다.

 

2연에서는 자신의 사랑을 ‘한없는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렸다고 말한다. 바로 그렇기때문에 그대를 진실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그 내적인 논리를 이해해야이 시의 핵심에 도달할 수 있다. 화자는 앞에서 한 말을 부정하듯 말을 바꾸는데 겉으로 드러난 말 속에 담긴 진실을 제대로 포착해야 한다.

자신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렸다고 말한 화자는 다시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

칠 것을 믿는다 “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말 바꿈의 의미는 무엇일까? 화자는 골짜기에 퍼붓는 눈을 보면서 아무리 엄청나게 퍼붓는 눈도 아침이면 그치듯 내 사랑도 언젠가는 그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엄격히 따져 보면 모든 인간의 사랑은 언젠가는 끝장나게 되어 있다. 영원한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언젠가는 사랑이 끝나겠지만 사랑이 끝날 때까지 얼마나 진실하게 기다렸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여기서 말한 “기다림의 자세“란 바로 그런 사랑의 자세를 의미한다.

 

그다음 대목에 시인의 반어적 어법이 다시 빛을 발한다. 후반부에 나오는 ‘그 때’, ‘그 동안에’라는 말에 주목하기 바란다. ‘그 때’는 사랑이 그치는 시점을 말하며 ‘그 동안 에’는 사랑이 그칠 때까지의 과정을 뜻한다.

사랑이 끝나게 될 때까지 “눈이 그치고 꽃 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고 하였으니 이것은 사랑이 끝날때까지 무수한 시간이 흘러갈 것임을 말한 것이다. 두 개의 믿음이 여기서 충돌한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이라는 믿음과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것“이라는 믿음이다. 그 둘의 충돌 속에 ‘반드시 그칠 것’이라는 말은 ‘결코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역전이 일어난다. 이것은 1연에서 ‘사소함’이 ‘소중함’으로 역전된 것과 유사한 것이다. 황동규는 전통적인 연애시의 어법을 깨뜨리고 독특한 아이러니의 어법을 채용함으로써 새로운 사랑 노래를 창조한 것이다.

 

요컨대 이 작품에 일관되게 흐르는 주제는 사랑의 불변성, 영원성에 대한 호소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영원한 사랑을 호소하는 것은, 설사 상대방이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이다. 그러한 마음을 전하는 편지니 ‘즐거운 편지’가 아니겠는가.

 

*이숭원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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