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한참을 망설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가란다고 그대로 내려갈 수는 없었다.
불교를 가르치지 않겠다면……. 그렇다, 나는 참선에 관심이 있어 성철스님을 찾아온 것이다.
성철스님은 평생 참선으로 일관해온 선승이 아닌가. 다시 간청했다.
"큰스님, 불교에 대해 배우는 것은 그렇다 치고 저는 본디 참선 공부를 하고 싶어했습니다.
큰스님께서 제가 참선할 수 있게 화두를 주셨으면 합니더."
순간, 큰스님 얼굴 표정이 확 변했다. 지금까지 무뚝뚝하던 모습은 어디론지 사라지고,
호상(虎相)의 굵은 주름이 확 펴진다.
"참선하고 싶다 했나? 오냐 그래, 그라문 내가 참선하도록 화두를 줄게. 나따라 오이라."
성철스님은 말을 마치자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간다. 엉겁결에 따라 들어가 절을 세 번 했다.
신도들은 스님에게 절을 세 번 올리는 것이 절집의 인사법이다. 스님이 내린 화두는
'삼서근(麻三斤)'이었다. 예상치 않았던 자세한 설명에 당부까지 덧붙이셨다.
"'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 삼서근이니라.' 무슨 말인고 하니, 부처님을 물었는데 어째서
삼서근이라 했는고, 이것이 삼서근 화두다. 염불하듯이 입으로만 오물거리지 말고
'어째서 삼서근이라 했는가' 하는 의심을 놓지 말도록 해라."
뜻밖의 자상함에 어찌나 고맙고 감사한지,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열심히 하겠습니더" 하고
다짐에 다짐을 더했다. 백련암을 내려오면서도 큰스님에 대한 고마움이 마음속에 가득했다.
그런데 막상 화두를 드는 수행에 들어가려고 하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흔히 화두를 붙잡고
참선하는 것을 '화두를 든다'라고 하는데, 들고 앉으면 끊임없이 잡념이 일어났다. 화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런 저런 헛생각들만 쉼 없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본래 화두란 선(禪)을 수행하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주고받는 문답 가운데 하나를 말한다.
흔히 스승이 제자에게 참선 공부거리로 던지는 '문제'가 화두다. 선불교 전통에선 1,000여 년
간 큰스님들이 던진 대표적 질문들을 모아 공안(公案)이라고 통칭한다. 공안이 곧 화두인
셈인데, 대표적인 것이 1,700가지다. '이뭐꼬?' 나 '무(無)'가 우리나라 선승들이 가장 많이
붙잡는 화두들이다.
스승이 던진 화두를 들고 참선하다 그 물음의 답을 얻는 것이 곧 깨달음인데, 흔히 이러한
깨달음을 얻는 것을 '화두를 타파한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팔만대장경을 다 뒤져도
그 안에 화두의 정답이 없다는 점이다. 오로지 의문에 또 의문을 가짐으로써 마침내 그 뜻을
깨우치게 되고, 그 뜻을 분명히 깊이 깨치면 견성성불(見性成佛 본성을 바로 보아 깨달음을
얻음)해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성철스님이 준 삼서근 화두를 들고 낑낑거리며 세월을 보냈다. 아무런 진척도 느껴지지 않아
나중에는 왼손 엄지손톱과 오른손 엄지손톱 사이에 향을 끼워 태우는 고행을 시도해보았다.
고통 속에서 정신이 번쩍 드는 그 순간이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엄지손톱이
노랗게 타들어가는 고통이 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공부에는 별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그런 과정 속에서 조금씩 느낄 수 있었다. 화두 타파를 위해 선방에 앉아 수행하는 스님들의
공덕이 함부로 미칠 수 있는 가벼운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피상적 생각으로는 도저히 헤아리기
힘든 곳이란 것을.
'참선한답시고 괜히 큰스님한테 화두 얻어 생고생하는 것 아닌가?' 하는 푸념이 절로 나왔지만,
그래도 화두가 달아나면 돌이켜 보고, 다시 달아나면 또 돌이켜보기를 끊임없이 되풀이했다.
화두 공부만이 진리에 도달하는 지름길이라는 다짐에 내가 아는 불교 지식을 총동원해 가며
매진했다. 그렇게 1971년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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