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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감상

김용택 시인

by 권석낙 2019. 9. 29.

















[ESSAY]
내 인생의 길가에 강이 있었다

김용택 시인



"봄날 섬진강은 꽃의 강이 된다.
농부와 아이들이 사는 작은 마을은 사랑이었고 눈물, 기쁨이었다.
그게 내 시가 됐다.
섬진강에 꽃이 피었고 꽃잎이 강물에 흩날린다.
그 강물위의 꽃잎이 세상을 향한 내 사랑입니다"



김용택 시인

섬진강에 꽃이 피었다. 봄날의 섬진강은 꽃의 강이 된다. 섬진강 매화는 섬진강의 오래된 전통처럼 이제 고전(?)이 되었다. 매화 꽃잎이 날리는 강물을 상상하는 일은 사람의 마음을 한껏 설레게 한다. 꼭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다. 무엇인가 누군가가 나타나 꽃구경 가자고 손을 잡을 것 같다.

매화꽃이 만발한 섬진강은 내가 사는 곳이 아니다. 나는 섬진강의 상류 쪽에 산다. 산이 사방으로 삥 둘러싸고 있는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이다. 소설가 김훈은 우리 동네를 소쿠리 속 같다고 했다. 한줄기 여린 물줄기가 산과 산 사이를 뚫고 돌아와 산굽이를 뚫고 돌아 흘러간다.

그 수줍은 강 언덕에 내가 사는 작은 마을이 있다. 한때는 서른 가구가 훨씬 넘었으나 지금은 열다섯 가구 정도가 적막하게 산다. 나는 이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40분쯤 걸어가면 회문산 아래 자리 잡은 덕치초등학교에 다녔다.

입학 당시가 6·25 전쟁 후였으니, 교실이 제대로 있을 리 없었다. 운동장 가에 있는 벚나무에 흑판을 달아놓고 공부를 했다. 비가 오면 공부 시간에도 집으로 달려가야 했다. 내가 2학년쯤에 교실이 지어졌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이웃 순창에서 다녔다. 졸업 후 야심차게 오리를 키웠지만, 일 년 만에 망했다. 무작정 상경했으나 서울에 발붙이지 못하고 낙향했고, 우연히 친구들을 따라 교사 양성 시험에 붙어 덕치초등학교 선생이 되었다. 평생을 덕치초등학교에서 '근무!' 하다시피 하고 2008년 퇴임했다.

내가 덕치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처음 보았던 살구나무 한 그루는 다 살아 베어졌다. 살구나무가 있던 자리가 텅 빈 것처럼 나도 그 학교에서 물러났다. 나는 평생 살구꽃 잎 날리는 살구나무 아래에서 살구나무가 일러준 글을 받아쓰며 살았다. 그 살구나무가 늙어가자 나는 살구나무 주위에 새로 난 어린 살구나무들을 가꾸었다. 지금도 봄이 되면 아이들 아름으로 한 아름씩 자란 살구나무에 꽃이 피어 운동장에 날린다.

자동차가 일상화되기 전까지 나는 강길과 마을길과 논두렁길을 걸어 다녔다. 강물을 거슬러 학교에 가고 강물을 따라 집으로 왔다.

꽃이 피고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소들이 들을 갈아엎어 농부들이 노래 부르며 모를 심고 벼가 누렇게 익어갔다. 들길을 가다 모내기를 하면 논두렁에 앉아 못밥을 먹었다. 겨울비가 와서 징검다리가 넘으면 신발을 벗어들고 언 징검다리를 밝으며 동동거렸고, 무를 뽑아 먹다가 어른들에게 혼이 나고, 선생이 되어 아이들과 또 그렇게 강길·들길·마을길을 걸어 다녔다. 아! 평생 나는 그렇게 작은 마을의 작은 학교로 오가며 산·강·들과 그곳에 느리고 더디게 사는 사람들 속에서 살았다.

나는 주로 2학년을 가르치며 살았다. 아이들의 세계는 꿈이 있다. 꿈이 있다는 것은 정직과 진실이 통한다는 말이다. 나는 그 속에서 평생을 진심으로 살고자 했다. 정직과 진실이 통하는 사회는 인간성이 살아 있는 사회고, 꿈과 희망이 있는 세상이다. 아이들은 늘 우리가 사는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는 신비함을 가지고 있다. 신비함을 잃어버린 세상은 꿈이 없는 세상이다. 아이들은 세상이 늘 신기한 것이다. 세상이 신기하니, 일상에 진지하고 진지하니 진정성이 있다.

가난한 농부들의 몸짓을 보며 나는 살았다. 농부들은 삶이 자연이었다. 농부들은 위대한 시인이었고 철학자였으며 화가였으며 생태학자였다. 그들은 자기를 살리고 세상을 살려내는 힘을 갖고 있었다. 나는 세상을 늘 눈부셔하는 풀잎 같은 아이들 속에서 살며 바람결같이, 햇살같이 세상을 자세히 더듬는 눈을 얻었다. 나는 그들을 따랐다. 아이들은 내 인생의 선생이었다.

나는 그들의 몸짓과 마음을, 그 장엄한 자연을 한 곳에 모아갔다. 농부와 아이들과 내가 사는 작은 마을은 내 학교였으며 내 책이었으며 내 공책이었고 연필이었다. 사랑이었으며 눈물이었고 기쁨이었으며 아픔이었다. 그게 내 시가 되었다. 내 인생이 되었다. 내 '평생!'이 되었다.

그 작은 마을 속에서 나의 몸짓들은 시대의 격정이 되고 풍랑이 되었다. 친구 하나 없는 적막한 산천 앞에 나는 쭈그려 앉아 달빛에 부서지는 물소리를 따르며 울먹였다. 풀씨들이 달라붙는 강변을 홀로 헤매며 나는 사랑에 목이 말랐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나는 강물을 부여잡고 시를 썼다. 강이 강으로 산이 산으로 소쩍새 소리가 소쩍새 소리로 들렸다. 산도 한 30년쯤 바라보아야 산이고, 흐르는 강물을 따라 한 40년쯤 걸어야 강물이 됨을 알았다. 내가 시인이 되기 전에도 그 강이 거기 흐르고 있었고 그 강가에 살았듯이 내가 시인이 되어서도 그 강이 거기 흐르고 그 강가에 나는 있었다. 오! 내 인생의 길가를 걸으면 강물은 내 핏줄로 이어져 내 몸속을 뜨겁게 흘러다녔다.

섬진강에 꽃이 피었고, 강물에 꽃그늘이 드리워지고 꽃잎이 강물에 흩날린다. 사람들아! 그 강물 위의 꽃잎이 세상을 향한 내 사랑인 줄 알 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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