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허씨 가문 여덟살 여자 신동, 허난설헌
- 허난설헌은 어떻게 그런 시대에 천재시인이 될 수 있었을까?
<허난설헌 생가터>
허난설헌은
조선 중기 시인으로
1563년(명종 18) 강원 강릉에서 태어나 1589년(선조 22) 27세의 짧은 생애를 마감한다.
본관은 양천(陽川).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이다.
아버지 초당 허엽은첫째 부인 청주 한씨에게서 허성을,
둘째 부인 강릉 김씨에게서 허봉과 허난설헌, 허균을 얻는데
이들은 모두 문장이 뛰어나 당대에 '허씨 5문장가'로 불린다.
당시 조선 사회는
왕실의 공주에게도 한글 외의 글을 가르치지 않는 시대였다.
여성의 미덕은 오직 부덕이었다.
그러나 허엽은 교육에 있어서 아들과 딸의 구분을 두지 않았고
그 덕에 허난설헌은 오빠인 허봉과 남동생 허균과 함께 학문을 익혔고
특별한 교육 덕으로 천재시인의 재량을 닦으며 자라난다.
12살위의 오빠 허봉은
과거에 합격하여 중국에 사신으로 오가며,
두보 등 중국의 유명한 시인들의 책을 구해와 난설헌에게 시를 익히게 했으며
나아가 친구 손곡 이달(李達, 1539~1612)을 그녀의 개인 스승으로 모셔주었다.
이달(李達)은
서얼 출신으로
일찌기 과거를 포기하고 시에만 매진 하였으며
최경창, 백광훈과 더불어 '3당(唐) 시인'으로 불리었다.
여덟 살 나이의 허난설헌은
신선의 세계를 노래한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짓었는데
1605년 당대 최고 명필인 한석봉의 글씨로 전하며
이 시를 읽은 명나라의 유명한 문인 조문기(趙文奇)는 극찬한다.
허난설헌은 그림에도 뛰어났다.
<앙간비금도(仰看飛禽圖)>는
집앞에서 아버지와 어린 딸이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힘이 넘치는 필체와 더불어
조선 회화사에 소녀가 그림속에 등장하는 예는 드물었다.
"이웃집 친구들과 그네뛰기 시합을 했어요(隣家女佯競革秋韆)
띠를 매고 수건 두르니 마치 선녀가 된 것 같았지요 (結帶蟠巾學半仙)
바람차며 오색 그넷줄 하늘로 날아오르자 (風送綵繩天上去)
노리개 소리 댕그랑 울리고 푸른 버드나무엔 아지랑이 피어났지요 (佩聲時落綠楊煙)"
"허난설헌 8세에 시를 지었는데 가히 천재적이어서, 믿기 어렵다." - (허균)
"난설헌의 재주는 배워서 그렇게 될 수가 없다.
이태백과 이장길에게서 물려받은 소리다." - (허봉)
- 허균, <학산초담>에서
2. 천재로 태어나 ‘조선의 여인’으로 살아야 하는 삶.
- 결혼 이후 허난설헌의 삶은 어떠했을까?
조선 중기.
남자가 혼인과 함께 신부 집에서 생활하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이 일반적인 풍습이었다.
그러나 16세기로 접어 들면서 성리학 통치 이념은
혼례를 비롯한 일상 생활까지 중국화를 장려하였고,
왕실에서부터 양반 사대부에게로
혼인 후 신부가 바로 시댁에 들어가 생활하는 풍습인
친영 제도(親迎制度)를 보급하고 있었다.
허난설헌은 명문가 자녀로 시집살이(친영 제도)의 첫 세대가 되었다.
개방적이고 남녀 차별이 없는 집안에서
자신의 재주를 인정받으며 꿈을 키워간 허난설헌은
혼인과 동시에 정든 친정을 떠나
각종 제사와 집안 행사를 도맡고 시어른을 모시는
고된 종부의 삶을 살아야 했다.
이른바 ‘조선의 여성’으로서의 삶은 그녀의 재능을 가두기 시작한다.
그녀의 남편 김성립은
5대째 과거 문과 급제를 한 안동 김씨 명문가 자제로
할아버지 김홍도는 영의정을,
아버지 김첨은 도승지와 이조전랑을 지녔으나
김성립은
허난설헌이 죽고 난 이듬해인 1589년 (선조22년)에야
별시문과에 합격해 정8~9품에 오른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명성에 크게 못미치는 하급관직이었다.
결혼초 허난설헌은 남편에 대한 기대와 사랑이 있었다.
"곱게 다듬은 황금으로(精金疑寶氣)
만든 반달 노리개는 (鏤作半月光)
시집올 때 시부모님이 주신 거라서 (嫁時휴姑贈)
다홍치마에 달아 두었지요 (繫在紅羅裳)
오늘 길 떠나가시는 님에게 드리오니 (今日贈君行)
먼 길에 정표로 달아 주세요 (願君爲雜佩)
길가에 버리셔도 아깝지 않지만 (불惜棄道上)
새 여인에게는 달아주지 마세요 (莫結新人帶)"
그러나 결혼 생활은 원만하지 않았다.
남편 김성립은 가정생활에 성실치 않았고
과거 준비를 한다며 자주 집을 비우고 접(接)에 들어가 생활하였다.
거듭 낙방하면서 공부를 멀리 했고 기방도 드나들었다.
아내의 뛰어난 문장력과 학문에 열등감을 느끼며 부부 사이는 더 소원해진다.
허난설헌은 두아이 키우는 낙과 시로써 외로움 달랬다.
당시 여자가 글 쓴다는 자체가 올바르지 못한 행실이었다.
시어머니는 시 쓰는 며느리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나의 누님은 어질고 문장이 좋았는데
시어머니께 인정받지 못하였다
늘 누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나 아프다"
- 허균 <성소부부고(惺所覆부藁)>
그녀의 시에는 시대에 대한 저항, 불평등하고 왜곡된 현실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양반 명문가에서 자란 그녀가
그러한 의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스승 손곡 이달의 영향인 듯 싶다.
"양반가의 세도가 불길처럼 성하던 날 (東家勢炎火)
높은 다락에서 풍악소리 울렸지만 (高樓歌管起)
가난한 이웃들은 헐벗고 굶주려 (北隣貧無衣)
주린 배를 안고 오두막에 쓰러졌네 (효腹蓬門裏)
어느 날 아침 높은 권세 기울면 (一朝高樓傾)
오히려 북쪽 이웃을 부러워하리니 (反--北隣子)
흥하고 망하는 것은 바뀌어도 (盛衰各遞代)
하늘의 도리를 벗어나지는 못한다오. (難可逃天理)"
허난설헌의 시에는 가난하고 억압 받던 여성의 삶, 고된 노동을 주제로 한 것도 있다.
그녀는 여성과 빈자의 고통이 같은 것이라 보았다.
"밤늦도록 쉬지 않고 베를 짜노라니 (夜久織未休)
베틀 소리만 삐걱삐걱 차갑게 울리는데 (알알鳴寒機)
베틀에 짜여진 베 한필 (機中一匹練)
결국 누구의 옷이 되는가 (終作阿誰衣)
손에 가위쥐고 마름질하니 (手把金--刀)
밤이 차가워 열 손가락 곱아온다 (夜寒十指直)
남을 위해 혼례복을 짓고 있지만 (爲人作嫁衣)
나는 여전히 홀로 살고 있다오 (年年還獨宿)"
3. 스물 일곱 꽃다운 나이로 세상에 지다!
-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시인.
불행은 계속 되었다.
1580년 허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이
경상도 관찰사에서 물러나 한성으로 오던 중 상주에서 객사하고
질병으로
연이어
그녀의 두 아이들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그녀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준 오빠 허봉마저
거듭된 정치적 실패로 술로 세월 보내다가
1588 강원도 김화 근처에서 객사한다.
감당키 어려운 고통 앞에
26세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예언한 시를 한편 남기고
그 예언처럼 스물일곱 나이에 눈을 감는다.
"푸른 바다가 옥구슬 바다를 적시고 (碧海浸瑤海)
푸른 난새는 오색 난새와 어울리네. (靑鸞倚彩 鸞)
아리따운 부용꽃 스물일곱송이 (芙蓉三九朶)
붉게 떨어지니 서릿 달이가 차갑구나. (紅墮月霜寒) "
- <몽유광상산시 (夢遊廣桑山詩)>
"지난해엔 사랑하는 딸을 잃고 (去年喪愛女)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었구나 (今年喪愛子)
슬프고 슬픈 광릉땅에 (哀哀廣陵土)
두 무덤 나란히 마주하고 있구나 (雙墳相對起)
가엾은 너희 형제 넋은 (應知弟兄魂)
밤마다 서로 만나 놀고 있으려나 (夜夜相追遊)
하염없이 슬픈 노래 부르며 (浪吟黃臺詞)
슬픈 피눈물만 속으로 삼키누나 (血泣悲呑聲) "
4. 동생 허균에 의해 다시 살아난 누이의 시(詩)
- <조선시선(朝鮮詩選)>, 중국에서 꽃피워 최초의 한류(韓流)가 된다!
스물일곱의 나이에 세상을 뜬 허난설헌.
그녀는 죽기 전 자신의 시를 모두 태워 달라고 한다.
그러나 동생 허균은 이를 안타까워하며
친정에 남아 있는 누이의 시와 자신이 외우고 있던 시를 모아 책으로 엮는다.
그런 허균의 노력으로 인해 그녀의 시는 후세까지 전해지게 된다.
그후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당시 명나라 지원병과 함께 조선에 온
시인 오명제는 조선의 시와 문장을 구하는데,
명나라 사신 접대를 맡은 허균은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누이의 시 200여 편을 전하고
오명제를 통해 난설헌의 시는 중국으로 건너간다.
허난설헌의 시는
명나라에서 <조선시선(朝鮮詩選)>을 비롯해
<고금여사(古今女史)>, <열조시집(列朝詩集)>, <명시종(明詩綜)>,
<긍사(亘史)>, <양조평양록(兩朝平攘錄)>, <이담(耳譚)>, <명원시귀(名媛詩歸)> 등 여러 서적에 소개되고,
1700년대 일본에서도 간행되어 애독된다.
"내가 북경으로 돌아오자
문인들이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조선 시와 허난설헌의 신선시를 구하고 싶어 했다"
- 오명제, <조선시선 서문>
"그녀의 백옥루상량문은 8세에 지은 것인데
만약 하늘이 내린 재능이 아니라면 어떻게 지어낼 수 있겠는가"
- <긍사(亘史)>
"명말에는 여성시가 유행했습니다.
많은 여성 시인과 시집 등장했는데,
한국 여성시인 있다는 것 알았고,
그 수준이 높다는 것을 알았는데 바로 허난설헌입니다."
- 중앙민족대학 치칭푸교수
5. 그러나 성리학에 빠져 사는 조선 선비들은
그녀의 시에 관해 냉혹한 평가만을 남기는데....
- "규중여인 시를 짓는다는 것이 원래부터 좋은 일이 아니다.." - 연암 박지원
"가을 호수 맑고 푸른 물 구슬 같아(秋淨長湖碧玉流)
연꽃 핀 깊은 곳에 목란배 매었지 (荷花深處繫蘭舟)
임을 만나 물 건너 연밥 따 던지고는 (逢郞隔水投蓮子)
행여 누가 보았을까 한나절 부끄러워 (遙被人知半日羞)"
- 연밥 따는 노래(采蓮曲)
조선 중기 가부장 사회가 자리를 굳히며
양반 사대부들은 그녀의 시를 음탕하다고 비판한다.
그후 200년 넘게 그녀의 시는 빛을 보지 못한다.
"규중여인 시를 짓는다는 것이 원래부터 좋은 일이 아니다.
조선의 한 여자이름이 중국에까지 퍼졌으니 대단히 유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부인들은 일찍이 이름이나 자를 찾아볼 수 없으니
난설헌의 호 하나만으로 과분한 일이다.
후에 재능 있는 여자들이 이를 밝혀
경계의 거울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 연암 박지원 <열하일기(熱河日記)>
6. 그녀의 시는 시대를 뛰어 넘고, 국경을 넘었다.
북경 대학교 동방언어대학 조선어학과 한국시 정규 과목 수업.
학생들의 수업이 한창인 이곳에서 낯익은 이름과 낯익은 시를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이 열띤 토론과 함께 공부하고 있는 작품은 허난설헌의 시.
그들은 어떻게 난설헌의 시를 가지고 수업을 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들은 난설헌의 시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봉건 사회에 대한 반항과
불행에 대한 호소,
비애와 고통을 소리내지 못하고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던 사회에서
이름을 날릴 수 없었던 것에 대해
허난설헌을 동정합니다"
- 조선어학과 대학원생 쳔아이윈
"어두운 현실 속에서 그녀는
이러한 현실을 시에 의지해 벗어났고
현실에 대한 반항을 표현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허난설헌은 평범한 여성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 조선어학과 대학원생 위루어잉
8. 역사의 재평가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여자로
김성립의 아내로 태어난
세 가지 한을 안고
세상을 떠난 여인
허난설헌!
감성적이면서도 시대 정신이 녹아난 그녀의 시는
그녀의 비상한 재주는
숨어 있는 보석이 언젠가는 제 빛을 내듯
시대를 뛰어 넘고
국경을 넘었다.
그리고 남존여비의 조선 땅에서 부활,
당시 역사는 그녀를 외면했지만
오늘날 역사는 시대를 앞서간 천재 여류 시인을 재평가 한다.
사회 모순에 저항한 그녀의 승리라 할 수 있다.
못 다한 그녀의 생은
그녀의 시와 함께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역사에서 현재는 먼 미래에 과거가 되고
미래는 과거의 역사를 정당하게 평가한다.
- <한국사전>을 보고 -
(서툴고 부족한 정리입니다. 컴에 나오지 않는 한자를 못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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