草澗 權文海의 思鄕詩 硏究*
草澗초간 權文海(권문해)의 思鄕詩(사향시) 硏究(연구).pdf
1)尹浩鎭**
<目 次>
1. 머리말
2. 草澗의 漢詩와 現實認識
1) 초간에게 시는 무엇인가
2) 벼슬살이에 대한 환멸
3. 草澗의 思鄕詩 世界
1) 客苦와 思鄕의 形象化
2) 歸去來와 溪山興의 吟詠
3) 기타 思鄕詩의 諸樣相
4. 맺음말
<국문초록>
이 논문은 ??大東韻府群玉??의 저자 草澗 權文海의 한시 가운데 思鄕詩
에 대한 연구이다. 권문해의 한시에 대한 전반적인 면모에 대해서는 이미
연구가 진행된 바 있으나, 사향시는 권문해의 한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며 가장 특징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이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의 필
요성이 제기된다.
이 글에서는 권문해에게 시는 어떤 의미가 있으며, 사향시를 통하여 무
엇을 얻고자 했는가를 우선 살펴보았다. 권문해는 시를 짓는 까닭에 대해
* 이 논문은 2011년 6월 예천문화원에서 주최한 초간 권문해 선생 재조명 학술대회에서 발
표한 것이다.
**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hjyun@nongae.gsnu.ac.kr
32 漢文學報 第27輯
‘나그네의 마음을 삭일 수 없어서 시를 짓는다’고 직접 말하였다. 즉 권문
해에게 있어 시는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느라 지친 심신을 달래주는 淸涼劑
역할을 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사실 권문해는 仕宦을 하는 동안 내내 현실
에 만족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사환을 통하여 그의 이상과 꿈을 실현하기 어렵고 다만 객지를 떠돌아
다녀야만 한다는 현실을 인식한 그는 고달픈 현실을 떠나 고향으로 가고자
하면서도 떠나지 못하는 갈등의 연속이었다. 권문해가 사향시에 탐닉한 원
인은 이러한 갈등을 시로 풀어내고자 함이었다. 여기에서는 권문해의 이같
은 시의식과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사향시의 면모를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첫째, 권문해의 사향시가 우선 客苦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객고를
통하여 사향에 대한 생각이 워낙 깊어 이것이 시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
난다. 객지에서의 벼슬살이, 특히 지방관으로서의 벼슬살이에 회의를 느꼈
던 초간이 지향하던 바는 바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이었고, 이를 시에서
주로 노래하였다.
둘째, 고향을 그리워하던 마음은 곧 고향의 자연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이어져 溪山興을 읊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계산흥은 스승 退溪 李滉이 退
處하여 自適하면서 즐기던 것으로 자신도 자연의 품에 돌아가 산수 강호
를 즐기며 한적하게 살아가고자 했던 뜻이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셋째, 권문해가 고향을 그리워했던 것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벼슬
살이하며 혹은 객지에서 외롭게 지낼 때 지은 것에 그치지 않고, 여러 가지
경우에 드러나 보인다. 고향에서 떠나와 있으면서 고향이 그리워 시를 짓
는 것은 물론, 고향으로 돌아가면서도 사향시를 지었으며, 다른 사람이 고
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내는 경우에도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읊었다.
주제어 : ??大東韻府群玉??, 草澗, 權文海, 思鄕詩, 溪山興, 仕宦, 客苦, 故鄕, 現實, 淸涼
劑, 醴泉, 草澗亭
‘나그네의 마음을 삭일 수 없어서 시를 짓는다’고 직접 말하였다. 즉 권문
해에게 있어 시는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느라 지친 심신을 달래주는 淸涼劑
역할을 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사실 권문해는 仕宦을 하는 동안 내내 현실
에 만족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사환을 통하여 그의 이상과 꿈을 실현하기 어렵고 다만 객지를 떠돌아
다녀야만 한다는 현실을 인식한 그는 고달픈 현실을 떠나 고향으로 가고자
하면서도 떠나지 못하는 갈등의 연속이었다. 권문해가 사향시에 탐닉한 원
인은 이러한 갈등을 시로 풀어내고자 함이었다. 여기에서는 권문해의 이같
은 시의식과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사향시의 면모를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첫째, 권문해의 사향시가 우선 客苦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객고를
통하여 사향에 대한 생각이 워낙 깊어 이것이 시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
난다. 객지에서의 벼슬살이, 특히 지방관으로서의 벼슬살이에 회의를 느꼈
던 초간이 지향하던 바는 바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이었고, 이를 시에서
주로 노래하였다.
둘째, 고향을 그리워하던 마음은 곧 고향의 자연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이어져 溪山興을 읊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계산흥은 스승 退溪 李滉이 退
處하여 自適하면서 즐기던 것으로 자신도 자연의 품에 돌아가 산수 강호
를 즐기며 한적하게 살아가고자 했던 뜻이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셋째, 권문해가 고향을 그리워했던 것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벼슬
살이하며 혹은 객지에서 외롭게 지낼 때 지은 것에 그치지 않고, 여러 가지
경우에 드러나 보인다. 고향에서 떠나와 있으면서 고향이 그리워 시를 짓
는 것은 물론, 고향으로 돌아가면서도 사향시를 지었으며, 다른 사람이 고
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내는 경우에도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읊었다.
주제어 : ??大東韻府群玉??, 草澗, 權文海, 思鄕詩, 溪山興, 仕宦, 客苦, 故鄕, 現實, 淸涼
劑, 醴泉, 草澗亭
15) 權文海, ??草澗集?? 卷2 「次朴君沃啓賢別墅韻」
초간 권문해는 정치가로서의 입신을 꿈꾸었으나 만족스런 벼슬생활을
했다고 하기 어렵다. 그는 오히려 ??大東韻府群玉??의 저자로 알려져 있고,
그의 ??草澗日記?? 등이 주목을 받은 바 있다. ??대동운부군옥??은 많이 미흡
하지만 일단 완역이 되었고, ??초간일기??는 활자로 정리되어 출판되었다. 그
가 남긴 시문집인 ??초간집??에 수록되어 있는 시문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기
도 하였지만, 연구가 아직 미미한 상태이다. 시에 대한 연구만 이제까지 두
편이 보고되었다.1)
이 가운데 최재남의 논문은 시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대동운부군옥??
??초간일기?? 등 다른 저작에 대해서도 간략히 소개를 하는 종합적 고찰의
성격을 띠고 있다. 시에 대해서는 세 가지로 나누어, 첫째 ‘향촌의 안정된
삶에 대한 자긍심과 그리움’, 둘째 ‘전아한 품격과 간결한 표현’, 셋째 ‘교
유시에 드러난 내면의 모습과 사람에 대한 신뢰’로 이루어져있다. 첫째는
시의 내용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시의 품격과 표현에 관한 것이고, 셋째는
시의 유형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형기의 논문에서는 초간의 생애와 함께 시를 네 가지로 나누어 접근하
였는데, 첫째 ‘역사고적의 회고’, 둘째 ‘교유와 이별의 정한’, 셋째 ‘삶과 죽
음의 관조’, 넷째 ‘희작시의 창작실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네 가지 가운
데 앞의 세 가지는 내용에 관한 것이고, 넷째는 형식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초간의 시를 최재남과 같이 내용, 표현, 유형으로 각기 나누어 볼 수도
있고, 조형기와 같이 내용과 형식 가운데 특징적인 것을 중심으로 연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초간 시의 가장 큰 특징은 형식과 표현 보다는
내용에 있으며, 내용 가운데에서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 곧 사향시에 있
1) 최재남(2001), 조형기(200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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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본다. 우선 초간의 시 전체에서 차지하는 사향시의 분량도 많을 뿐만
아니라, 사향시는 그의 생애를 이해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초간의 시는 ??초간집??에 224제 250수가 실려 있고, ??초간일기??에 43수가
있다고 한다.2) 초간의 시 가운데 사향시가 중심이 되고 있음은 최재남이
초간의 시에 ‘歸夢’, ‘鄕思’, ‘故山(故園)’, ‘歸去’ 등의 시어가 빈번하게 사
용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시의 밑바탕에 함께 깔려
있는 것이 초간시의 중요한 특성이라 할 수 있다.”3)고 한 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초간 시의 중심을 이루는 사향시를 이해하기 위해, 초간이
시를 어떻게 생각하였으며, 당시 초간이 처해 있던 현실과 그 현실에 대한
인식이 시에 어떻게 드러나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어서 초간이 객
지에서의 벼슬살이와 사향시의 관계, 사향시가 어떠한 때에 어떠한 모습으
로 지어졌는가, 사향시의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점은 무엇인가 등 사향시
의 여러 면모에 대해 검토할 것이다.
2. 草澗의 漢詩와 現實認識
1) 초간에게 시는 무엇인가?
초간은 학자이면서 정치인이다. 정치인으로서 성공했다고 할 수 없지만
당대에 절의를 떨쳤고, 학자로서 자처하지 않았지만 ??대동운부군옥??이란
대저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문집에는 시문이 모
두 들어 있으며, 특히 이 가운데 시는 분량도 많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수
2) 조형기(2009), 201면.
3) 최재남(2001), 233~237면.
준에 올라 있다. 鄭宗魯가 「草澗集序」에서 “그의 문학과 절의는 당세에 이
름이 났다.”4)라 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문학자로 자처하지 않았기에 문학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
이 없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초간의 문학에 대한
생각은 유학에 바탕을 둔 보수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
묘년(1591) 7월 15일 朝講 때, 임금이 과거문자에 莊子의 말을 사용해도 되
는가를 물으니, 李山海는 논책에서는 장자를 사용할 수 없으나, 시부에서
는 더러 사용해도 된다고 하자, 초간은 시부에서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5)
이로보아 그는 과거의 글에서는 어떤 경우라도 유학의 정통에서 벗어나
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문학관을 피력하였는데, 초간의 이러한 생각이 평
소 공력을 들인 것에 기반한 것임을 鄭宗魯는 「草澗集序」에서 “다만 그의
시문을 보건대 부려한 것을 공교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고, 오로지 전아한
것을 위주로 하였다. 뜻을 오로지 하여 공력을 들인 것이 아니라면 그럴 수
가 있겠는가?”6)라고 밝힌 바 있다.
정종로가 초간의 시문이 부려한 것을 추구하지 않고 전아한 것을 위주로
하였다고 했는데, 外裔孫인 黃龍漢(1744-1818)도 「草澗集跋」에서 “드러내
어 문사로 지은 것은 소박하고 평담하였고, 옛것을 본받아 우아하였다. 정
성과 사물의 실질에서 나오지 않았으되 세상에서 문장에 능하다고 하여 그
림처럼 아로새긴 것은 스스로 모의하고 의론하기 부족하다고 여겼다.”7)라
4) 權文海, ??草澗集?? “其文學節義, 有名當世.”(鄭宗魯, 「草澗集序」)
5) 權文海, ??草澗集?? 卷4 「雜記」 “辛卯七月十五日朝講. 上曰, ‘古人以科擧文字, 譬諸執贄,
士人初見君父, 用莊子語可乎? 至於詩賦, 用莊子語可也.’ 領事李山海曰, ‘如策論則何可
用莊子乎? 至於詩賦則雖或用之, 不必禁之.’ 臣文海進曰, ‘其在聖朝闢異之道, 雖詩賦,
不可使用之.’ 上默然曰, ‘似當有區別之事矣, 此意言之于禮曹, 自數十年來, 文體大變, 專
尙奇僻, 掠取經傳中數字, 斷截作文, 語似不凡, 考其文勢, 則上下不接, 脈理不通, 以此驚
考試之目, 爲決科之捷徑, 有識之寒心者久矣. 宋斯文言愼, 於解額執事策, 以曾子爲也曾
宗聖, 用論語參也魯之語.”
6) 權文海, ??草澗集?? “第觀其詩文之不以富麗爲工, 唯以典雅爲主, 非專意用工之有在, 而能
然乎?”(鄭宗魯, 「草澗集序」)
고 하였다. 이것을 통해서도 초간이 아로새기고 꾸미기 보다는 평담소박하
고 우아한 것을 추구하였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위에서는 초간의 시문이 모두 훌륭하다고 하였으나, 사실 초간이 남긴
시와 문 가운데 문보다는 시에 뛰어나다. 우선 시가 뛰어난 지 아닌지는 차
치하고, 초간이 시를 짓지 않으면 안 되었던 까닭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이
런저런 설명을 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蒼雪 權斗經이 기록한 「溪門諸子錄」에 “을해년(1575) 이후로 동서를 표
방하는 것이 날로 심해져서 공이 세도를 위하여 깊이 걱정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동서의 화는 반드시 나라와 더불어 시종을 같이 할 것이라고 하
며, 시를 지어 뜻을 드러내었다.”8)라고 하여, 초간이 시를 통하여 자신의
뜻을 내보였다고 하였다.
초간 시의 이러한 점에 대해 「묘갈명」에서는 또 “공이 말하기를 黨論이
반드시 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라고 하면서 깊이 걱정하며 길게 탄식하였는
데, 시가로 형용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9)라고 하였고, 靑壁 李守淵의 기
록에는 “을해 이후로 동서를 표방하는 것이 날로 심하여지자, 공이 세도를
위하여 심히 걱정하며 시를 지어서 뜻을 드러내었다.”10)라고 하였다. 여기
에서 보듯 초간은 시를 통하여 주로 현실에 대한 우려를 타나내었다.
그러나 초간이 스스로 밝힌 것은 우선 「輓玄風縣監朴知天」라는 시에서
보듯 시를 실용적으로 이용한 것을 볼 수 있다. 그것도 급작스럽게 시를 짓
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만사를 짓게 된 일을 이야기하였다. 초간은 이
시에 “욕되게 이웃고을을 다스리고 있으면서 어떤 일로 인하여 얼굴을 접
7) 權文海, ??草澗集?? “所以發爲文辭, 朴素平淡, 典故爾雅, 不出於情性事物之實, 而世之所
謂能文章刻畫而雕鎪者, 自不足擬議也.”(黃龍漢, 「草澗集跋」)
8) 權文海, ??草澗集?? 附錄 「溪門諸子錄」 “乙亥以後, 東西標榜日甚, 公深以爲世道憂, 嘗言
東西之禍, 必與國相終始, 作詩以見志.”
9) 權文海, ??草澗集?? 附錄 「墓碣銘」 “公謂黨論必亡國, 深憂永歎, 至形歌詩.”
10) 權文海, ??草澗集?? 附錄 「溪門諸子錄」 “乙亥以後, 東西標榜日甚, 公深爲世道憂, 作詩以
見志.”
해볼 수 있었는데, 새로 안 사람이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과 같았
다. 26일에 함께 앉아 서로 추켜세우며 이야기하였는데, 다음날 아침이 다
가기도 전에 갑자기 돌아갔다. 인사가 이쯤 되니 너무 마음이 아프다.”11)라
는 주석을 달고 있다. 이 주석에 의하면, 방금 고인이 된 현풍현감 박지천
의 죽음을 애도하여 지은 시임을 알 수 있다.
현풍현감 박지천은 초간이 욕되게 이웃 고을 원이 되었다고 겸언한 것으
로 보아 아마도 대구부사로 있을 적에 사귄 인물이었던 것 같다. 새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오래된 벗과 같다고 했다. 그런데 26일 만났던 그
가 이튿날 아침도 다 가기 전에 갑자기 죽었다는 것이다.
낙수 가에서 만났던 일 어찌 기약했으랴? 洛濱萍會豈前期,
다정스레 친하던 것 오랜 친구보다 나았네. 傾蓋情親勝舊知.
어제 저녁 웃고 이야기하던 일 꿈같은데, 前夕笑談還似夢,
차마 오늘 슬퍼하는 시를 쓰게 하네. 忍令今日寫哀詞.12)
이에서처럼 시는 급작스럽게 죽은 벗을 애도하는 데에 쓰이고 있다. 시
에서 그 스스로 말한 바와 같이 친구의 죽음이 시를 쓰게 하는 것이다. 이
처럼 절친한 주변 인물의 죽음을 당하여 급작스럽게 시를 쓰지 않을 수 없
음을 밝힌 구절은 持平 全慶昌의 죽음을 애도하는 「輓全持平季賀慶昌」이
란 시의 “세상 일 점차 어려워지자 빨리 빼앗아 가서, 우리들로 하여금 차
마 슬퍼하는 글을 지게 하네.”13)라는 구절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이와 같이 실용적 생각으로만 시를 지었던 것은 아니다. 초
간에게 있어 시는 한가함을 즐길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란 생각이 매우 강
11) 權文海, ??草澗集?? 卷1 「輓玄風縣監朴知天」 “忝宰隣邑, 因事得接顔面, 新知若舊識, 二十
六日, 同坐同推, 越翌日朝未終, 暴逝, 人事至此, 痛哉.”
12) 權文海, ??草澗集?? 卷1 「輓玄風縣監朴知天」
13) 權文海, ??草澗集?? 卷2 「輓全持平季賀慶昌」 “天步漸艱還奪速, 忍令吾輩賦哀章.”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偶題」라는 시에서 독백처럼 읊조린 내용에
그의 이러한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상추 한 묶음으로 한가하게 살아가는 곳, 薖軸閒居處,
매화 핀 처마가 대나무 울타리를 마주하고 있네. 梅簷對竹籬.
고요한 가운데 아무 일도 없으니, 靜中無一事,
항상 옛 사람의 시만 읽는다. 常讀古人詩.14)
위의 시를 통해서 시골에 묻혀 한가롭게 살아가는 처사의 전형적인 삶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그런데 바쁜 가운데 한가로움은 여유와 휴식을 제공
하지만, 아무 할 일도 없는 가운데 한가로운 것은 孤寂에 다름 아니다. 초
간에게 있어 옛 사람의 시는 이 고적을 이기는 도구이다. 즉 옛 사람의 시
를 읽음으로써 고요하고 아무 일도 없는 적막한 상황을 타개해 나가는 것
이다. 다음의 「次朴君沃啓賢別墅韻」이라는 시에서는 오히려 시와 술로 인
생의 즐거움을 구가하고 있다.
저자에 평편하게 임하여 書樓를 개창하니, 平臨闤闠創書樓,
華岳山과 終南山이 그윽하게 눈에 들어온다. 華岳終南望眼悠.
붉은 마음은 단지 은총에 보답하기 위한 것이고, 丹悃只緣恩寵報,
평소의 마음은 이욕과 명예 도모하지 않았다네. 素心非爲利名謀.
다만 지극한 즐거움이 흉중에 있는 것이니, 但將至樂胸中在,
하필이면 그윽하게 깃드는 물외에서 구하랴? 何必幽棲物外求.
몸은 맑은 아침을 만나 아무 한 가지 일도 없으니, 身際淸朝無一事,
단지 詩酒에 의지하여 날마다 즐겁게 지낸다네. 只憑詩酒日休休.15)
14) 權文海, ??草澗集?? 卷1 「次使相西郊韻 奉呈李一齋恒案下」
15) 權文海, ??草澗集?? 卷2 「次朴君沃啓賢別墅韻」
위 시에서 초간은 맑은 아침에 아무 할 일도 없어, 날마다 시주에 의지하
여 즐겁게 지내고 있다 하였다. 3,4구의 “붉은 마음은 단지 은총에 보답하
기 위한 것이고, 평소의 마음은 이욕과 명예를 도모하지 않았다네. [丹悃只
緣恩寵報, 素心非爲利名謀.]”라는 내용으로 보아 임금에게 충성하고자 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더 나아가 지극한 즐거움은 흉중에 있다고 하
면서 하필이면 그윽하게 살면서 물외에서 그것을 구할 것인가 하고 말하였
다.
위의 시에서는 임금 곁에서 벼슬하는 것에 득의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
실 초간은 사환을 하는 동안 내내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
가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의 실제 삶은 떠나고자 하면서도 떠나지 못하는
갈등의 연속이었다. 초간이 시에 탐닉한 까닭은 이러한 갈등을 시로 풀어
내고자 함이었다. 초간은 자신의 시를 통해 시를 짓는 회포를 부치기 위해
시를 짓는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獨坐 喜孫正郞德裕來訪」라는 시의 5-8
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반평생 성글고 게으른 것 구태에 의지하고, 半世疏慵依舊態,
한 평생의 회포는 새로운 시에 부치네. 百年懷抱付新詩.
유유히 인간 세상의 일을 말하려 하니, 悠悠話到人間事,
명성과 이익 앞에 시비를 따지는 일도 많다. 聲利前頭足是非.16)
이 시에서는 사람들이 평소에는 대범하다가도 성예와 이익 앞에서는 유
독 시시비비를 엄격히 가리는 일이 많음을 지적하여 말하였다. 자신은 영
악스럽게 시비를 밝히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러한 일에 모른 척 살아온 터
였다. 이것이 반평생 성글고 게으르게 살아온 까닭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
서 평생의 회포를 생각하니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는데, 이 답답한 심경
16) 權文海, ??草澗集?? 卷2 「獨坐 喜孫正郞德裕來訪」
22) 權文海, ??草澗集?? 「年譜」 “首劾寅城君鄭澈專擅之罪, 兩司因之繼發, 遂竄于甲山.”
이 드러나 있음을 볼 수 있다.
聲名으로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일이 부족하니, 媿乏聲名動世人,
단지 성글고 게으른 것으로 나의 天眞을 보전하네. 只將疏懶保吾眞.
가거나 머무는 것 모두 운명에 말미암은 것이고, 行行止止皆由命,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은 내 몸과 상관이 없네. 是是非非不繫身.
약 보자기와 시 묶음이 내가 살아가는 방법이니, 藥裹詩編爲契活,
학의 다리 길고 오리 다리 짧은 것 조물주에 맡기네. 鶴長鳧短任陶勻.
부질없이 일편단심의 마음이 남아 있어 괴로우니, 空餘一片丹心苦,
나라를 걱정 한 지 여러 해 만에 귀밑머리 세었네. 憂國多年鬢芊新.17)
여기에서도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은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세상에 나갈 것인가 자연에 退處할 것인가도 오로지 명에 달려 있
다고 하였다. 그래서 鶴長鳧短을 조물주의 뜻에 맡기고 거기에 따를 뿐이
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로지 임금에 대한 일편단심과 나라를 걱정하는 마
음은 마음대로 버릴 수 없어, 가슴에 부여잡고 있자니 괴롭고 이 때문에 또
머리가 허옇게 셀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초간에게 있어 客愁는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의 시에는 오랜 객지
생활에서 오는 극도의 중압감을 시로 위로하고자 하나 제대로 되지 않는
고충을 토로한 것이 많다. 다음의 시에서는 객수를 시로 달래보려 하지만
시가 오히려 잘 되지 않는 뜻을 노래하였다.
매섭게 차가운 서풍이 휙휙 일어나니, 憀慄西風陣陣生,
나그네 가운데 회포는 점점 처량해지네. 客中懷抱漸凄淸.
17) 權文海, ??草澗集?? 卷2 「偶題」
지금부터 비로소 詩情이 줄어듦을 깨달으니, 從今始覺詩情減,
가을이 다가도록 한 수도 짓지 못하였네. 秋盡都無一首成.18)
객수가 깊어지면서 오히려 시를 지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다음 「初夏
病中述懷」라는 시의 경련에서도 “藥譜와 針經과 길이 계를 맺으니, 酒兵
과 詩陣은 공이 없어 괴롭다.[藥譜針經長作契, 酒兵詩陣苦無功.]19)”라고
하여, 오랜 객지생활을 하면 병이 들어 약을 먹고 침을 맞는 일이 일상이
되었고, 술을 마시고 시를 지어도 객수를 달래는 데에 소용이 없음을 말하
였다. 위의 시에서 보듯 초간에게 있어 시는 또한 객수를 달래주는 하나의
수단이기도 하였다. 다음 「書楡城縣客軒」라는 시에 그러한 내용이 잘 드
러나 있다.
호수 밖으로 아득하게 나그네 길은 먼데, 湖外悠悠客路長,
조그만 헌에서는 오늘도 고향을 그리워하네. 小軒今日憶桑鄕.
비가 갠 뒤에 구름 기운은 산의 기운을 이었고, 雨餘雲氣連山氣,
봄이 따듯해지니 연기 낀 빛이 들에 접해있다. 春暖煙光接野光.
벼슬에 뜻 없이 흐르는 물을 따라 세월을 보내고, 薄宦流年隨逝水,
먼 숲의 돌아오는 새는 斜陽 속을 날아간다. 遠林歸鳥趁斜陽.
나그네 마음 이르는 곳마다 삭일 수 없어서, 羈懷到處難消遣,
때때로 어린 아이를 불러 짧은 시를 짓는다. 時喚奚童賦短章.20)
유성현의 객사에 쓴 시인데, 유성은 지금 대전직할시에 속해 있으니, 공
주에서 벼슬살이 할 적에 유성에 묵으며 그곳에 지은 것으로 생각된다. 초
간은 이 시에서 벼슬에 뜻이 없음을 말하였다. 그래서 어제도 그랬듯이 오
18) 權文海, ??草澗集?? 卷1 「秋日偶吟」
19) 權文海, ??草澗集?? 卷2 「初夏 病中述懷」
20) 權文海, ??草澗集?? 卷2 「書楡城縣客軒」
늘도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그네의 마음을 삭일 수 없어서 시를 짓는다고 직접 말하
였다. 즉 초간에게 있어 시는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느라 지친 심신을 달래
주는 청량제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2) 벼슬살이에 대한 환멸
초간의 종조부 垂軒 權五福은 기묘사화 때 趙光祖 등과 함께 화를 당한
己卯名賢 가운데 한 사람이다. 종조부의 일은 초간의 인생과 인생에 대한
생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시대가 변하여 종조부의 일도 신원이 되고, 자신
도 과거에도 응하여 합격하여 벼슬에도 나아갔다. 하지만, 당시는 동서의
분쟁이 점점 격화되어 가고 있었고, 이런 정쟁에 휘말려 들었던 그는 서인
의 미움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鄭澈을 위시한 서인의 탄핵에 앞장섰다가 논핵이 되었던 일은 “내
가 연전에 장령이 되었을 때에 정철이 예조판서에 발탁되어 임명된 것을
논핵하였는데 열흘이 지나도록 그치지 않았고, 또 병조판서 이이의 처사가
잘못된 것이 많음을 논하였다. 오늘 논핵을 당한 일은 이것이 빌미가 된 것
이다.”21)라는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초간은 이 글에 이어 “이이가 죽은 뒤에 정철이 사헌부에 오래 있으면서
국병을 잡고 있었으므로, 인물의 진퇴가 그 입에서 나오게 되었다.”라고 정
철이 국정을 천단하는 것을 공격하였다. 대구부사를 마치고 1591년(辛卯)
閏二月에 司諫院 司諫에 임명되었는데, 처음으로 한 일이 정철의 죄를 탄
핵하였고, 이로 인해 정철은 결국은 갑산으로 귀양 가게 되었다.22)
21) 權文海, ??草澗集?? 卷4 「잡기」 “余年前爲掌令時, 論劾鄭季涵擢拜禮判, 至於經旬不止. 又
論兵判李叔獻處事多誤, 今日被論, 此爲之祟也. 叔獻沒後, 鄭季涵長在憲府秉國柄, 進退
人物, 皆出其口.”
22) 權文海, ??草澗集?? 「年譜」 “首劾寅城君鄭澈專擅之罪, 兩司因之繼發, 遂竄于甲山.”
서인과의 대립으로 인해 서인의 미움과 공격을 받았던 일은 鄭宗魯가 「
草澗集序」에서 “무릇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였지만 홀로 두려워하지 않
았고, 많은 사람들이 칭예하였지만 홀로 칭예하지 않았고, 한 손으로 권력
을 잡은 사람들의 하늘을 뒤흔들듯 한 기세를 꺾으려 하였다.....이것 때문
에 당시 권력을 잡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다.”23)라고 한데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중앙 정계에서 크게 성공하지 못하였고, 지방 수령으
로 전전하는 일이 많아지게 되면서 벼슬하는 데에 점차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42년간 잘못 살아온 것을 알겠다고 한 「自警吟」을 통해서도 그러
한 심경을 읽을 수 있다.
대체로 마음이 고요하면 마음도 따라서 고요하고, 大都身靜心隨靜,
일체의 말이 드물면 허물도 또한 드물도다. 一切言稀過亦稀.
내가 살아온 것을 돌아보면 50도 되지 않았는데, 顧我行年未五十,
이미 42년 동안 잘못 살아온 것을 알겠도다. 已知四十二年非.24)
「연보」에 의하면, 이 시는 43세에 「자경잠」을 짓고, 이어서 지은 것으로
되었다. 43세 즈음하여 인생을 잘못 살아왔음을 느끼고 지은 시이다. 이 시
기를 전후하여 초간이 지낸 벼슬은 40세에 안동부사, 42세 2월에 봉상시 첨
정, 3월에 사옹원 정, 청주목사, 43세 10월에 종부시 첨정, 11월에 종부시
정 등을 지냈다. 이로 보면, 이 시를 지을 무렵에는 벼슬살이에 흥미를 잃
을 정도로 벼슬이 시원찮았음을 알 수 있다.
23) 權文海, ??草澗集?? “夫衆畏而獨不畏, 衆譽而獨不譽, 思以一隻手, 挫當路掀天之勢, …用
是見嫉於時.”(鄭宗魯, 「草澗集序」)
24) 權文海, ??草澗集?? 卷1 「自警吟」
시끌벅적 귀에 들려오는 소리 괴롭고 싫어서, 苦厭紛囂到耳喧,
적막한 외로운 집에서 산문을 마주하고 있네. 孤齋寂寂對山門.
바람 부는 꽃에 어린 나비 몇 번이나 넘어졌나? 風花學蝶何顚倒,
시내에 비 내렸다 구름 끼었다 몇 번이나 번복했나? 溪雨和雲幾覆翻.
반년 동안 부평처럼 떠돌아 나그네의 한 더했고, 半世萍漂添客恨,
온 정원에 봄이 가니 이끼 흔적만 길도다. 一庭春去長苔痕.25)
이 시에는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생활하는 여러 가지 고충이 그대로 드
러나 있다. 시끄럽게 떠들며 옳으니 그르니 시비를 따지는 소리가 귀에 들
려오는 것이 싫다고 했다. 동서로 나뉘어 다투는 일이 갈수록 심화되어 엎
치락뒤치락 싸우며 상대방을 헐뜯는 일이 많았던 것에 대한 반응이다. 이
시의 3, 4구절에는 이렇게 불안정하고 변화불측한 당시의 정치상황을 비유
적으로 표현하였다.
3구에서는 당시의 어려운 상황에 적응하는 일이 쉽지 않음을 어린 나비
에 비유하여 드러내었다. 말한 배우는 나비는 꿀 따는 일을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하는 어린 나비이다. 노련한 나비라면 바람 부는 가지에서도 무난하게
꿀을 딸 수 있겠지만 경험이 부족한 나비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라 실패를
거듭하는 것을 보며 읊은 것이다.
4구에서는 변화를 예측하기 어려운 현실에 대한 소감을 비유적으로 읊
었다. 시내에 비와 구름이 반복적으로 덮였다 개였다 하는 것도 당쟁에서
의 승패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는 당시의 정치현실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고향을 떠나와 객지에 있었던 초간으로서는 이러한 일들을 더욱 견디기 어
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5,6구에서 반평생 부평처럼 객지로 떠돌아 나그네의
한이 깊어졌다고 한 대목에서 초간의 당시 처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미련에
서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만을 바라니, 고향의 꿈만을 꾸게 된다고 했다.
25) 權文海, ??草澗集?? 卷2 「又步門字韻」
그리고 객지에서의 어려움으로 매우 암담하였다. 희망이 없는 미래를 감지
한 초간이 갈 길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특히 지방관으로 재직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는 오랜 세월동안
지방관으로 지낸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하였다. 「次金仁伯孝元韻」이란 시
에서는 “이십년 동안 동서로 먼지를 뒤집어쓰고 다니면서, 心事가 식은 재
와 같음을 견디기 어려웠네. [廿載東西面撲埃, 不堪心事冷如灰.]”26)라고
하였다. 20년간 벼슬을 위해 이리저리 객지로 다니면서 벼슬에 마음이 없
었음을 식은 재에 비유하여 말하였다.
그가 지방관으로 처음 재직하였던 일은 안동의 교관으로서 이다. 하지만
이때는 아직 젊은 나이에 얼마든지 중앙에서 뜻을 펼 수 있으리라는 희망
을 가질 수 있었다. 따라서 이때는 지방에서 벼슬을 하는 것에 대해 특별히
싫어하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10년 이상의 벼슬살이를 하면서
40세에 안동의 부사로 오게 되면서는 벌써 세상살이에 대한 염증이 드러나
있다.27)
다음의 시는 안동부사로 재직하던 시절에 옛 일을 회상하며 지은 것이
다. 안동의 관아에 있는 默庵 權應鼎의 시운에 차운하여 지었다. 이 시의
말미에 있는 주에 “默庵爲府伯時 余爲校官 今已十年”라고 하여, 10여 년
전에 權應鼎이 안동부사로 있을 적에 자신이 교관으로 있었던 일을 회상
한 것이다.
매화 꽃 필 적에 東閣에서 날마다 시를 읊조리며, 梅開東閣日吟詩,
아전으로 숨어살며 세상에서 버림받는 것 달가워했네. 吏隱甘爲世棄遺.
사면의 바람에 날리는 연기는 살아있는 그림을 그리고, 四面風煙開活畫,
한 구역의 산수에는 맑고 기이한 경치가 모였도다. 一區山水鐘淸奇.
26) 權文海, ??草澗集?? 卷2 「次金仁伯孝元韻」
27) 「연보」에 의하면, 초간은 40세 정월에 안동부사로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3월에 파직되었다.
한심스러운 것은 계륵을 사람들이 다투어 사모하는 것이니, 自嗟鷄肋人爭慕,
누가 양장구절처럼 길이 굽어 위태로운 것을 알겠는가? 誰信羊腸路轉危.
십년 만에 다시 오니 꼭 꿈속의 일만 같아서, 十載重來渾似夢,
남기신 시에 차운하며 그리운 마음을 달래보네. 爲賡餘韻慰相思.28)
이 시에는 인생살이와 벼슬살이에 대한 그의 씁쓸한 감회가 묻어 있다.
특히 5, 6구에서는 사람들이 계륵에 대해 다투어 사모하는 것과, 인생살이
가 구절양장과 같이 순탄치 않음을 말하였다.
세월이 흐른 뒤에 지방관으로 임명된 뒤에는 더욱 벼슬살이에 대한 환멸
감을 보이고 있다. 그가 47세 때 공주목사에 부임한 뒤로는 특히 지방관으
로 된 것을 매우 싫어하였다. 다음 시는 「公山衙偶吟」라는 시인데, 공주
관아에서의 생활이 만족스럽지 않음을 드러내었다.
눈꽃으로 먼 산이 헷갈리는데, 雪花迷遠山,
하늘 끝에 언 구름은 짙게 끼었네. 天末凍雲頑.
물 아래에는 물고기와 용이 숨었고, 水底魚龍蟄,
수풀 사이에는 새와 참새가 떨고 있네. 林間鳥雀寒.
이불을 덮고 있자니 바람이 문을 두드리고, 擁衾風打戶,
음식을 훔치려 쥐는 소반에 오르네. 偸飯鼠登盤.
공주의 관아에 반달이 떠오르니, 半月公山館,
거울 속의 얼굴은 부질없이 시들어 가네. 空凋鏡裏顔.29)
처음 네 구절은 모두 침울하고 싸늘한 분위기를 그리고 있다. 경련에서
는 그러한 상황에서 이불도 시원치 않고, 먹을 것도 시원치 않는 상황을 묘
사하였다. 그래서 공주 관아의 반달을 바라보는 동안 거울 속의 얼굴은 시
28) 權文海, ??草澗集?? 卷2 「花山衙軒 次權默庵應挺韻」
29) 權文海, ??草澗集?? 卷1 「公山衙偶吟」
들어 간다는 것이다.
초간이 月川 趙穆의 시에 화운한 「和趙士敬韻」이란 시는 본래 조목은
과감하게 벼슬을 버리고 갔었지만,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매여 있음
을 말하였다. 그러나 이 가운데에서도 “관청에서 장부를 정리하느라 수염
과 귀밑머리 세었고, 고향의 호수와 고개는 길마다 닦여 있네.[公案簿書鬚
鬢白, 故園湖嶺道途脩.]”30)라고 하여, 지방수령으로서 늙어가는 것을 한탄
하며, 고향을 그리는 내용을 읊었다. 다음 「次西原降仙樓韻」 라는 시에도
이러한 마음이 드러나 있음을 볼 수 있다.
고향 동산에 꽃이 지고난 뒤에, 故園花落後,
호서에는 버들 솜 비로소 날리네. 湖外絮飛初.
쇠하고 병들어 전리만 생각하고, 衰病思田里,
성글고 게을러 편지도 두렵도다. 疏慵畏簡書.
이름 날리는 것 진실로 헛된 일이니, 名浮眞是幻,
꿈에서 배부른들 헛된 줄 안지 오래이다. 夢飽久知虛.
쥐꼬리 봉급을 끝내 어디에 쓰랴? 寸廩終何用,
아내와 자식들도 또한 나를 비웃네. 妻孥亦笑余.31)
초간은 42세 정월에 청주목사로 부임하였다가 그해 동월에 그만 두고 고
향으로 돌아갔다. 청주에 있는 강선루라는 누대에서 차운한 것이다. 누대의
이름과는 전혀 상관없이 인생살이, 특히 충청도 청주에서의 벼슬살이에 대
한 괴로움을 읊고 있다.
지방관을 지냈던 가운데 대구부사를 하던 시절은 초간에 있어 득의 시절
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교적 큰 고을의 지방관인데다가 고향 예천과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 시절에 공주에서 간행하려 하였
30) 權文海, ??草澗集?? 卷2 「和趙士敬韻」
31) 權文海, ??草澗集?? 卷1 「次西原降仙樓韻」
으나 간행하지 못했던 ??睡軒集??도 간행을 하였고, ??대동운부군옥??도 이 때
완성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대구부사를 하는 동안에도 벼슬살이하
는 괴로움을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갑신년 가을 칠월 달이 되어, 甲申秋七月,
궁궐에 하직하고 남쪽으로 향했네. 辭闕向南邦.
꿈속의 혼은 구중궁궐을 찾아 헤매고 夢繞天門九,
나그네의 귀밑머리는 서리처럼 세었네. 霜飄客鬢雙.
마음을 알아주는 것 거문고와 학뿐이고, 知心琴與鶴,
근심을 밀어내는 것은 강 같은 술이네. 排悶酒如江.
세상의 일을 이제 어찌할 수 없어, 世事今無奈,
낮게 읊조리며 홀로 창에 기댔네. 沈吟獨倚牕.32)
역시 대구부사를 하면서 지은 것인데, 이 시에서도 자조하는 마음을 드
러내었다. 「연보」에서는 이때의 상황에 대해 “당시에 權貴가 用事를 하여
선생이 배척을 받고 외직에 보임이 되었는데, 7년이 지나도록 부르지를 않
았다.”33)라고 하여, 그가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아
외직에 오래 있었던 사정을 밝혀 말하였다.
절의 앞길을 오고간 것이, 來往寺前路,
어느덧 여섯 해나 되었네. 居然歲六周.
지금 기축년 여름이 되어서는, 今逢己丑夏,
문득 갑신년 가을이 생각나네. 忽憶甲申秋.
32) 權文海, ??草澗集?? 卷1 「達城館偶吟」
33) 權文海, ??草澗集?? 「年譜」 “時, 權貴有用事, 先生見斥補外, 至七年不召, 夷然不以爲意曰,
‘此亦可以爲政, 勤於莅職, 儉於自奉, 抑豪强, 撫孤獨, 民便之, 府多大姓, 擅執鄕柄, 橫議
生事者, 及聞先生之風, 胥自戒勑, 不敢復遂前非.”
문서를 다루느라 흰머리 생기고, 簿牒凋華髮,
강호에서의 좋은 놀이 저버렸네. 雲泉負勝遊.
이곳 중은 쫓겨난 원에 익숙하다지만, 居僧慣出候,
응당 늙은 수령을 비웃으리라. 應笑老遨頭.34)
이시는 1589년(기축)에 지은 것인데, 시를 지으며 문득 갑신년 가을이 생
각난다고 했다. 초간은 갑신년 곧 1584년 8월에 대구부사에 보임이 되었다.
대구부사로 있은 지 5년이 지나서 처음 부임할 때의 일을 생각하며 지은
것이다. 그런데, 대구부의 문서를 정리하느라 머리만 세었다고 하였고, 강
호로 돌아가 좋은 놀이하자던 스스로의 다짐은 져버린 지 오래임을 노래하
였다.
그는 특히 마지막 연에서 근처 절에 갔을 때에 그 절의 중이 자신을 비
웃을 것이라 하였다. 왜냐하면, 지방수령직에 너무 오래 있기 때문이었다.
초간은 「達城衙軒 仲夏初偶吟」이라는 시의 마지막 연에서도 “관리 생활
여러 해에 얻은 것 무엇인가? 거울을 마주하니 흰 머리 뿐이로다.[爲吏數
年何所得, 鏡中空對雪千莖.]”35)라고 하여, 관리로서 수년을 지냈지만 얻은
것은 없고, 거울을 보니 흰머리만 늘었다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었다.
다음 시는 白居易의 「何處難忘酒」라는 시편을 본받아 지은 것인데, 모
두 4편으로 되어 있다. 2수는 호란을 겪은 일을 읊었고, 3수는 북계의 사민
을 대부분 수감하여 수감된 인원이 150인에 이름을 말하였고, 4수는 동서
분당에 대해 논한 내용인데, 다음의 첫수는 지방수령으로서의 고달픔에 대
해 읊었다.
어는 곳에서 술을 잊기 어려운가? 何處難忘酒,
몸은 피곤하고 장부가 쌓였을 때라네. 身縻簿領叢.
34) 權文海, ??草澗集?? 卷1 「次具柏潭韻 題大谷寺熙上人詩軸」
35) 權文海, ??草澗集?? 卷2 「達城衙軒 仲夏初偶吟」
쌀과 소금은 눈의 티처럼 적고, 米鹽塵眯眼,
수염과 머리는 희어 늙은이가 되었네. 鬚髮白成翁.
한 해가 저물어 갈 제 금호 밖에서, 歲暮琴湖外,
마음은 항상 궁궐 가운데 걸렸네. 心懸鶴禁中.
이 때에 한 잔 술마저 없다고 하면, 此時無一盞,
어떻게 가슴 속 번뇌를 씻을 수 있나? 何以蕩煩胸.36)
이 시에는 “달성에 와서 수령 노릇한 지 이미 두 해가 지났는데, 돌아가
고픈 생각이 날로 심해지지만 결단을 내리고 돌아가지 못하여, 스스로 탄
식하며 지은 것이다.”37)라는 주석을 통하여, 대구부사로 있으면서 2년이
지난 시점에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대구부사로 재직하던 시절은 비교적
득의 시절이었고, 대구가 고향 예천과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었음에
도 불구하고,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노래하였다.
「연보」에는 이 시를 짓게 된 동기에 대해 더욱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계미년(1583)과 갑신년(1584) 이후로 동서의 당론이 점점 심해져서 한 때
의 선류와 명사들이 잇달아 배척을 받았는데, 더러는 축출되기도 하고, 더
러는 廢固 되기도 하였다. 선생이 항상 세도를 걱정하고 탄식하면서 ‘당론
의 화는 반드시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시가로 읊기
에 이르렀는데, 백낙천의 체를 본받아서 「難忘酒」 시 4편을 지었다.”38)라
고 하였다.
객고에 시달리며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은 「立春夜有感」이라
는 시에도 잘 드러나 있다. 이 시는 2구에서 “또 새 해가 되었으니 병술년
36) 權文海, ??草澗集?? 卷1 「效白樂天體 吟得難忘酒四篇以寓意」
37) 權文海, ??草澗集?? 卷1 「效白樂天體 吟得難忘酒四篇以寓意」 “來守達城, 已過兩年, 歸思
日急, 未能決去, 因以自歎.”
38) 權文海, ??草澗集?? 「年譜」 “自癸甲以後, 東西黨論漸盛, 一時善類名士, 相繼被斥, 或黜或
廢, 先生常爲世道憂歎曰, ‘黨論之禍, 必與國相終始.’, 至形歌詩, 效白樂天體, 作難忘酒
詩四篇”
봄이라네[又是新年丙戌春]”라고 한 것으로 보아, 병술년에 지었음을 알 수
있다. 병술년은 1586년으로 초간 53세로 대구부사로 있던 시절이건만 초간
은 이 시의 3,4구에서 “나그네 가운데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고, 거울 속의
수염과 귀밑머리 은보다 하얗다.[客裏光陰流似水, 鏡中鬚鬢白於銀]”이라
하여, 객지에서의 어려움을 말하였고, 또 7,8구에서는 “객지에서의 꿈은 밤
마다 고향의 물굽이를 찾는데, 이튿날 아침에도 깨어보면 몸은 아직 돌아
가지 않았네.[旅夢連宵尋澗曲, 明朝還作未歸身]”39)이라고 하여, 고향으로
하루 빨리 돌아가기만을 바라는 마음을 읊었다.
이렇게 객지에서의 벼슬살이, 특히 지방관으로서의 벼슬살이에 회의를
느꼈던 초간이 지향하던 바는 바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3. 草澗의 思鄕詩의 世界
1) 客苦와 思鄕의 형상화
초간이 고향을 떠나 산 것은 27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그해 12월에 권지
성균관학유에 임명되고, 이듬해 안동교수로 있게 되면서라 하겠다. 이후로
서울과 지방, 그리고 고향 예천을 오가면서 벼슬살이를 하였다. 초간이 객
지에서 읊은 시 가운데 「洛城客中偶吟」은 서울에서 나그네 생활의 어려움
을 노래한 것이다. 이향의 어려움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읊은 시는 초간
의 경우에도 지방으로 떠돌며 지은 것이 많은데, 그는 서울에서도 다음과
같이 객회를 노래하였다.
오랜 나그네 생활에 주머니는 비었고, 客久囊垂罄,
39) 權文海, ??草澗集?? 卷2 「立春夜有感」
근심만 많고 병들어도 배불리 먹지 못하네. 愁多病不饒.
마음은 한강물과 같이 먼 곳으로 가고, 心同漢水遠,
눈에는 남쪽 아득한 고향의 구름만 들어온다. 眼入楚雲遙.
흰 머리를 빗으니 더욱 헝클어지고, 白髮梳邊亂,
거울 속 붉은 얼굴은 쇠락하였네. 朱顔鏡裏凋.
돌아갈 짐을 언제나 쌀 것인가? 歸裝何日理,
천 리 먼 곳의 내 집만 꿈꾼다. 千里夢吾寮.40)
한 구절 한 구절 모두 객지에서의 어려움과 객지에서 고향을 그리는 마
음을 읊었다. 오랜 나그네 생활을 하면서 형편이 넉넉지 않았고, 돌보아주
는 이도 없음을 알 수 있다. 머리는 더욱 세고 드물어져서 빗어도 제대로
빗기지도 않고, 얼굴은 쇠락하여 거울 속의 모습은 초췌하기 그지없다. 그
래서 더욱 고향이 그리운 것이리라. 흐르는 한강물만 바라보아도 아득한
고향이 떠오르는 일은 이러한 초간에게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짐을 꾸릴 생각만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에서는 꿈속에서도 고향의 집만 나타나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다음 「嘉興江上偶吟」이라는 시에는 고향을 떠난 뒤 하루빨리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객지에서의 생활이 얼마 오래지
않았지만, 근심에 머리가 세었다고 했다. 시적 과장이라고 할 수 있지만, 초
간이 객지생활을 얼마나 싫어하였던가를 잘 말하여 준다.
강가에는 봄이 모두 가버리고, 江上春歸盡,
홰나무 그늘에는 여름이 왔네. 槐陰夏半强.
꽃들이 때를 따라 피었다 지고, 芳菲時易失,
뜨거운 더위는 날로 더해만 가네. 炎熱日增長.
40) 權文海, ??草澗集?? 卷1 「洛城客中偶吟」
관청의 밥을 질리도록 먹으니, 喫飽倉中飯,
근심에 귀밑머리 하얗게 세었네. 愁添鬢裏霜.
올 때 매화꽃이 피려고 하였는데, 來時梅欲發,
돌아가는 날에는 열매 응당 누르리. 歸日子應黃.41)
고향을 떠난 지 오래되었다고는 하지만, 매화꽃 필 때 떠나왔다가 돌아
가는 날이 매실이 누렇게 익은 날이라면 사실 그렇게 많은 세월이 지난 것
은 아니다. 길어야 불과 서너 달에 지나지 않지만, 그간 관청의 창고의 쌀
로 해먹은 밥을 배불리 먹었다고 했으니, 벼슬살이가 얼마나 싫었던가를
알 수 있다.
초간은 「安保驛馬上遇雪」이라는 시에서도 “남쪽으로 갔다가 북쪽으로
오는 것 언제나 끝날까? 이 마음은 굶주림과 추위 때문은 아니라네.[南去北
來何日了, 此心非是爲飢寒.]”42)라고 하여, 객지를 떠도는 일이 하루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토로하였다. 다음 시에서도 반년 간의 객지 생활
을 한 뒤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읊었다.
문서를 정리하는 일에서 몸을 빼어서, 挺身文簿裏,
밖에 나가 강가의 배에 올라앉았네. 出坐江頭船.
어둑어둑한 새벽에 달빛이 비치니, 暗淡黃昏月,
어렴풋이 연기 낀 먼 나무가 보이네. 依俙遠樹煙.
물이 깊으니 물고기 살 길을 얻었고, 水深魚計得,
집이 멀어 나그네 근심에 쌓여 있네. 家遠客愁纏.
봄이 아직까지 다 가지는 않았는데, 春盡未歸去,
나그네로 떠돈 지가 반년이나 되었네. 羈遊已半年.43)
41) 權文海, ??草澗集?? 卷1 「嘉興江上偶吟」
42) 權文海, ??草澗集?? 卷1 「安保驛馬上遇雪」
43) 權文海, ??草澗集?? 卷1 「嘉興江船上偶吟」
지방관으로서 문서를 정리하는 일에 특히 싫어하는 감정을 누차 드러내
었던 초간이다. 「又次具景瑞和李鵝溪山海韻」라는 시의 3,4구에서도 “장부
를 정리하는 일은 사람을 쉬이 늙게 하니, 붉은 인끈을 가지고 쇠덕석을 비
웃지 마오.”44)라고 하였다.
여기에도 그 지겨운 문서 정리하는 일을 잠시 그만 두고 몸을 빼어 배에
올랐다. 문서정리의 괴로움을 달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강에 비치는 달이
며,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나무 등 모두 고향 생각을 일어나게 한다. 심지
어는 물이 깊어 살판이 난 물고기를 보아도 고향생각이 깊어간다. 이러한
생각은 객지에서 벼슬살이 하며 제야를 맞아서 그 감회를 읊은 「除夜吟」
이라는 시에도 잘 드러나 있다.
매화가지에 봄이 오려하니 제야가 되었는데, 臘盡梅枝歲屬除,
이튿날 아침은 한 해가 시작되는 날이라네. 明朝三百六旬初.
계룡산에 눈이 쌓여 추위는 더욱 심한데, 鷄峯雪積寒猶錮,
금강에는 얼음이 얼어 물결도 치지 않는다. 錦水氷鋪浪未舒.
호서에 있으면서 새 해를 맞는 나그네는, 湖外滯爲新歲客,
근심 속에서 고향의 편지조차 드물게 본다. 愁邊稀見故園書.
일 년 동안 객지에서 얻은 것이 무엇이던가? 一年所得知何物,
흰머리 천 줄기가 귀밑머리에 가득할 뿐이네. 白髮千莖滿鬢疏.45)
호서에서 있으면서 새해를 맞는다고 했으니, 공주목사로 있던 시절에 지
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계봉이 계룡산을 말하고, 금수가 금강을
말하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제야에 한 해를 마치며 읊은 시이지만,
날이 새면 또한 새해아침이다. 그런데 지난 일 년 동안 객지생활하며 얻은
것은 흰머리 천 줄기라고 하였으니, 그의 마음이 어떠했던가를 짐작할 수
44) 權文海, ??草澗集?? 卷1 「又次具景瑞和李鵝溪山海韻」 “簿領侵尋人易老, 莫將朱紱笑牛衣.”
45) 權文海, ??草澗集?? 卷2 「除夜吟」
있다. 다음 시는 「奉慈闈到楡城 以病久留」라는 시의 두 번째 작품이다.
구름은 계룡산의 비를 보내오고, 雲送鷄龍雨,
강이 깊어 나루에는 벼락이 치듯 한다. 江深霹靂津.
풍광이 곳곳 마다 좋기는 하지만, 風光隨處好,
나그네 병과 근심 새롭기만 하다. 客病與愁新.
두보의 거울에서 勳業을 보고, 杜鏡看勳業,
潘岳의 수레는 길의 먼지에 막혔네. 潘輿滯路塵.
유성의 하늘에 지금 반달이 떴는데, 楡城今半月,
고향의 봄 모습은 아득하기만 하네. 迢遞故園春.46)
이 시도 공주목사로 부임하면서 객지에서의 어려움과 고향을 그리는 마
음을 읊은 것이다. 두보의 거울에서 훈업을 본다는 것은 하는 일 없이 머리
만 세었음을 말하고, 반악의 수레는 어머니를 모신 수레이다. 어머니를 모
시고 가는 길에 병이 들어 楡城에서 오래 머물면서 그 감회를 노래하였다.
「又用金仁伯韻」이라는 시의 마지막 연에서도 “천 리 고향에 돌아가지 못
하고, 금강 나루에서 부질없이 돌아오는 조수만 바라보네.[千里陶園歸未
得, 錦津空對晩潮回.??47)라고 하여, 공주에 있으면서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읊었다.
2) 歸去來와 溪山興의 吟詠
초간은 평소부터 산수를 사랑하였고, 고향의 산수에 묻혀 노년을 지낼
생각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年譜」에서 “공은 평소에 임천을 좋아해서
항상 장수하며 노년을 지낼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고을 원에 매
46) 權文海, ??草澗集?? 卷1 「奉慈闈到楡城 以病久留」
47) 權文海, ??草澗集?? 卷2 「又用金仁伯韻」
조형기(2009), 「초간 권문해의 학문성향과 시세계」, ??동양예학?? 제22집, 동양예학회.
밝고 아름다우며 그윽한 곳에 세 칸의 정자를 지었다.”48)라고 한 것을 통
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연보」에 의하면, 48세 12월 공주목사를 그만둔 이듬해 2월에 초간정사
가 이루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草澗日記?? 및 酬唱錄 가운데에서
초간정사가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초간이란 자호를 쓰고 있다고 하였다.
아울러 정자는 비록 이해에 이루어졌지만, 정자를 짓고자 하는 계획은 이
미 早年에 정해졌었다고 하였다.49) 초간 정사의 조성과 관련해서는 ??초간
일기??의 임오(1582) 2월에 자세한 상황이 소개되어 있다.
8일 간혹 흐리고 간혹 개다. 초간 도연 가에서 정사의 터가 될 만한 곳을 발견
하였다. 인근 사람 30여 명을 빌려서 술과 음식을 먹인 다음, 못을 메우고 축대를
쌓게 했다. 정원 및 얼속 등과 취하도록 마셨다.
12일 개다. 또 용문사 승려와 용문동 사람들을 빌려서 정사의 밑 축대를 쌓게
했는데, 다만 돌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을 뿐 일을 마치지 못했다.
29일 개다. 박공직과 초간정사에 가서 소나무 몇 그루를 심게 했다.
24일 구름이 끼다. 초간정 동쪽 바위 밑에 물이 떨어지는 곳이 있는데 연못을
만들 만했다. 종들 수십 명을 시켜 둑을 쌓고 물을 끌어대게 하니, 깊이가 어깨까
지 잠길 정도였고 맑아서 고기를 기를 만했다.
25일 간혹 흐리다가 간혹 볕이 나다. 못 둑을 쌓은 것이 애초에 견고하지 못하
여 물이 많이 샜다. 종 한석 등을 시켜 다시 돌을 겹으로 넓게 쌓게 하고 사통을
만들어 물이 새지 않게 했다.
48) 權文海, ??草澗集?? 「年譜」 “先生雅好林泉, 常有藏修終老之計, 久縻州紱, 非其志也. 至是,
愛汶水之下溪山明媚幽絶, 卜築三間屋子. 又於東畔巖下, 鑿池養魚, 種以松竹, 日與監正
公杖屨逍遙, 酣飫經史.”
49) 權文海, ??草澗集?? 「年譜」 “十年壬午先生四十九歲正月, 道自商山, 謁盧穌齋守愼. 〇二
月, 草澗精舍成.”, “按日記及唱酬錄中, 前此已嘗自號以草澗, 蓋亭雖始成於是年, 而結榭
之計, 已定於早年, 如晦翁詩所謂詩成屋未就者耶.”
26일 오후에 비가 내리다. 정희수가 용문사의 승려들에게 권하여 괴목 몇 구루
를 초간 못 가에 옮겨 심도록 했는데, 한 그루는 말라죽고 한 그루는 살았다.50)
공주목사를 그만둔 뒤로 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단기간에 정사가 이루어
진 것을 알 수 있다. 2월에 완공을 하고 3월에는 벗들과 함께 초간정에 놀
러갔던 것을 일기에서 볼 수 있다.그만큼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
음이 간절하였던 것이라 하겠다.
그는 「嘉興江上偶吟」이라는 시에서 “오랫동안 나그네로 있으며 돌아가
는 것이 어찌 이리도 늦는가? 시내 남쪽에 나의 집이 있다네.[久客歸何晩
溪南有弊廬.]”51)라고 한 시를 통하여, 초간정사가 이루어지기 이전에도 고
향의 산수자연을 그리며 읊은 이러한 시들을 통해 그가 얼마나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던가를 알 수 있다.
「우음」이라는 시에서는 자연에 묻혀 여유롭게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읊었다. 앞 시내에 나가 낚시를 하지만, 꼭 고기를 잡으려는 마음이 느껴지
지 않는다. 낚시를 드리우고 고기가 잡히면 잡지만, 또한 잡히지 않으면 그
뿐이다. 그래서 날이 저물어 고기가 낚시를 물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낚시를
거두어 돌아온다고 하였다.
걸어서 앞 시내 가에 나가서, 步出前溪上,
낚싯대를 던지고 돌이끼에 앉았네. 投竿坐石苔.
해가 저물어 고기도 물지 않으니, 日晡魚不食,
낚시를 거두어 홀로 돌아오네. 收釣獨歸來.52)
위 시에는 어떠한 욕심이나 꼭 무엇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보이지 않는
50) 최재남(2001), 230~231면.
51) 權文海, ??草澗集?? 卷1 「嘉興江上偶吟」
52) 權文海, ??草澗集?? 卷1 「偶吟」
다. 담담하게 강호에 묻혀 지내는 선비의 모습이 보일 따름이다. 다음은 「
金愼仲新亭 敬次退陶先生韻 贈主人」이라는 시의 경련과 미련이다. 그토
록 돌아가고픈 고향에 있으면서 오히려 성은을 노래하였다.
바람이 성근 숲에 드니 가을 한을 더욱 흔드는데, 風入疏林秋攪恨,
기러기는 멀리 포구에 빗겨날아 나그네 마음 놀라네. 雁橫遙浦客驚魂.
뒤늦게 그윽하게 사는 흥취를 홀로 차지하니, 晩來獨占幽棲趣,
호산에서 늘그막을 보내는 것도 임금의 은혜라네. 送老湖山亦聖恩.53)
호산에서 늘그막을 보내는 것도 성은이라 한 것은 호산에 있게 된 것이
다행한 일임을 둘러말한 것이다. 그만큼 전원은 초간에게 있어 단순히 세
속을 떠나있는 피세의 공간이 아니라 삶의 활력을 주는 곳이었다.
이처럼 초간에게 있어 고향을 그리며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생각은
그의 의식의 근저에 매우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초간의 귀거래 의
식은 다음의 「向洛 宿素野村偶吟」이라는 시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시는 아
마도 서울로 가면서 소야촌이라는 데에서 자면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이 시
의 맨 뒤에는 “素野洞, 山有天柱, 地有葛坪.”이라는 주석이 있다.
십년간의 신세는 부평초처럼 정처가 없었는데, 十年身世任浮萍,
무슨 일로 오늘 아침 또 멀리 길을 가야 하는가? 底事今朝又遠征.
우뚝 솟은 높은 봉우리는 하늘이 기둥 삼으려 하고, 矗矗危峯天作柱,
깊고 깊은 그윽한 골짜기에는 칡으로 뒤덮였네. 深深幽谷葛爲坪.
쓸쓸한 나뭇잎이 부질없이 길을 메우고 있어, 蕭疏樹葉空埋路,
적막한 산속의 사립문은 반쯤 가시에 가렸네. 寥落山扉半掩荊.
네 번 지방관을 지내니 머리는 하얗게 세려하니, 四珮銅魚頭欲白,
53) 權文海, ??草澗集?? 卷2 「金愼仲新亭 敬次退陶先生韻 贈主人」 “愼仲先君參判公得亭基于
洛江上, 未及成, 愼仲繼構之.”
돌아가 늘그막에 밭을 가꾸는 것만 못하리. 不如歸去老耘耕.54)
고향을 떠나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하는 벼슬살이에 지친 마음이 역력히
드러나 있다. 시의 내용으로 보면 10년간 네 번 지방의 수령을 지냈다고 하
였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이 아니고, 지금 또 다른 곳으로 지방으로 가면서
그 고초를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지방관을 지내며 보낸 세월과 그 일을 하
며 겪은 어려움으로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
아가서 밭 갈고 김매는 일을 하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초간은 「醴泉館 次城主柳君實世茂韻」이라는 시에서 “인끈을 던지고 돌
아가는 계획은 이미 늦어, 금년에 또 국화꽃 피는 때를 그냥 지나네.[投紱
歸來計已遲, 今年又負菊花時.]”55)라고 하여 마치 도연명처럼 인끈을 집어
던지고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그러한 생각을 실행하는 것이 이미
늦었는데, 올해도 가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였다. 다음 시에서도 하루빨리
고향의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읊었다.
이 몸은 늙은 누에처럼 세 번 잠자고자 하고, 一身蠶老欲三眠,
세상의 일은 분분하게 눈앞에서 시끄럽네. 世事紛紛鬧眼前.
맑은 시냇물 옛 소리는 항상 귀에 들리는데, 淸澗舊聲常在耳,
봄 연기 속을 달리며 낚시질 하리라 다짐하네. 自期歸釣趁春煙.56)
객지에서의 몸은 잠자는 누에처럼 무겁기만 하고, 세상일은 분분하기만
하다고 했다. 그러나 고향의 일을 회상하고 꿈꾸는 모습은 밝고 날렵하기
만 하다. 세상의 이런저런 일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지만, 고향의 물소리는
여전히 귀에 들리는듯하며, 누에처럼 무거운 몸은 어느새 봄 연기 속을 달
54) 權文海, ??草澗集?? 卷2 「向洛 宿素野村偶吟」
55) 權文海, ??草澗集?? 卷1 「醴泉館 次城主柳君實世茂韻」
56) 權文海, ??草澗集?? 卷1 「又用前韻 呈雙松 竹林兩丈」
리며 낚시질하는 모습으로 바뀌는 것이다.
위의 시는 고향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꿈꾸는 것인데, 다음 板谷이라는
곳에서 師傳 成汝諧에게 보내는 「板谷 和贈成師傳和仲汝諧」이라는 시에
는 실제 자연에 묻혀 살아가는 모습이 드러나 있다.
풀이 덮인 길에는 찾아오는 이 없는 지가 오래되니, 草徑無媒久,
생애의 일이 방 한가운데에서만 일어납니다. 生涯一室中.
골짜기가 깊으니 소나무가 푸르른 것에 부합하고, 谷深松翠合,
봄이 가니 여러 꽃이 다 시들었습니다. 春去衆花空.57)
板谷에 은거해 있으면서 지은 시이다. 스승에게 보내는 편지이지만, 초
야에 묻혀 지내면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즐거움을 말하였다. 하나의 방
안에서만 살아가면서도 답답함을 느끼지 않는다. 방문하는 이가 없어 섭섭
하거나 적막한 심경을 하소연하기 보다는 자연을 즐기며 감상하는 한가하
고 여유 있는 마음이 드러나 있다. 다음의 시에서도 그가 자연의 품에 안겨
서 살아가는 모습이 담겨 있다.
비단 수놓은 병풍이 둘린 길은 구불구불하고, 錦繡屛圍路轉廻,
짧은 다리 놓인 궁벽한 곳에 석문만 열렸네. 短橋窮處石門開.
옷깃을 풀어헤치고 앉아 늦은 송림을 감상하니, 披襟坐愛松林晩,
부평 같은 속세에 대한 생각이 반은 식었네. 浮世塵懷一半灰.58)
숨어사는 사람이 멀리 시내 가운데 있는데, 幽人遙在澗之中,
柴桑에 살고 있는 五柳居士를 찾아 왔도다. 來訪柴桑五柳翁.
한바탕의 청담을 끝내가 돌아가기가 늦어, 一罷淸談歸去晩,
57) 權文海, ??草澗集?? 卷1 「板谷 和贈成師傳和仲汝諧」
58) 權文海, ??草澗集?? 卷1 「次使相韻 贈趙仲實惟誠」
입고 있는 碧蘿衣에는 은사의 풍이 있도다. 碧蘿衣帶芰荷風.59)
속세에 있으면서 하루빨리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했다가도 막상 자연으
로 와서는 임금을 그리고 벼슬에 목말라 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초간
은 앞의 시에서 자연에 있으면서도 속세의 생각이 반은 식었다고 했다. 그
리고 뒤의 시에서는 자연에 묻혀 지내는 자신을 은사와 같다고 하였다.
자연을 입으로만 노래한 것이 아니고, 상상 속에서 즐긴 것이 아니다. 이
처럼 진정으로 전원을 사랑하였기에 전원으로 돌아온 뒤의 전원은 단순히
시적 음영의 대상이 아니라 산수자연 자체가 곧 흥겨운 계산흥으로 이어진
다. 다음 「月夜舟上 次金彦遇愼仲韻 又求和」라는 시에는 계산흥이 잘 드
러나 있다.
배를 옮겨 강가에 대니, 舟移江上泊,
사람이 거울을 향하여 한가롭도다. 人向鏡中閒.
달은 삼경에 밝게 떠오르고, 蟾吐三更白,
바람은 유월에도 찬기운을 일으킨다. 風生六月寒.
천연에는 위아래로 그림자 비치고, 天淵上下影,
시골 주점에는 틈이 있다 없다 한다. 村店有無間.
반평생 즐기던 계산의 흥겨움이, 半世溪山興,
모두 오늘밤의 즐거움에 보낸다. 都輸此夜歡.60)
달밤에 뱃놀이를 하며 벗 金愼仲의 시에 차운한 뒤에 이 시에 화운하기
를 구하며 지은 시이다. 좋은 때 좋은 놀이를 하며, 벗과 시를 주고받는 일
을 하며 한껏 흥겨움에 고무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벼슬살이의 괴로움이
나 객지를 떠돌아 다녀야 하는 어려움은 이 시의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59) 權文海, ??草澗集?? 卷1 「金世驥訪栗村寓舍 贈一絶」
60) 權文海, ??草澗集?? 卷1 「月夜舟上 次金彦遇愼仲韻 又求和」
수 없다. 다만 즐겁고 흥겨운 심경이 구절마다 배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送金士純赴日本」이라는 시에서도 “서풍을 타고 돌아오는 배 모름
지기 일찍 달려와야 하니, 고향 산에는 가을 경치가 좋아 흥이 나기 때문이
라네.[回櫂西風須趁早, 故山秋好興堪乘.]”61)라고 하였다. 고향의 계산흥이
기다리고 있으니 일본에 갔다가 빨리 돌아오라는 것이다. 물론 일본에 무
사히 빨리 갔다 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노래한 것이지만, 계산흥을 통하여
그러한 상황을 말하였다는 것이 흥미롭다.
3) 기타 思鄕詩의 諸樣相
초간이 고향을 그리워했던 것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벼슬살이하며
혹은 객지에서 외롭게 지낼 때 지은 시에 많이 보인다. 하지만 그의 사향시
는 이에 그치지 않고 여러 가지 경우에 드러나 보인다. 고향에서 떠나와 있
으면서 고향이 그리워 시를 짓는 것은 물론, 고향으로 돌아가면서도 사향
시를 지었으며, 다른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내는 경우에도 고
향을 그리는 마음을 읊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를 차운함에 있어서, 그리고 죽은 이의 혼을
위로하는 만시에서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일이 이용되고 있다. 봄이 오면
봄이 와서, 눈이 내리면 눈이 내리는대로 고향이 그립고, 현실에서도 고향
의 모습이 눈에 선하고, 꿈속에서도 고향을 그리워함은 물론 꿈속에서 고
향을 보지 못하는 마음도 시로 읊었다.
그는 「又次具景瑞和李鵝溪山海韻」라는 시의 1,2구에서 “꿈속의 혼은
길이 고향을 향하여 날아만 가고, 봄이 온 시내 남쪽의 나그네는 돌아가지
못하네.[夢魂長向故山飛, 春半溪南客未歸.]”62)라고 하였고, 「又步門字韻」
이라는 시의 미련에서도 “돌아갈 것 생각하며 밤마다 부질없이 머리만 긁
61) 權文海, ??草澗集?? 卷2 「送金士純赴日本」
62) 權文海, ??草澗集?? 卷1 「又次具景瑞和李鵝溪山海韻」
고, 고향의 꿈이 때때로 수촌에 둘렸네.[思歸夜夜空搔首, 鄕夢時時繞水
村.]”63)이라 하였는데, 초간은 이들 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지방에서
벼슬살이 하는 것을 싫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읊었다.
하지만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비록 지방수령직에 있을 때만이 아니
라 중앙에서 임금 곁에 있을 때도 매한가지였다. 그는 「除夜 又用前韻支干
字」라는 시에서 “꿈속에서는 남쪽 고개만을 찾는데, 마음은 항상 북두성을
향하네.[夢幾尋南嶺, 心常拱北辰.]”64)라고 하여, 울에서 벼슬살이하며 마
음은 임금을 향하지만 생각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뜻을 읊었다.
초간이 늘 고향생각에 젖어 있었음은 「客中書懷 贈金季純」라는 시에서
“영남의 구름이 언제나 눈에 선하니, 돌아가는 꿈은 늘상 고향 문을 감도
네.[嶺雲長入望, 歸夢繞鄕閻.]”65)라고 하여 생시나 꿈속에서나 고향 생각
에 젖어 있음을 노래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의 「次南竹林張甫彦紀
韻 呈韓雙松希仲孝友」이라는 시에서도 봄을 맞아 고향에 돌아가고자 하
는 마음이 절실함을 읊었다.
바람과 해가 따듯해져 노루도 막 잠이 들었는데, 風和日暖麝初眠,
점점 봄빛이 눈앞에 가득해 짐을 깨닫는다. 漸覺春光滿眼前.
나그네 되니 밤이 오면 고향생각 깊어지고, 爲客夜來鄕思遠,
꿈속의 혼은 내 낀 고향으로 날아 들어간다. 夢魂飛入故山煙.66)
초간에게 고향을 그리는 마음은 어떤 경우라도 달래기가 어려웠던 것으
로 보인다. 봄이 와서 날이 좋으면 좋은 대로, 고향생각이 절실하고, 겨울이
되어 날씨가 사나워져도 고향에 대한 생각이 깊어만 간다. 다음 「比安客館
63) 權文海, ??草澗集?? 卷2 「又步門字韻」
64) 權文海, ??草澗集?? 卷1 「除夜 又用前韻支干字」
65) 權文海, ??草澗集?? 卷1 「客中書懷 贈金季純」
66) 權文海, ??草澗集?? 卷1 「次南竹林張甫彦紀韻 呈韓雙松希仲孝友」
雪夜偶吟」라는 시는 객사에서 눈 내리는 밤에 지은 것이다.
조그만 뜰에 바람도 잦고 눈도 개었는데, 小庭風定雪初晴,
차가운 달이 환히 비치니 밤은 더욱 맑도다. 冷月交輝夜轉淸.
외로운 객관에서 이불을 안고 선잠을 자니, 孤館擁衾成假寐,
고향에 돌아가는 꿈조차 분명하지 않네. 故園歸夢不分明.67)
이 시에서 고향에 돌아가는 꿈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은 고향에 대한 생
각이 약해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도리어 꿈속의 고향이 분명하게 보이지
않아, 더욱 안타깝고 그래서 더욱 그리운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다음 「舟
中夜半遇大風 得山字連押」라는 시에서는 꿈속에서라도 고향에 가고 싶지
만, 잠을 이루지 못하여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내었다.
한 밤에 바람이 거세어 산을 흔들 기세이고, 半夜風顚勢撼山,
온 강에 거센 물결이 산처럼 일렁거린다. 滿江驚浪湧如山.
배 속에서 자는 나그네 잠을 이루지 못하니, 舟中宿客難成寐,
꿈속에서 나비되어 고향에 갈 방법이 없네. 莊蝶無緣到故山.68)
장자가 꿈속에 나비가 되었던 것처럼 자신도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고향
에 가고 싶지만 그렇게 할 방법이 없다고 하였다. 객수가 너무 깊어 잠을
이루지 못하여 고향 꿈을 꾸지 못하는 아쉬움을 드러낸 것이다. 다음 「沃
川江上 書示同行朴公直」이란 시는 고향으로 가는 설렘을 읊었다.
길은 강가를 따라 가늘게 있으니, 路緣江岸細,
마치 무릉도원 들어가는 길 같네. 如入武陵源.
67) 權文海, ??草澗集?? 卷1 「比安客館雪夜偶吟」
68) 權文海, ??草澗集?? 卷1 「舟中夜半遇大風 得山字連押」
산은 수많은 봉우리마다 빼어나고, 山拔千峯秀,
강은 양쪽 협곡을 뚫고 달려 나간다. 江穿兩峽奔.
물고기와 용은 제 터를 만나 기쁘고, 魚龍欣得所,
새와 쥐는 마을에 있는 것 즐거워한다. 鳥鼠樂爲村.
사물을 보며 내 신세 한탄하노라니, 覽物嗟吾役,
돌아가는 마음은 고향생각 가득하네. 歸心滿故園.69)
이 시에는 고향으로 가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하다. 강가를 따라 뻗
어있는 길이 무릉도원으로 가는 길과 같다고 했으니, 그 안의 강과 산이 바
로 무릉도원인 셈이다. 이곳의 어룡은 물론이고, 새와 쥐까지도 즐거워하고
있다. 이처럼 사물이 긍정적으로 보이는 까닭은 바로 고향으로 가는 도중
이기 때문이었다. 다음 시는 권계창이 고향으로 가는 것을 송별하며 지은
시이다.
나그네로 떠돌아다니던 서울에서, 洛下萍蓬處,
그대가 자리의 보배임을 알았지. 知君席上珍.
한겨울에 함께 나그네 되었다가, 三冬同作客,
천 리 먼 곳 고향으로 홀로 간다. 千里獨還人.
백학이 깃든 푸른 소나무 길이요, 白鶴蒼松路,
푸른 오리 노니는 푸른 시냇가라네. 靑鳧碧澗濱.
고향마을에는 즐거운 일도 많으니, 鄕村多樂事,
마음 내키거든 봄풀도 밟아보게나. 隨意踏靑春.70)
첫머리에서는 權繼昌과의 친분을 노래했고, 나그네로 지내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을 읊었다. 그런데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 푸른 소나무에 백
69) 權文海, ??草澗集?? 卷1 「沃川江上 書示同行朴公直」
70) 權文海, ??草澗集?? 卷1 「送權子迷繼昌還鄕」
학이 졸고, 시냇가에 푸른 오리가 노는 지상낙원의 모습니다. 이것 말고도
고향에는 즐거운 일이 많다고 했다. 이를 통하여 초간이 고향을 얼마나 좋
은 곳으로 인식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초간이 고향을 그리워했던 일은 이처럼 다양한 곳에 드러나 있는데, 심
지어는 망자의 혼을 달래는 만시에서도 반영이 되었다. 다음 시에서 이러
한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시와 예에 대해서는 부친에게 묘하게 전해 받았고, 詩禮庭中得妙傳,
일생동안 의를 행한 것 모두 어질다고 추앙하네. 一生行義共推賢.
두 해 동안 객지에서 벼슬하며 관청에서 꿈꾸니, 兩年羈宦槐邊夢,
천리 먼 곳의 귀혼은 고개 밖에서 돌아오네. 千里歸魂嶺外天.71)
위의 시는 「輓厚陵參奉金彬之就彬」의 1-4구인데, 후릉참봉 김취빈의 만
사이다. 1, 2구에서는 부친에게 시와 예를 배워 당시의 사람들에게 어질다
고 추앙을 받았다는 것이다. 3, 4구에서는 그런 그가 능참봉이라는 말단의
벼슬을 한 지 두 해만에 죽어 그 혼이 고향 영남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
였다. 벼슬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이 많지만 그래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밖
에 없음을 말하였다.
이처럼 그의 만시에는 객지에서 죽은 혼령에 대해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달래고 위로하는 것이 많다. 「哭崔晛內子」라는 시의 미련에서는 “적막한
타향의 시든 풀 속에, 가련하게도 부질없이 외로운 혼이 되었네.[寂寞他鄕
衰草裏, 可憐空作一孤魂.]”72)라고 하여 자신의 최현에게 시집간 자신의 甥
女가 객지에서 죽어 고향에 가지도 못하는 외로운 혼이 된 것을 위로하였
다.
이밖에 「輓鄭大諫子中惟一」이란 시의 미련에서는 “魂返故園泉路遠。
71) 權文海, ??草澗集?? 卷2 「輓厚陵參奉金彬之就彬」
72) 權文海, ??草澗集?? 卷2 「哭崔晛內子先生甥女」
嶠南千里涕漣漣。”73)라고 하여, 서울에서 벼슬살이 하다가 죽어 머나먼
고향 영남으로 돌아가야 하는 혼백을 달래고 있으며, 「輓淸道郡守金翼甫
德鵬」라는 시에서는 “嶺邑羈魂飄不返, 漢津丹旆遠難追.”74)라고 하여 앞
의 시와 반대로 영남 청도에서 벼슬살이하다가 죽은 김덕붕의 넋을 위로하
고 있다.
4. 맺음말
이상에서 초간 권문해의 사향시에 대해 살펴보았다. 초간의 시 가운데
사향시는 큰 비중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초간의 삶과 생각을 이해
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초간의 시는 세도에 대한 우려를 드러내는 하나의 방편이었다. 초간은
시를 지음에 동서분당과 그에 따른 갈등에 대해 우려를 하고 이를 시로 드
러내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초간은 우려에 그치지 않고 당시 당로자에게
비판을 서슴지 않았고, 이러한 이유로 그의 환로는 순탄하지 않았다. 그래
서 그는 지방수령으로 전전하였으며, 변변치 않은 벼슬살이에 대해 환멸을
느꼈고, 이를 또 시로 드러내었다.
이처럼 시에서 객고를 노래하며 벼슬살이에 대한 환멸을 내비쳤던 그는
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향시를 지었다. 따라서 초간의 사향시는
우선 객고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사향에 대한 생각이 워낙 깊어서 사
향시의 면모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사향시는 대개 고향의 자연과 아울러 부모, 형제, 처자에 대한 생각이 함
께 드러나는데, 초간의 시에는 그러한 것을 찾아 볼 수 없다. 고향의 자연
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뜻만 드러난 것은 아마도 모친을 모시고 임지로 가
73) 權文海, ??草澗集?? 卷2 「輓鄭大諫子中惟一」
74) 權文海, ??草澗集?? 卷2 「輓淸道郡守金翼甫德鵬」
는 등 가족과는 함께 할 수 있지만, 고향의 자연을 어떻게 할 수 없었기 때
문인 것으로 보인다.
고향에 대한 자연을 그리워하던 마음은 곧 계산흥으로 이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계산흥은 스승 퇴계가 퇴처하여 자적하면서 즐기던 것으로 자신
도 자연의 품에 돌아가 산수 강호를 즐기며 한적하게 살아가고자 했던 뜻
이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초간은 현실에서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의 산수를 잊지
못해함은 물론 꿈속에서도 고향을 그리고, 다른 사람이 고향으로 가는 것
을 보아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를 지었고, 심지어 고인을 위로하는 만시
에서도 사향에 대한 생각이 자주 드러났다.
<투고일:2012.11.8 / 심사일:2012.11.24 / 심사완료일:2012.12.14.>
참고문헌
權文海, ??草澗集??, 경인문화사 영인본.
權文海, ??草澗日記??, 한국학중앙연구원, 1997.
최재남(2001), 「초간 권문해의 삶과 시세계」, ??한국한시작가연구?? 6집, 한국한시학회.
조형기(2009), 「초간 권문해의 학문성향과 시세계」, ??동양예학?? 제22집, 동양예학회.
Abstract
A Review on the Cho-gan Kuen Mun-hae's homesicking poems
Yun, Ho-jin
I’ve looked through Cho-gan Kuen Mun-hae’s homesicking poems above.
Among Cho-gan’s poems, homesicking poems constitute plenty of part, and
they contain significant information to understand his life and thinking.
Cho-gan’s poetry is the one way to reveal his concern about political
authority. Cho-gan wrote poetry to show his worry about the conflict between
West and East parties. However, Cho-gan didn’t just stop there and worry. He
unhesitantly criticised the party officers, and for this reason, his career was
discouraged. He moved from place to place just to be a local officer, so he
became disillusioned with his life as an officer that he wrote about it in his
poetry also.
Cho-gan who sang the suffering from living away from home had been
written homesicking poems revealing his mind toward home. Therefore, his
homesicking poems can be said that they are related to his suffering from living
away from home, and his thinking of home was so intense that his homesicking
poems have a variety of aspects.
General homesicking poems reveal both longing for the nature of his
hometown and longing for meeting his family, but in his poetry only shows his
will to go back to the nature of his hometown. That’s because he could take his
family where he went, but he could not take the nature of the hometown with
him.
His yearning for the nature of his hometown was strictly connected to Gye
Shan Heng. Gye Shan Heng was the place where his teacher, Tue Gye, enjoyed
rest of his life after his retirement. In this sense, we could see that Cho-gan
also wanted to come back to the bosom of the mother earth and live retired life
like his teacher.
As above Cho-gan missed his hometown in reality and also even dreamed
about it. He wrote poems when he saw someone went to his hometown and
even an elegy which was supposed to console the dead revealed his thinking of
the hometown.
Key words : Cho-gan(草澗), Kuen Mun-hae(權文海), homesicking poems, homesicking,
hometown, local officer, Gye Shan Heng(溪山興), the nature of his hometown,
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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