溪堂偶興十絶 -退溪 李滉
溪堂偶興十絶 - 退溪 李滉
[1]
四麓唯紅錦 사방 산 기슭엔 오로지 붉은 비단이요
雙林是碧羅 양 수풀엔 푸른 넝쿨이로다.
豈知淳朴處 어찌 알았으랴? 순박한 이곳이
還被化工誇 도리어 조화옹의 자랑을 입을 줄을.
[2]
彴跨溪背度 징검다리는 시내 등을 걸터앉아 건너고
堂依壑勢開 서당은 구렁의 형세에 기대어 열렸도다.
從他笑深僻 남들은 깊은 외곬이라 제멋대로 웃지만
素履足徘徊 내 분수에 맞아 배회하기 족하다네.
[3]
開鏡爲蓮沼 연꽃 연못은 열린 거울같고
披雲作石門 돌문은 펼쳐진 구름 같아라.
和風吹澹蕩 화창한 바람 불어 조용히 움직이고
時雨發絪縕 때맞은 비 원기를 왕성하게 하는구나.
[4]
石竇疏泉遠 바위틈에 샘이 열려 멀리 가는데
山根卜幽宅 산밑에 그윽한 집을 세웠네.
客來愁絶險 손님은 험한 곳 오시느라 근심하고
還往 悠悠 오고 감이 아득히 멀어라.
[5]
盡日雲含雨 온종일 구름은 비를 먹음고
移時鳥喚春 새들은 옮겨다니며 봄을 부른다.
山村頗狎虎 산골 마을엔 자못 범과도 친하고
溪路少逢人 시냇길 만나는 사람도 적어라.
[6]
已著游仙枕 이미 신선놀이 잠을 자고
還開讀易窓 다시 주역을 읽노라 창을 열었네.
千鍾非手搏 천 섬의 많은 녹 손수 잡지 않고
六友是心降 여섯 벗에 마음이 가라앉는다.
松竹梅菊蓮己爲友
(소나무, 대나무, 매화, 국화, 연꽃, 그리고 내가 벗이 되다.)
[7]
布穀催田務 뻐꾸기는 밭일을 재촉하고
提壺勸客愁 접동새는 나그네의 근심을 자아낸다.
更憐雲外鶴 더욱이 구름밖의 학이 어여뻐라
無語立松頭 말없이 소나무 가에 서 있구나.
[8]
爛熳堆紅紫 흐드러지게 홍색 자색이 쌓이고
淸新遶綠靑 맑고 새롭게 녹색 청색을 둘렀다.
三杯偶獨酌 석 잔술 우연히 홀로 앉아 기울이나니
萬事本無營 일만 가지 일 본디 경영함이 없었더라.
[9]
因病投閒客 병으로 한가로운 나그네 되어
緣深絶俗居 깊은 곳 살면서 속된 일 끊었네.
欲知眞樂處 진실로 즐거운 곳 알려고
白首抱經書 흰 머리로 경서를 안았네.
[10]
掬泉注硯池 시냇물 움켜다가 벼루에 붓고
閒坐寫新詩 한가로이 앉아서 신시를 쓰노라.
自適幽居趣 그윽히 사는 정취 스스로 즐거우니
何論知不知 남이야 알든 모르든 무엇을 논하랴?
[자연을 보는 안목]
위 열 절의 시를 크게 나누면 앞 다섯 절은 정경을 노래하고, 뒤의 다섯 절은 그 정경 가운데다 뜻을 넣고 있다.
첫 절은 서시이다. 계당 주위 꽃 핀 경치를 노래하며 여기에 이렇게 조화옹이 꾸며놓을 줄 누가 알았겠느냐 하는 말이다. 어쩌면 예사로이 보일 것도 같은 그 풍경을 이토록 아름답게 보시는 것이다. 진실로 자연은 보는 사람의 안목에 달린 것이란 말이 실감난다. 아무리 천리마가 있은들 백락이 없다면 어찌 그 구실을 하겠는가? 또 비록 천리마가 아니더라도 백락의 눈에는 말들 모두의 장점이 다 보였을 것이다. 그 장점을 보는 눈, 그게 백락의 눈이다.
둘째 절에서는 더 가까이 계당의 위치를 말하고 이곳에서 소요하는 즐거움을 노래한다.
첫 절이 계당 주위의 정경을 아우르는 서시라면
둘째 절은 뜻을 밝히는 서시라 할까? 남들이 너무 깊은 두메라 웃겠지만 구애됨이 없이 노닐겠다는 것이다.
셋째 절은 연못과 돌문을 만들고 거기 바람 불고 비 내리어 자연과 조화되는 정경이요,
넷째 절은 바위를 뚫고 나오는 샘을 말하고 이 험한 곳에 손님도 오기 어려움을 노래하며,
다섯째 절은 이 산골에 봄이 옴과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순박함을 노래하고 있다.
여섯 째 절에서는 이 산골에서의 자적한 생활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낮잠을 자고 주역을 읽으며 벗들과 즐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신까지 넣으셔서 여섯 벗이라 함이 의미 심장하다. 보통 벗으로 삼는다 하여 어디까지나 인간인 내가 중심인데 선생께서는 당신 자신까지 포함하여 여섯 벗이 된다고 하셨다. 아예 당신 자신도 자연의 일부로 간주하시는 것이다. 이야말로 진정한 물아일체 (物我一體)가 아닌가?
일곱 째 절에서는 새들이 등장하고 있다. 뻐꾸기 접동새 그리고 학 등이다. 그 가운데 뻐꾸기는 농사일을 재촉하고 접동새는 객수를 자아내게 하며 학은 의연히 서 있음으로 위엄을 드러낸다. 봄의 또 하나의 정경인데 다른 절과는 달리 당신의 뜻을 말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말하지 않아도 끝의 학의 모습에서 당신의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을 은연중 다 하시고 있는 것이다 곧 그와 같은 고고함을 흠모하시는 것이다.
여덟 째 절에서는 온갖 꽃들로 쌓인 모습을 대하며 술잔을 기우리시는 여유로움 가운데 애초부터 욕(慾)이 없었음을 노래한다. 욕이 없이 자연을 대할 때 참다이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지자(智者)만이 가능한 일이다. 아홉째 절은 한가한 객이 되어 경서를 읽는 즐거움을 노래한다. 마지막 절은 그 가운데 생활하면서 시를 쓰는 즐거움을 노래한다. 남이야 웃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겠다고 한다.
* 물아일체의 경지 - 이상으로 감상해 본 바 진실로 유유자적하시는 선비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한 점 티끌 없이 깨끗한 삶의 모습이다. 자연을 완상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연과 합일되는 세계이다. 그야말로 물아일체의 경지에 다다르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오랜 기간 수양의 결과이리라. 그러나 수양으로만 될 수 있을까? 수양에 앞서 바탕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 바탕 위에 뼈를 깎는 자기 수양의 결실로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그리하여 안으로 온축된 것이 밖으로 저절로 표출되었으리라. 그러므로 이렇게도 꾸밈없이 절로 흘러 나왔으리라. 우리 같은 범인들은 바탕도 애초에 모자라는 데다 마음을 다잡지 못하니 늘 욕에 끌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즐기지 못하고 속사에 매여 허덕이다 마치는 게 아닐까? 한 번만이라도 저 경지에서, 저 자연을 바라본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다시금 그 눈, 그 삶이 우러러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