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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溪先生 墓碣銘

권석낙 2023. 4. 10. 22:17

1. 退溪先生 墓碣銘(퇴계선생 묘갈명)

 

-高峯 奇大升(1527-1572)이 쓴 퇴계선생 墓碣銘에 보면 "퇴계선생 自銘"이라고 쓰여 있다.

(先生自銘 高峯奇大升敍其後)

 

生而大癡 壯而多疾

中何嗜學 晩何叨爵

學求猶邈 爵辭愈嬰

進行之跲 退藏之貞

深慙國恩 亶畏聖言

有山嶷嶷 有水源源

婆娑初服 脫略衆訕

我懷伊阻 我佩誰玩

我思古人 實獲我心

寧知來世 不獲今兮

憂中有樂 樂中有憂

乘化歸盡 復何求兮

 

나면서부터 크게 어리석었고 자라면서는 병도 많았네.

중년에는 어찌하여 학문을 즐겼고, 만년에는 어찌하여 벼슬을 외람되이 차지함이었던가.

학문은 구할수록 더욱 멀어지고, 벼슬은 마다해도 더욱더 주어졌네.

나아가서는 어긋나 넘어지나니, 물러나 숨어살기로 곧아졌네.

나라 은혜에 매우 부끄러우나, 진실로 성현 말씀에 두려움이라.

산은 높고 또 높으며, 물은 흐르고 또 흐르난다.

속세의 평복으로 갈아입고야, 모든 비방을 떨쳐버림이로라.

나의 뜻 이 막힘에, 나의 마음 패물 그 누가 감상해줄까.

내가 옛 사람을 생각하노니, 진실로 내 마음에 부합되누나.

어찌 후세 사람들이 지금의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까를 짐작하리오.

근심 속에 즐거움이 있고, 즐거움 속에 근심이 있는 법.

천명에 따라 조화를 타고 다함으로 돌아가나니, 또 다시 무엇을 구함이련가.

퇴계 선생의 이 ‘自銘’(자명)은 퇴계선생 묘비에도 적혀 있다. 묘갈명의 앞부분에 선생의 자명을 적고 그 다음에 기대승이 쓴 글이 병기되어 있다. —* 退溪先生墓碣銘 退溪先生 自銘 竝書 奇大升 撰

 

2. 退溪集 言行錄 遺事 - 李珥(1536-1584)

 

退溪先生(1501-1570)은 성품과 도량이 온순하고 순박(醇朴)하며 순수하기가 玉과 같았다.

性理의 학문에 뜻을 두었으므로, 젊어서 과거를 보아 급제하였으나 벼슬하기를 즐기지 않았다. 을사사화에 이기(李芑, 1476-1552, 尹元衡과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킴, 容齋 李荇의 兄)가 선생의 명예를 시기하여 임금께 아뢰어서 관작을 깎아 버리니, 사람들은 모두 억울한 일이라 일컬었다. 그래서 이기는 다시 아뢰어 벼슬을 회복시켰다.

 

선생은 여러 간신들이 권세를 잡는 것을 보고 더욱 조정에 나설 뜻이 없어서, 벼슬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明宗(1534-1567)은 그의 물러남을 아름답게 여겨, 여러 번 벼슬의 품계를 올려 자헌대부(判書, 資憲大夫)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禮安 땅의 退溪에 자리를 잡고 살면서, 스스로 退溪라고 號하였다. 衣食은 겨우 유지하였으나 담박한 데 맛을 들여, 세리(勢利)와 분화(紛華)를 뜬구름같이 보았다.

 

만년에 陶山에 집을 지으니, 자못 林泉의 흥취가 있었다. 명종 말년에 소명이 여러 번 내렸으나, 굳게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明宗은 이에 ‘어진 이를 불러도 이르지 않는다.[招賢不至]’라는 것을 시제(詩題)로 내어, 가까운 신하를 시켜 부(보통은 6자를 한구로 하여 짓는다)를 지으라 하고, 다시 畵工을 시켜 그가 사는 陶山을 그려서 그림으로 바치게 하였으니, 그 선생을 공경하고 사모함이 이와 같았다.

 

先生의 학문은 의리가 정밀하여 오로지 朱子(1130-1200)의 가르침을 따랐고, 그 밖의 여러 다른 학설도 분명히 알고 자세하게 통달하였으나, 주자의 학설로써 절충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평상시 한가히 혼자 있으면서 典墳(經典) 이외의 다른 것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고, 혹 때로는 水石을 찾아 거닐면서 생각한 바를 읊어 한가한(소산한) 흥취를 나타내었다.

 

학자들이 혹 무엇을 물으면 곧 자기가 아는 바를 다 일러 주었고, 그리고 또 사람을 모아 자기 스스로 스승인 체하지 않았다. 보통 때에도 잘난 체하지 않아 조금도 남과 다른 것이 없는 듯하였다.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이나 사양하고 받는 경우에 있어서는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어서, 남이 무엇을 보내도 그 마땅함이 아니면 끝내 받지 않았다.

 

지금 임금(河城君였던 宣祖, 1552-1608, 中宗과 昌嬪 安山安氏 소생의 德興大院君 초의 子)이 즉위(1567년)한 초에, 朝野에서 모두 올바른 정치가 실현되기를 바랐으며, 士論은 모두 “선생이 아니면 임금의 덕을 성취시키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고, 임금의 뜻도 선생에게 위촉하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이 쇠하고 글러서 儒者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임금의 마음이 바른 정치를 하기에 정성되지 않고, 대신들도 학식이 없어 한 가지도 시험해 볼 것이 없음을 보고, 선생은 간절히 벼슬을 사양하여 꼭 물러나기를 결심하였다.

 

陶山으로 돌아간 뒤에는 한마디도 당시 정사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세상 여론은 그래도 선생이 다시 나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이 갑자기 돌아가니, 나이는 70세였다.

 

조정이나 백성들은 모두 슬퍼하였고, 임금은 부고를 듣고서 못내 슬퍼하면서 영의정으로 추증하시고, 1등의 예로써 장사하게 하였다. 그 아들 준(寯,1523-1583)은 선생의 유언이라 하여 예장을 사양하였으나, 조정에서는 허락하지 않았고, 태학생인 성균관의 학생 들은 제물을 갖추고 제문을 지어 가서 제사를 지냈다.

 

선생은 비록 별다른 著書는 없으나, 의론하는 가운데 성인의 모범을 펴 밝히고 현인의 교훈을 드러내 밝힌 것이 세상에 많이 행해지고 있다.

 

중종 말년에 花潭 徐敬德(1489-1546)이 도학으로 세상에 이름이 있었으나, 그의 학설은 氣를 理로 인정한 것이 많았기 때문에, 선생은 그것을 잘못이라 하여 낱낱이 설명하여 분변하니, 그 말이나 뜻이 밝고도 환해서, 배우는 자들은 모두 그것을 깊이 믿었다.

 

선생은 유학의 종장이 되어, 趙靜庵(1482-1519) 뒤로는 그와 비교할 사람이 없었다. 그 재주나 그릇[器局]은 혹 靜庵에 미치지 못할지 모르나, 의리를 깊이 연구하여 정미함을 다하기는 또한 정암이 그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先生性度 溫醇 粹然如玉 志于性理之學 少以科第發身 不樂仕宦 乙巳之難 李芑忌其名 奏削官爵 人多稱枉 芑還奏復爵

 

先生見群奸執柄 尤無立朝之意 拜官多不就 明廟嘉其恬退 累加其階 以至資憲 卜居于禮安之退溪 因以自號 衣食僅足 味於淡泊 勢利紛華 視之若浮雲然

 

季年築室于陶山 頗有林泉之趣 明廟末 召命累下 固辭不至 明廟至以招賢不至爲題 命近臣賦之 又命畵工 畫所居陶山 爲圖而進之 其敬慕如此

 

先生之學 義理精密 一遵朱子之訓 諸說之異同 亦得曲暢旁通 而莫不折衷於朱子 居閒處獨 典墳之外 他不挂懷 有時逍遙水石間 吟詠性情 以寓蕭散之興

 

學者有問 輒罄所得 亦不聚徒以師道自處也 平居不務矜持 若無甚異於人 而其於出處進退辭受取予之節 不敢分毫蹉過 人有所遺 非其義終不取

 

今上初卽位 朝野顒望至治 士論皆以爲非先生不能成就聖德 上意亦屬於先生 先生見世衰俗末 儒者難以有爲 上心求治不誠 大臣又無學識 無一可式 故懇辭爵祿 期於必退

 

旣返陶山 言不及時政 輿情猶望其復起 而先生遽卒 年七十

 

朝野痛之 訃聞 上震悼 命贈領議政 葬以一等之禮 子寯以遺言辭禮葬 朝廷不許 太學諸生 共具奠爲文往祭之

 

先生 雖無別著之書 而議論之發揮聖謨闡揚賢訓者 多行於世 中廟末 有花潭徐處士敬德 亦以道學名世 其論多認氣爲理 先生病之爲說以辨之 辭旨明達 學者信服焉

 

先生 爲世儒宗 趙靜庵之後 無與爲比 其才調氣局 或不及靜庵 至於深究義理以盡精微 則又非靜庵所及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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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眞寶(眞城)李氏

 

李碩 → 李子修(松安君) → 李云侯 → 李禎 → 繼陽(1424-1488, 生2남2녀 埴, 堣1469-1517 松齋公) → 李埴(1463-1502, 生7男1女, 初配 義城金漢哲之女1460-1488 生2남1녀, 繼配 春川朴緇之女1470-1537 生5男 - 潛, 河, 女(辛聃), 瑞麟, 漪, 瀣1496-1550, 澄, 滉) → 李滉(初名 瑞鴻, 字 景浩, 諡號 文純, 1501-1570, 初配 金海許瓚之女1501-1527, 繼配 安東權礩之女1502-1546, 在側室) → 李寯 [1523-1583, 配는 奉化琴氏(琴榟의 女), 弟는 寀(1527-1548, 許氏所生), 寂(1531年 側室生)] → 安道 [1541-1584, 弟는 純道, 詠道1559-1637 ] → 嶷(詠道의 2子) → ……

 

퇴계선생은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숙부 堣(松齋公)에게 배운 바가 많았다. 숙부에게는 12살 때에 논어를 배우기도 하였다. 숙부 李堣(1469-1517)는 벼슬이 호조· 형조 참판과 嘉善大夫까지 올랐다.

 

※ 퇴계선생은 며느리(李寯의 配인 奉化琴氏 琴榟의 女)를 맞이할 때 수모를 당하면서 며느리를 맞이하였다고 한다. 당시 봉화 안동 일대에서 奉化琴氏가 양반가문이었고, 퇴계는 衙前 출신의 가문이었다.

 

이 며느리가 퇴계선생의 살아생전에 은혜를 많이 입어 "살아서 내가 시아버님을 모시는데 부족함이 많았다...그래서 사후에라도 다시 아버님을 정성껏 모시고 싶으니 내가 죽거들랑 아버님 묘소 가까운 곳에 묻어 달라" 는 유언에 따라 퇴계선생의 "묘" 아래에 묘를 썼다고 한다.

 

※ 李滉의 부친인 李埴은 장인인 예조정랑 김한철(金漢哲)이 서적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일찍 죽자 그 책들을 물려받아 이를 계기로 경사(經史)·제자백가(諸子百家) 등을 연구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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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人一日養을 不以三公換이라 <王安石 送喬執中秀才歸高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