性理의 학문에 뜻을 두었으므로, 젊어서 과거를 보아 급제하였으나 벼슬하기를 즐기지 않았다. 을사사화에 이기(李芑, 1476-1552, 尹元衡과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킴, 容齋 李荇의 兄)가 선생의 명예를 시기하여 임금께 아뢰어서 관작을 깎아 버리니, 사람들은 모두 억울한 일이라 일컬었다. 그래서 이기는 다시 아뢰어 벼슬을 회복시켰다.
선생은 여러 간신들이 권세를 잡는 것을 보고 더욱 조정에 나설 뜻이 없어서, 벼슬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明宗(1534-1567)은 그의 물러남을 아름답게 여겨, 여러 번 벼슬의 품계를 올려 자헌대부(判書, 資憲大夫)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禮安 땅의 退溪에 자리를 잡고 살면서, 스스로 退溪라고 號하였다. 衣食은 겨우 유지하였으나 담박한 데 맛을 들여, 세리(勢利)와 분화(紛華)를 뜬구름같이 보았다.
만년에 陶山에 집을 지으니, 자못 林泉의 흥취가 있었다. 명종 말년에 소명이 여러 번 내렸으나, 굳게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明宗은 이에 ‘어진 이를 불러도 이르지 않는다.[招賢不至]’라는 것을 시제(詩題)로 내어, 가까운 신하를 시켜 부(보통은 6자를 한구로 하여 짓는다)를 지으라 하고, 다시 畵工을 시켜 그가 사는 陶山을 그려서 그림으로 바치게 하였으니, 그 선생을 공경하고 사모함이 이와 같았다.
先生의 학문은 의리가 정밀하여 오로지 朱子(1130-1200)의 가르침을 따랐고, 그 밖의 여러 다른 학설도 분명히 알고 자세하게 통달하였으나, 주자의 학설로써 절충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평상시 한가히 혼자 있으면서 典墳(經典) 이외의 다른 것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고, 혹 때로는 水石을 찾아 거닐면서 생각한 바를 읊어 한가한(소산한) 흥취를 나타내었다.
학자들이 혹 무엇을 물으면 곧 자기가 아는 바를 다 일러 주었고, 그리고 또 사람을 모아 자기 스스로 스승인 체하지 않았다. 보통 때에도 잘난 체하지 않아 조금도 남과 다른 것이 없는 듯하였다.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이나 사양하고 받는 경우에 있어서는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어서, 남이 무엇을 보내도 그 마땅함이 아니면 끝내 받지 않았다.
지금 임금(河城君였던 宣祖, 1552-1608, 中宗과 昌嬪 安山安氏 소생의 德興大院君 초의 子)이 즉위(1567년)한 초에, 朝野에서 모두 올바른 정치가 실현되기를 바랐으며, 士論은 모두 “선생이 아니면 임금의 덕을 성취시키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고, 임금의 뜻도 선생에게 위촉하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이 쇠하고 글러서 儒者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임금의 마음이 바른 정치를 하기에 정성되지 않고, 대신들도 학식이 없어 한 가지도 시험해 볼 것이 없음을 보고, 선생은 간절히 벼슬을 사양하여 꼭 물러나기를 결심하였다.
陶山으로 돌아간 뒤에는 한마디도 당시 정사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세상 여론은 그래도 선생이 다시 나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이 갑자기 돌아가니, 나이는 70세였다.
조정이나 백성들은 모두 슬퍼하였고, 임금은 부고를 듣고서 못내 슬퍼하면서 영의정으로 추증하시고, 1등의 예로써 장사하게 하였다. 그 아들 준(寯,1523-1583)은 선생의 유언이라 하여 예장을 사양하였으나, 조정에서는 허락하지 않았고, 태학생인 성균관의 학생 들은 제물을 갖추고 제문을 지어 가서 제사를 지냈다.
선생은 비록 별다른 著書는 없으나, 의론하는 가운데 성인의 모범을 펴 밝히고 현인의 교훈을 드러내 밝힌 것이 세상에 많이 행해지고 있다.
중종 말년에 花潭 徐敬德(1489-1546)이 도학으로 세상에 이름이 있었으나, 그의 학설은 氣를 理로 인정한 것이 많았기 때문에, 선생은 그것을 잘못이라 하여 낱낱이 설명하여 분변하니, 그 말이나 뜻이 밝고도 환해서, 배우는 자들은 모두 그것을 깊이 믿었다.
선생은 유학의 종장이 되어, 趙靜庵(1482-1519) 뒤로는 그와 비교할 사람이 없었다. 그 재주나 그릇[器局]은 혹 靜庵에 미치지 못할지 모르나, 의리를 깊이 연구하여 정미함을 다하기는 또한 정암이 그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퇴계선생은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숙부 堣(松齋公)에게 배운 바가 많았다. 숙부에게는 12살 때에 논어를 배우기도 하였다. 숙부 李堣(1469-1517)는 벼슬이 호조· 형조 참판과 嘉善大夫까지 올랐다.
※ 퇴계선생은 며느리(李寯의 配인 奉化琴氏 琴榟의 女)를 맞이할 때 수모를 당하면서 며느리를 맞이하였다고 한다. 당시 봉화 안동 일대에서 奉化琴氏가 양반가문이었고, 퇴계는 衙前 출신의 가문이었다.
이 며느리가 퇴계선생의 살아생전에 은혜를 많이 입어 "살아서 내가 시아버님을 모시는데 부족함이 많았다...그래서 사후에라도 다시 아버님을 정성껏 모시고 싶으니 내가 죽거들랑 아버님 묘소 가까운 곳에 묻어 달라" 는 유언에 따라 퇴계선생의 "묘" 아래에 묘를 썼다고 한다.
※ 李滉의 부친인 李埴은 장인인 예조정랑 김한철(金漢哲)이 서적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일찍 죽자 그 책들을 물려받아 이를 계기로 경사(經史)·제자백가(諸子百家) 등을 연구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