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筆♡揮之
劉墉[石菴]
권석낙
2019. 10. 22. 21:39
[石菴] 劉墉[유용 : 石庵(석암)]의 글씨는 芝山房이 어린 시절, 學書(학서)할 때 顔眞卿(안진경) 다음으로 열심히 공부하던 書體(서체)이다. 劉石庵은 어린 시절, 董其昌(동기창)을 익혔고, 장년에는 蘇東坡(소동파)를 배웠으며, 나이 70 이후에는 北碑(북비)도 익혔다고 한다. 드디어 一家(일가)를 이룬 후에는 어떤 한 가지를 익히지 않고 모든 書法(서법)을 소화하여 완전히 자신만의 글씨를 썼다. 세상에는 "翁[옹방강], 劉[유석암], 梁[양동서], 王[왕문치]"라고 불렀는데, 그 가운데 최고는 당연히 이 劉石庵이었다. 劉石庵의 글씨는 표면적으로는 둥글고 부드럽게 보여 마치 한 뭉치의 솜 덩어리를 보는 것 같으나, 세밀히 살펴보면 오히려 골격과 맥락이 분명하며, 안으로 강하고 굳센 맛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徐珂(서가)라는 이는 "淸稗類鈔(청패류초)"에서 劉石庵의 글씨를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서 書藝(서예)를 말하는 자는 문득 '肉(육 : 점, 획의 살)'의 많고 적음만을 이야기한다. 글씨의 아름다움은 바로 정화가 쌓이고 함축되면서 굳센 기운이 안으로 수렴되어 자못 태극과 같이 혼연되면서도 삼라 만상을 품고 있는 데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높고 깊은 경지를 헤아리지 못할 뿐이다." 이 말은 확실히 옳은 말이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추종해서는 안 된다. 劉石庵은 조맹부를 배운 뒤, 다시 동기창을 배웠으나, 그의 작품에는 한 획, 한 점이라도 그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는 옛 명필들의 글씨를 공부했으되 결코 그들의 노예가 되지 않았던 사람이니, 이는 그와 나란히 글씨로 이름 높았던 옹방강과는 서로 상반된 처지이다. 옹방강의 글씨 또한 내력이 대단히 깊은 인물이지만, 그는 평생 "化度寺碑(화도사비)"만을 썼기 때문에 줄곧 구양순의 구속되고 검소하면서 자칫 옹졸해지기 쉬운 울타리에서 헤어나지를 못했다. 戈仙舟(과선주)는 劉石庵의 문하생이면서 동시에 옹방강의 사위였던 인물이다. 한번은 이 과선주가 석암의 글씨를 들고 장인인 옹방강에게 가르침을 청하였다. 옹방강은 한참 관찰하더니, "너는 네 스승 석암에게 가서 이리 여쭈어 보아라. 당신의 글씨 가운데 도대체 어느 글자가 옛 사람과 같은 게 하나라도 있는지를……" 하였다. 과선주가 이 말을 석암에게 했더니, 석암은 박장대소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석암이가 쓴 글씨는 바로 석암의 글씨이다. 너는 네 장인에게 가서 여쭤 보려므나. 도대체 장인 글씨는 어디에 있는 것이냐고. 도무지 찾지 못하겠노라고 한번 여쭈어 보렴." 그러니까 한 사람은 뼈를 깎는 노력으로 옛 서법을 배우되 점점 자기만의 것으로 "創新(창신)"하였고, 한 사람은 스스로 옛것의 범주 안에서만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이 두 사람의 우열은 안 봐도 넉넉히 알 일이다. 요즘에는 글씨를 단기간에 배우려 하고, 요령으로 되는 것인 줄 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붓대를 잡지 말 것을 권하고 싶다. 어설프게 흉내나 내는 글씨로 세상을 속이게 되기 때문이다. 요즘, 동네마다 있는 무슨 "문화 센터"니, 동사무소에서 운영하는 "서예 교실"이 참 문제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제대로 배운 참스승을 만나야 된다는 것이다. 잘못 익힌 書法(서법)은 평생 공력이 허탕이 될 뿐더러, 아무것도 될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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