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筆♡揮之

즐거운 논쟁

권석낙 2019. 9. 22. 14:10



"발[簾] 걷고 바로 앉으니, 바람과 달빛이 가이 없구나!"

 

이 구절은 "益齋(익재) 李齊賢(이재현)" 선생의 구절이다. "三峰(삼봉) 鄭道傳(정도전)"은,

"이 한 구절은 古人(고인)의 公案(공안)이다[一句截斷, 古人公案]."

라고 했다.

물론 이 구절만 가지고 論(논)하자는 게 아니다. 이 方外人의 벗, 김○○ 교수와 이 구절에 담긴 내용을 두고 아주 격론을 펼친 것을 정리하여 올린다.

그 전에 김 교수를 먼저 소개하면, 본시 서울 대학교 문리대 국어 국문학과에 다니다가 중도에 뜻한 바 있어 漢文學(한문학)으로 전공을 바꾼 다음, 임창순 선생 등, 漢文(한문) 대가를 모시고 앉은 자리에 곰팡이가 쓸 정도로 공부하여 지금은 "D 대학교"에 한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있다.  



<鉤簾[구렴 : 발을 걷다]>

"발[簾]"은 인간의 온갖 自私的(자사적) 욕망을 상징한 표현물이다.

그러니까 "발을 걷다"라는 표현은 인간이 "自私"를 이겨 냄으로써 私欲(사욕)에 가리워졌던 마음이 至純至善(지순지선)한 天理(천리) 그대로의 本然之性(본연지성)을 회복함을 일컫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이 "발[簾]"은 外部(외부)와 內部(내부)를 가리는 물건인 동시에 안팎을 구분하는 물건으로, 이 경우에 "발[簾]"은 인간의 내재적 분별심을 상징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이와 같은 분별심에 의해 자기 밖의 세계와 끊임 없는 대립과 갈등을 갖는다. 따라서 "발[簾]"은 이와 같은 인간의 온갖 자기 개인적 욕망을 상징한 표현물인 것이다. 우리 인간이 이를 이겨 냄으로써 본연의 성질을 회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危坐[위좌 : 바로 앉다]>

"鉤簾"이 "修己(수기)"의 내면적인 측면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危坐"는 修己의 외면적인 측면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

그러나 儒學[유학:선비의 학문]"에서는 단지 외면적인 측면을 뜻하지는 않는다.

"危坐"는 수양 방식의 하나로, 佛家(불가)의 "坐禪(좌선)"과 道家(도가)의 "坐忘(좌망)"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 儒家(유가)들은 佛家와 道家의 수양 방식을 "虛靜(허정)"이라 하여 자신의 "靜坐工夫(정좌 공부)"와 다른 것으로 여겼다.

朱子(주자)는 道, 佛의 靜은 "虛而靜(허이정)"이라 한 반면, 儒家의 靜은 "敬而靜(경이정)"이라 한 것이다.

본래 先秦(선진) 儒學(유학)에서는 "敬"자는 "삼가다, 공경하다"의 뜻으로 쓰인 것이지, 학문의

방법은 아니었다.

"敬"이 학문의 방법으로 확립된 것은 "程頥(정이)"에 와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靜時에도 靜함을 나타내기 위해 "主靜(주정)"은 "主敬(주경)"으로 함이 옳다고 한 것이다.



<風月[풍월:바람과 달(빛)]>

"風月"은 佛家의 禪詩(선시)에서도 쓰이는 상징적인 표현 구절로, "바람[風]"은 <無碍(무애)의 悟境(오경)>을, "달[月]"은 眞<如(진여)의 光明(광명)>을 가리킨다.

곧 바람의 드맑고 투명하고 시원함은 禪詩에서 온갖 번뇌와 망상의 벽을 깨고 깨달음에 이른 순간, 확 트인 無碍의 경지를 드러낸 상징 구절로 쓰인 것이다.

달 또한 밝다는 것에서 眞如의 光明으로, 그리고 드높게 휘영청 떠 세상 만물을 골고루 비춘다는 점에서 차별 없는 佛法(불법)의 顯眼(현안)으로 禪詩의 자연 소재로 등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달은 古今(고금)을 一如(일여)하게 있어 오는 恒久(항구)의 존재이며 절대적인 존재로 佛心 그 자체를 상징한 것이다.

이처럼 바람과 달은 인간 本然(본연)의 心性(심성)을 나타내는 데 쓰인 것이다.     



<無邊[무변:끝이 없다]>

​글자 그대로 心體(심체)의 廣大(광대)함을 나타낸 말이다. 鄭道傳(정도전)은,

"자신의 私欲(사욕)을 이겨 없애고 天理를 회복한다면 그 마음이 豁然(활연)하여 天地(천지)와 더불어 그 크기를 함께 하며 만물과 더불어 그 조화를 함께 하여 넓고도 커서 만나는 것마다 모두 즐거운 것이다."

라고 하였다.

"無邊"은 바로 여기서 넓고 큼으로 형용되는 마음의 경지를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益齋先生의 銘句(명구) 가운데 "風月無邊"은 自私를 초극함으로써 드러난 道體(도체) 본연의 인간 心性의 맑고 밝음과 큼을 상징한 표현으로써 孔子(공자)와 顔回(안회)의 樂[락;즐거움]과 曾點(증점)의 기상은 바로 이러한 경  

지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鄭道傳이 益齋의 銘句를 굳이 公案(공안)이라 하여 들어 보인 것도 "看話禪(간화선)"에서 禪僧(선승)들이 話頭(화두)를 붙들고 참구한 끝에 見性自覺(견성자각)을 할 수 있듯이 우리네 儒者(유자)들도 이 益齋의 銘句를 참구해 나가면 끝내는 儒學의 道를 깨우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여덟 글자를 놓고 이렇게 긴 시간을 격할 정도로 論爭(논쟁)해 본 것도 실로 오랜만이다. 각자 배웠다는 고집을 꺾지 않으려 한 탓도 있고, 서로 얼굴이 붉어질 지경까지 갔지만, 그래도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었음에 안도의 숨을 쉬게 되어 실로 다행스럽다.

 

이보시게, 김 교수!

어떤가, 자네 덕에 공부도 많이 하게 되었고 몰랐던 부분도 알게 되었으니, 참으로 고마운 심정일세. 그러나 나더러 고집 세다고 탓하지 마시게. 자네 고집에 비하면 내 고집은 [애교]에 지나지 않았다네. 참 자네 고집, 대단하이!

저 작은 글씨는 [논쟁 기념]으로 자네에게 기꺼이 하사(?) 할 터이니, 대대손손 "家寶(가보)"로 전하기 바라네. 흠.

다음에는 다른 것으로 내가 질문할 터이니, 마음 단단히 잡수시게나.

아마도 땀깨나 쏟을 것일세. 

아~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