乾坤(건곤)을 집으로 삼고 日月(일월)을 窻(창)으로 삼는다네 五嶽(오악)을 平牀(평상)으로 삼고 四瀆(사독)을 항아리로 삼는다 그 가운데 大醉(대취)한 한 사나이 깨어 있는 회포를 쓰고자 커다란 붓을 붙잡고 있구나
※ 四瀆 : 나라의 운명과 깊은 관계가 있다 하여 해마다 제사를 지내던 네 江(강). ☞ 東瀆, 西瀆, 南瀆, 北瀆. 張顯光[장현광:1554년 ~ 1637년 9월 7일]은 조선 시대 중기의 학자, 문신, 정치인, 철학자, 작가, 시인이다. 본관은 仁同(인동), 호는 旅軒(여헌)이다. 과거에는 뜻을 전혀 두지 않고 학문에 힘써 李滉(이황)의 문인과 조식의 문인들 사이에 학덕과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수많은 영남의 남인 학자들을 길러냈다. 西涯(서애) 등의 천거로 여러 차례 내외의 관직을 받았으나, 대부분 사퇴하였고 그 중에서 赴任(부임)한 것은 報恩縣監(보은 현감)과 義城縣令(의성 현령)의 외직과 內職(내직)으로는 工曹佐郞(공조좌랑), 司憲府掌令(사헌부장령), 刑曹參判(형조참판), 의정부우참찬 등이다. 1602년(선조 35) 공조좌랑으로 부임하여 정부의 周易(주역) 교정 사업에 참여하고 이듬해 잠깐 의성현령으로 부임했으며 그 외에는 모두 사양하거나 사직, 고사하였다. 그 뒤 형조참판직에 잠시 취임하였으나 이후 계속 관직을 사퇴하였다. 西涯는 그의 학덕을 높이 샀으며 자신의 아들, 柳珍(유진)을 그에게로 보내어 배우게 하였다. 1591년(선조 24) 겨울, 어머니 경산 이씨의 상을 당하였다. 상중에 특별히 전옥서참봉(典獄署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시묘살이하던 중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잠시 金烏山(금오산)으로 피신하여 있었다. 1594년(선조 27), 예빈시 참봉·제릉 참봉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이 해에 저서 <平說(평설)>을 지어 발표하였다. 1595년 가을 보은현감에 임명되어 부임했으나, 12월 관찰사에게 정장을 세 번 올려 거듭 사직을 청했고, 이듬해 2월 다시 세 번 사직을 청한 뒤 받아들여지지 않자 허가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 향리에 돌아갔다가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곧 직무 유기 혐의로 의금부에 잡혀갔다가 풀려나 되돌아갔다. 西涯와 김우옹 등이 그의 학덕을 높이 사 여러 번 천거하였지만 모두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던 고결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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