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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수첩

사부곡(思父曲) - 시인 조지훈 탄생 100주년

by 권석낙 2025. 6. 29.

시인 조지훈 탄생 100주년에 그의 큰 아들이 들려주는 사부곡(思父曲)

 

         아버지가 남긴 교훈(敎訓)  -  조광렬

 

  시를 쓰셔서 세상에 알려진 나의 아버지는 마흔 여덟이라는 짧은 생을 살고 가셨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지 어느덧 오십이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추억을 더듬기에는 너무나 오랜 세월이고, 내 인생의 들판 위에 남겨진 아버지의 흔적도 그리 많지 않다. 이 글은 조그만 기억의 서랍을 열어 하나씩 꺼내 보며 그려 보는 추억 속의 내 아버지의 모습이자, 내 기억 속에 간직된 글과 삶을 통해 아버지가 우리 자식들에게 남긴 교훈에 관한 이야기이다.

 

# 1 꽃이 지는 아침

 

  1968년 5월 16일 아침, 나는 마루에 걸려있는 큰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대학에서 아르바이트하여 번 돈으로 멋진 여름 양복을 맞췄는데, 생전 처음 입는 신사복이라 넥타이가 잘 매지지 않았다. 이 때 거울 속에 흰 한복 차림의 아버지가 나타나셔서 서툴게 넥타이를 매고 있는 나를 등뒤에서 도와 주셨다. 오랜 투병으로 기력이 약해지신 아버지는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어하는 표정으로 거울 속의 내 얼굴을 한동안 물끄러미 보고 계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끝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거울 앞의 그 순간이 아버지와 나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다음 날 새벽, 병원(메디컬센터 현 성모병원)에서 돌아가셨던 것이다. 그때 내 나이 스물 셋이었다. 전날 밤 바로 병원으로 달려가지 못했던 것이 애통하고 죄스럽고 후회스러웠다. 또 내가 해 입은 여름 양복이 마(麻:삼베)로 지은 옷이라 마치 상복(喪服)을 미리 해 입은 듯하여 내 마음은 더욱 아팠다.

 

 거울 앞에서의 아버지의 침묵 속에는 자식과 남은 가족에 대한 걱정, 아버지로서의 연민, 미안함, 바람과 부탁 등 수많은 말들이 숨어 있었겠지만, 그 어떤 말보다도 "사랑한다"는 말이 힘있게 담겨 있었다는 걸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먼 훗날 내가 아버지가 된 뒤였다.

 

# 2 아버지가 떠나가시던 날

 

 장례식 전 날이었다. 상주로 곡(哭)을 하다가 피곤하여 아버지 시신 곁에서 잠깐 눈을 붙였는데, 비몽사몽 중에 아버지가 나타나셨다. 어린 자식들과 가족이 걱정되셨던지 평소 집에서 입고 계시던 흰 한복을 입으신 채 우리집 지붕과 마당 위를 빙빙 돌며 날아다니시는 것이었다. “식솔들이 가엾고 걱정이 되셔서 아버지의 영혼은 저리도 우리 곁을 떠나지 못하시는구나” 나는 아버지와 한마디라도 나누고 싶어 벌떡 일어났으나,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반가움도 잠시 나는 슬퍼서 또 흐느꼈다.

 

# 3 아버지를 묻어드리던 날의 회상

 

 아버지를 묻어드린 그 날은 하늬바람에 파아란 잉크 빛 붓꽃이 피어나고, 하이얀 찔레꽃 짙은 향기속에 꿈결처럼 초록이 소록소록 쟁이는 유난히 아름다운 봄날이었다. 아기 진달래가 지천으로 피어 있고 뻐꾸기가 이따금씩 애끓게 울어 대는 산기슭을 따라 고려대 학생들이 운구하는 아버지의 시신을 모시고 거슬러 올라 다다른 곳, 그곳은 생전에 아버지가 몇 달 전 정성을 다해 이장(移葬)해 놓으신 당신의 어머님이 묻혀 있는 양지바른 언덕이었다.

 

 나의 할머니는 6.25동란 피난시절 대구에서 돌아가셨고, 그 곳에 묻히셨다. 세월이 흘러 그곳에 주택들이 들어서자 아버지는 이장을 결심하셨다. 당시 병환이 깊으셔서 운신하시기가 어려웠던 아버지는 대학생이었던 나를 대신 대구로 보내 큰 일을 치르게 하셨다. 이장을 마치고 돌아온 내게 아버지는 대견스러운 한편, 안쓰럽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상태가 어떻더냐? 흙은 좋더냐? “고 물으셨다 “네, 광중을 할 때 보니 석회질과 점토가 적절히 섞인 흙에 아름다운 기운마저 뿜어 나오는 듯해서 참 좋았어요."라고 말씀드리자 그제야 안심하신 듯 기뻐하셨다.

 

 아버지를 묻기 위해 파 놓은 땅 속을 들여다보며 그때의 일이 떠올라 애통해 하는 나에게 친척 어르신이 “망자(亡者)의 하관(下棺)시간이 맏상주가 태어난 시(時)와 맞지 않으니, 광렬이 너는 하관을 지켜보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말씀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물러나서 그곳을 등지고 풀밭에 쭈그리고 앉아 이름모를 풀꽃(훗날 그 이름이 ‘비비추'라는 것을 알았다) 송이만 애꿎게 손끝으로 뱅뱅 돌리며 흐느끼다가 하늘을 보기를 거듭하던 그 봄날은 이젠 못 견디도록 서럽고 아름다운 풍경이 되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어머니와 어린 우리 사 남매를 두고 아름다운 봄날 한 마리 새가 되어 저 건너 세상으로 날아 가시고 당신의 육신만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리 송라산 기슭에 묻히셨다.

 

# 4 내 안에 아직 살아 계신 아버지

 

 마흔 여덟의 그 아버지가 나를 오늘도 친히 가르치고 계신다. 내 마음이 흔들릴 때 곁에서 바로잡아 주시고, 힘들고 지쳐 쓰러질 때 격려와 용기를 주며 일으켜 세우시고, 외롭고 서러울 때 내 눈물을 닦아 주시고, 설익은 평안에 세상이 시비를 걸어올 때 나를 어루만져 주신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지혜가 당신이 남겨 놓은 글 속에 살아 생동하며 늘 향기를 뿜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한 장 한 장 넘어가는 책장 소리에 아버지의 음성을 듣는 듯하다.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문득 나에게 “죽음을 공부하며 살고 있느냐?”고 물어 보시는 듯한 느낌에 자주 빠지곤 한다. 아버지 생전에 아버지로부터 그런 질문을 한번도 받은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사랑하는 소년들아! 너희는 젊어서 먼저 죽음의 진리를 배워라. 죽음을 바르게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이 세상에서 큰 일을 이룰 수가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살아있는 세상의 눈앞의 이익과 명예에만 팔리지 말아라. 죽어서 너희 육체가 썩은 뒤에라도 뒷 사람의 위에 남을 그 명예를 더 높이 생각하여라. 사람이 세상에서 누리는 하찮은 영예는 미끼를 탐내는 고기떼와 부엌간을 엿보는 생쥐와 무엇이 가릴 바가 있겠느냐. 살아서 괴롭더라도 죽은 뒤에 더러운 이름을 남기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죽은 뒤의 더러운 이름은 대개 살아서 지나친 부귀영화의 허영으로 말미암아 마련되는 것이다. 더러운 이름을 남길 양이면 차라리 이름없이 살다가 죽어가는 것이 얼마나 부러운 일이겠느냐."                           

 

 이 글은 아버지가 아마도 내가 열 살이나 열 한 살쯤 되었을 때 쓰신 것으로 생각된다. 후회스럽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스무 살이 되기 전 중고등학교 시절에 읽었어야 할 이 글을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소년들아'를 ‘광렬아' 또는 '나의 사랑하는 자식들아'로 고쳐 읽으며 사무치게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아버지의 이 교훈은 하나의 종교처럼 내 마음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시대가 바뀌어도 변치 않고 알고는 있더라도 결코 행하기 쉽지 않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살아가면 갈수록, 애써 외면하려 하면 할수록 아버지의 이 가르침은 더욱더 내 마음 속 깊이 파고 들었다. 

 

  실제로 아버지의 이 가르침 때문에 세상살이에서 득보다는 손해를 보는 경우가 더 많았다. 오죽하면 아내가 “당신은 상을 차려줘도 못 집어먹고, 멍석을 깔아줘도 춤 못 추는 사람"이라고 할까. 그렇듯 나는 아무개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녔기에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었고, 그로 인한 중압감에 시달리며 갈등 속에서 살아왔음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때로는 아버지가 내 인생의 걸림돌이요, 그래서 내 인생이 죽도 밥도 안된다고 공연히 아버지를 원망하던 시절도 있었다. 거꾸로 봐야 제대로 보이는 세상, '꿩잡는게 매'요, ‘모로 가도 서울로 가면 된다'는 험한 세상을 살면서, “서울을 가지 못하더라도 바로 가야 한다"는 아버지의 교훈이 큰 기둥처럼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죽음에 대해 고민하고 공부하라"는 아버지 말씀의 깊은 뜻을 철부지 소년시절에 어이 내가 헤아릴 수 있었겠는가. 돌이켜보면, 지난 많은 날들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보다는 “무엇을 하며 사는가"에 더 집착하며 살았던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칠십을 넘긴 이 나이까지 나는 국가나 민족을 위해 한일도 없이 해외를 떠돌며, 여윈 골목길을 힘없이 걸어만 왔다. 죽는 연습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 5 독재정권의 불의를 준엄하게 꾸짖던 아버지

 

 나는 1960년 4월 19일을 잊을 수 없다. 그날 우리집으로 원고를 찾으러 온 기자를 앉혀 놓고, 그 자리에서 일필휘지(一筆揮之)로 4월 혁명의 감격을 직정(直情)의 분류(奔流) 그대로 쏟아 놓으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내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그렇게 태어난 시가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 어느 스승의 뉘우침에서>라는 시다. "..... 사랑하는 젊은이들아 / 붉은 피를 쏟으며 빛을 불러놓고 / 어둠 속에 먼저 간 수탉의 넋들아 /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늬들 공을 온 겨레가 안다 / 하늘도 경건히 고개 숙일 너희 빛나는 죽음 앞에 / 해마다 해마다 더 많은 꽃이 피리라 // 아 자유를 정의를 진리를 염원하던 / 늬들 마음의 고향 여기에 / 이제 모두 다 모였구나 / 우리 영원히 늬들과 함께 있으리라." 이렇게 끝나는 시다.

 

 그로부터 46년이 지난 2006년 9월 고려대학교 캠퍼스 안에 아버지의 시비가 세워졌다. 20년간 몸담으셨던 고려대, 아버지가 작사하신 교가에 묘사한  “안암의 언덕"에 시 <승무>와 함께 이 시가 원문전체 그대로 새겨졌다. 그날 시비 제막식에서 김종길 고려대 명예교수는 아버지와 고대가 인연을 맺게 될 당시, 당신이 메신저 역할을 하셨다는 회상과 함께 “지훈은 나라를 맡겨도 안심할 수 있는 분이었다. 지훈과 고대는 궁합이 잘 맞았다. 고대는 지훈을 필요로 했고, 지훈의 기질은 고대를 만나 더욱 빛났다"고 하셨다. 현승종 재단 이사장은 “우리 같은 소인배들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거인이었다"며 아버지를 잃은 아쉬움을 토로하셨다.

 

4.19 혁명 직전, 아버지는 부패한 자유당 정권을 겪으면서 “변절자를 위하여"라는 부제의 <지조론(志操論)>을 1960년 3월 <<새벽>>지에 발표하셨다. 이 글은 발표 직후 많은 지식인들의 뜨거운 공감을 샀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지조(志操)란 것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요, 냉철한 확집(確執)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자는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월간 조선>>이 선정한 ‘한국의 명문' 중의 하나로 선정된 글이다. 이 글이 실린 책이 <<지조론>>이란 제목으로 1962년에 간행되었는데, 이 책은 세상이 어지러울 때면 더욱 잘 팔리는 책이다. 지조론이 발표되고 한 달 후에 3.15 부정선거가 있었고, 그리고 다시 한 달 후에 4.19 혁명이 일어났다. 아버지는 4.19혁명에 직접 참여하셨지만, 4.19 이후 학생운동의 분열과 혼란이 발생하여 혁명이 실패로 돌아갈 것을 염려하며 혁명의 바른 길을 모색하셨다. 또한 아버지는 민주당 정권 분열로 인해 혁명정신이 실종하는 것을 우려하셨다. 이러던 차에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아버지는 학생운동의 혼란과 민주당 정권의 무능으로 인해 실패로 끝난 4.19 혁명의 정신을 다시 살릴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셨다. 적어도 5.16 초기에는 그렇게 기대를 거셨다. 국가재건 최고회의에서 추진하고 있었던 재건국민운동의 사상적 토대와 실천방법을 기술한 <나라를 다시 세우는 길 - 재건국민운동요강(再建國民運動要綱)>을 작성하기도 하셨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 세력이 추진했던 작업은 아버지가 기대했던 대로 추진되지 않았다. 오히려 당신의 기대와는 달리 자유와 인권을 억압하며 민족의 이익에도 반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판단하시게 된다. 이에 아버지는 1962년 4.19 혁명 2주년을 맞이하여 “죽음을 무릅쓴 학생혁명”의 완성을 역설하셨다.

 

 1965년에는 <그들은 과연 비애국적이며 무책임하고 옹졸한가>라는 논설을 통해 지식인을 폄훼한 박정희 대통령의 ‘진해 발언’을 비판하셨다. 이로 인해 아버지는 정치교수로 몰려 전화 도청을 당하는 등 사생활에 큰 침해를 받으셨다. 늘 사직서를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도 서슬 퍼런 군사독재정권을 향해 대통령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며 직언을 서슴치 않으셨다.

 

# 6 아버지의 담력(膽力)과 기개(氣槪)에 관한 일화들

 

 일제시대, 아버지의 조선어학회 시절의 이런 일화가 문인들 사이에 전해져 온다. 어느 날 종로 우미관 골목에서 문인들과 술을 마시다 종로 깡패들과 시비가 벌어졌다고 한다. 친구들은 모두 꽁무니를 빼고 아버지만 남아 깡패 두목과 맞붙어 싸우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술이나 한잔하고 싸우자"며 막걸리 몇 사발을 대작한 후 상대방을 달래어 돌려보내셨다고 한다. 이처럼 아버지는 완력으로 상대방에게 대들 수는 없어도, 담대함으로 힘센 사람의 기를 꺾는 데는 특출한 분이셨다고 한다. 당시에는 종로 깡패와 싸워서 맞지 않은 유일한 시인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고 한다.

 

  6.25 전란시의 또 다른 일화가 있다. 대구 피란시절 어느 날 콘센트 안에서 술자리가 벌어졌다. 가족들의 생사를 모르는 채 초조와 불안으로 무료를 달래던 전시문인들은 마침내 크게 취하여 고성방가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현역군인 하나가 권총을 빼들고 들어와서 천정에 대고 마구 공포를 발사하며 “지금이 어느 땐 줄 알고 술을 처먹고 이 짓들이냐?"고 대갈일성을 했다. 모두들 겁에 질려 벌벌 떨면서 쥐구멍을 찾고 있는데 벽력 같은 소리를 지르며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아버지였다. “이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함부로 총질이냐? 너는 애국을 총으로만 하는 줄 아느냐?  총보다 더 뜨거운 애국이 있는 줄을 모르는 놈 같으니… 펜으로 나라를 위하는 길도 있어 이놈아! 쏠 테면 쏴라! 이놈!” 그리고 달려들어 그 군인의 따귀를 후려치셨다. 눈에 불이 번쩍 난 그 군인은 총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사과를 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그 자리에 계셨던 박목월 선생께서 들려주셨다. “자네 아버지의 담력이 이러했다"고 하시면서…

 

  박선생께서 알려주신 일화가 하나 더 있다. 아버지의 왼손 손등 오른편에 푸르스름한 흉터가 하나 있었던 것을 우리 가족과 아버지의 지인들은 기억하고 있는데, 그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준 일화이기도 하다. 휴전이 되고 서울 수복 얼마 후인 1954년 5월경 명동성당에서 노기남 대주교의 초청으로 당시 문인들과 종교인들의 모임이 있었다. 칵테일 파티였는데 노주교가 ‘신(神)의 의지'를 강조하기 위해 “담뱃불만 잠깐 스쳐도 그 뜨거움을 참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의지"라고 하면서 지성인의 의지를 폄하(貶下)하는 발언을 하였다. 그러자 아버지는 지난 날 사육신(死六臣)의 사례를 들어 반박하셨다고 한다. 그래도 주교가 별로 공감을 하지 않자 아버지는 벌떡 일어나셔서 성냥개비 대여섯개에 불을 붙여 당신의 왼 손등에 올려놓으셨다. 손등이 지글지글 타들어갔다. 순간 주위가 숙연해졌다. 아버지는 태연자약하게 오른손으로 술잔을 들어 마셨다. 한참 만에 손등의 불이 제풀에 꺼지자 입으로 훅 불어서 타다 남은 성냥개비를 털어 버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남은 술을 마시고 밖으로 나가셨다고 한다.

 

해방 이후 좌우이념대결로 대학가가 들끓었을 때, 아버지는 그 소용돌이 속에서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으셨다. 어느 날 좌익학생이 교수였던 아버지를 벽돌로 찍으려 날뛰었다. 그러나 상대는 아버지의 의연한 자세에 압도당해 제풀에 꺾여 벽돌을 내려놓았다고 한다. 이 일과 관련하여 아버지는 학생들에게 “선생이 학생에게 맞을 수도 있다. 맞았느냐 안 맞았느냐 하는 것은 문제거리가 되지 않는다. 다만 당당하게 맞았느냐 비겁하게 맞았느냐 하는 것은 끝까지 따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는 후일 제자분들이 전해준 일화이다. 

 

# 7 아버지 삶의 정신적 바탕과 힘의 원천

 

아버지는 허세와 거짓과 비겁을 가장 싫어하셨다. 제자들에게는 “죽음을 공부하라”, "살찐 돼지보다 깡마른 학이 되라”, "언젠가는 우리는 죽어야 하고 죽음에도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죽는 까닭과 죽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틈만 나면 일깨워 주셨다고 한다. 

 

아버지와 같이 추호도 흔들림 없이 일관된 삶을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불혹의 나이를 지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런 삶의 힘을 길러주었던 바탕은 무엇이고, 그 정신을 낳은 배경은 어디에 있을까. 아무도 얘기해 주지 않는 ‘그 힘의 원천' 이 궁금했다. 그 원천의 일부는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우리 가문의 전통과 내력, 기질, 가학(家學)과 무관하지 않고, 아버지의 삶은, 그것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자신과의 처절한 투쟁의 소산이었다는 걸 나는 늦게서야 깨달았다. . 

 

나는 언제부턴가 만해 한용운(韓龍雲) 선생을 생각하면 아버지 얼굴이 오버랩되어 떠오른다. 아버지는 17세였을 때, 서대문 형무소 밖으로 버려진 김동삼 선생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르시는 만해 선생을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으로 찾아 뵌 후로 한용운 선생을 존경하고 흠모하셨다. 훗날 <한용운론>을 쓰시고 <한용운 전집>편찬에 온 정성을 다하신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아버지는 <한용운론>에서 “애국지사(혁명가)와 선승(禪僧)과 시인의 일체화, 이것이 한용운 선생의 진면목이요, 선생이 지닌 바 이 세가지 성격은 마치 정삼각형과 같아서, 어느 것이나 다 다른 양자를 저변으로 한 정점을 이루었으니, 그것들은 각기 독립한 면에서도 후세의 전범(典範)이 되었던 것이다"라고 쓰셨다. 이 짤막한 인물평을 통해 우리는 만해의 참 모습을 쉬이 포착할 수 있다. 아버지의 제자 박노준 선생(한양대 명예교수)은 “만해에 대한 지훈의 이러한 평가는 바로 그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선승’ 운운 자리에 ‘국학자'라는 말을 교체시켜 놓으면 위의 글은 영락없는 ‘지훈론'이 된다는 뜻이다. 이런 식으로 말해도 무방하리만큼 지훈은 만해의 정신과 학덕을 충실히 계승한 우리 시대의 고사(高士)였다"고 회상하신 적이 있다.  

 

  <<조지훈 전집>>의 편찬위원들은 그 서문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지훈은 항상 현실을 토대로 하여 사물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려 하였고, 멋을 척도로 하여 인간을 전체적으로 포착하려 하였다. 지훈은 전체가 부분의 집합보다 큰 인물이었다. 지훈의 면모를 알기 위해서는 그의 전체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현대사를 연구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한국 현대 지성사의 지도를 완성하는데 기여하리라고 확신하고, 지훈이 걸은 자취를 따르려는 사람들뿐 아니라, 지훈을 비판하고 극복하려는 사람들에게도 지훈의 전모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오래전에 절판된 전집을 편찬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서문은 한 시인의 전집을 새로 편찬하기 위해 씌어진 서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크고 우람하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아버지의 ‘전인적인 참 모습'인지도 모른다. 

 

# 8 언행이 일치하는 삶을 살다 가신 아버지 

 

   박정희 정권 초기였으니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때였다. 당시 아버지는 고려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는데 권력으로부터 집요한 유혹(전국구 의원이나 장관 제의)에 시달리고 계셨다. 어느 날 저녁상을 들여오시며 어머니께서, “오늘도 박대통령이 사람을 보냈는데 한 번 만나 보시면 어때요” 하시며 뻔한 대답이 나올 줄 알면서도 혹시나 하며 반응을 떠 보셨다. 농반 진반, 아니 진심이 더 많이 담기셨을 게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이야 대학교수의 경제형편이 그럭저럭 지낼만 하지만, 그 당시는 교수 월급은 지금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박봉이었던데다 아버지는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나 친구분들과의 약주 비용은 서슴없이 내놓으시면서도 집에서는 어머니가 파 한단, 콩나물 살 돈 마저도 아버지께 타서 쓰실 만큼 숨막히는 생활을 꾸려 가셨기 때문이다. 그 말씀을 들으신 아버지는 “당신 남편이 오물 뒤집어쓰는 꼴 보고 싶지는 않겠지요. 난세엔 벼슬하는 것도 아니거니와 선비는 나라의 기강이요, 사회정의의 지표인데 밖에서라도 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소. 그리고 학자는 학자의 자리에서 끝내는 것이 몸을 더럽히지 않는 유일한 길이요, ‘차돌에 바람이 들면 백리를 날아 간다’는 우리 속담도 있듯이 늦바람은 무서운 것이오" 하시면서 ‘소인기(少忍飢) 하라"는 광해군 난정(亂政)때의 고사(古事)를 들려 주셨다.(<지조론>에도 이 이야기가 있다

 

 물론 아버지는 그 때의 유혹을 단호히 거절하셨고, 타계하시기 전까지 평생 고려대학에만 몸담으셨다. 이승만 독재정권과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을 붓으로 준엄하게 꾸짖으셨지만 권력이 감히 건드리지 못하였다. “한때의 적막(寂寞)을 받을지언정 만고(萬古)에 처량한 이름이 되지 말라"는 채근담(菜根譚)의 글귀는 명언 중의 명언이요, 이 시대의 지도자들이 명심해야 할 지표가 아닐 수 없다." <지조론>에 쓰신 이 말씀처럼 아버지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다 가신 것이다. 

 

 어린 시절 어느 추운 겨울 날이었다. 성북동 우리집에 어느 부잣집 부인이 지인의 소개로 찾아왔다가 케이크를 한 상자 선물로 놓고 갔는데, 그 손님이 간 뒤에 어머니께서 그 케이크를 자르시다가 상자 바닥에 뭔가 이상한 느낌이 나서 보니, 흰 종이에 싸여진 지폐가 깔려 있었다. 아버지께 말씀을 드렸더니 몹시 불쾌한 어조로 호통을 치시며 “그 사람이 얼마 못 갔을 터이니 당장 돌려주고 오라"고 역정을 내셔서 그걸 돌려 주느라 온 가족이 애를 먹었다. 그 부인이 무슨 연고로 찾아왔는지는 잘 모르지만, 자기 아들 대학 입학이나 편입을 부탁하러 오지 않았었나 추측해 본다.  “냉면 한 그릇을 얻어먹거나 와이셔츠 한 벌을 얻어 입어도, 준 그 사람에게 이미 매인 바 된 것"이라는 생각을 지니셨던 아버지셨다.

 

# 9 사라져가는 민족정서와 문화를 사랑하신 아버지

 

1967년 가을, 내가 대학 3학년때 출품한 건축작품이 제 17회 대한민국 미술대전(國展) 건축부문에 특선으로 뽑혀 경복궁에서 전시되었다. 그날 가족들의 부축을 받으며 힘든 호흡을 애써 고르시며 전시장 안으로 걸어오시던 아버지를 난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무렵 아버지는 지병이 깊어져서 전혀 외출을 못하고 집에서 요양하고 계셨다. 이 때에 남기신 마지막 시 <병에게>에서 노래하신 것처럼 아버지는 병을 친구 삼아 집에서 칩거하셨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내 작품을 보시려고 전시장을 찾아오신 것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린 날이었지만, 한스럽게도 그날의 외출은 아버지의 마지막 외출이 되었다.  

 

 내가 출품한 작품은 <동부서울 창동지구 쇼핑센터 계획안>이었는데 서구식 쇼핑몰은 물론 요즘의 백화점 같은 상업건물이 전무할 때라 내 딴에는 야심작으로 내놓은 것이었다. 그 해 국전은 건축부문에 대통령상이 돌아올 것이라는 소문도 무성하여 내심 기대도 했었다. 내 작품을 둘러보신 아버지는 “작품의 테마를 <민족문화 박물관>으로 설정했었더라면 더 좋았을 걸 그랬다"며 아쉬워 하셨다. 나는 그때만 하더라도 우리 문화의 중요성과 우리 멋의 깊이를 모르고 서양 것에만 눈을 돌리고 있었다. 그 무렵은 아버지가 고려대학교 부설 ‘민족문화연구소’ 소장을 하시며 민족문화연구와 한국학의 기초를 다지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계셨는데도 나는 별 관심이 없었다. 나는 국전에 대상을 받지 못한 불만으로 시상식에도 참석하지 않고 집에 틀어박혀 있었는데, 아버지는 우편으로 배달되어온 상장과 은메달을 전해주시며 “너무 상(賞)에 연연해하지 마라. 예술이 무르익기 전에 대가(大家)연 하든지, 과한 대접을 받거나 큰 상을 받는 것은 네 자신을 위해 좋지 않다”고 하셨다. 훗날 아버지의 글에서 “닭의 벼슬이 그립거든 초야에 묻힌 지렁이가 되는 공부를 하라"는 말씀을 접하고 나는 그때 나의 행동이 한없이 부끄럽기만 했다. 

 

 아버지는 당신의 전공은 시가 아니라 사실은 민속학과 역사학을 두 기둥으로 하는 한국문화사를 당신의 전공이라 여기신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 아버지의 시에 사라져가는 아름다운 우리 정서와 전통과 문화를 노래한 시가 많은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아버지는 40대 중반에 고려대학교부설 ‘한국 고전 국역위원회를 확대, 개편하시면서 ‘민족문화연구소'로 개칭하시고, 초대 소장을 하시면서 타계하실 때까지 이 일에 심혈을 기울이셨다. 첫 사업으로 <<한국문화사대계>> 전 7권을 기획하셨으나, 애석하게도 이 책이 완간되어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그러나 아버지가 심어 놓으신 꿈은 제자인 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에 의해 계속 이어져 갔다. 홍 총장은 10여년 후 책이 완간되어 출판기념회를 할 때 (김상협 총장시절), 유진오 전 총장이 이 사업승인을 해주던 그때 당시를 회고하며 “기획 당시에는 한갖 구름 잡는 이야기로 들리던 일”이 결국 실제로 책이 되어 나온 것을 보면서  '아 이런 게 시인의 공상이구나' 하시더라고 홍총장께서 당시의 감격을 회상하며 전해주신 적이 있다. 

 

이 무렵 아버지는 <한국문화사서설>도 집필하셨는데 아버지께서 원고를 탈고하신 후 출판사로 넘기기 전 책에 들어갈 도표(우리 민족의 이동경로 등을 표시한 세계지도) 디자인을 내게 맡기셨다. 나는 설계도면을 그릴 때 사용하는 제도 기구를 사용하여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는데 아주 만족해 하시는 아버지를 보며 내가 더 기뻐했던 기억도 새롭다. 

 

# 10 아버지의 풍류와 술 이야기

 

  아버지를 추억하면서 술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다. 나의 어린 시절 기억 중 제일 많이 남아 있는 기억이 술좌석의 아버지 모습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술 드시고 밤늦게 제자나 친구분들과 함께 왁자지껄 들어오시면, 나는 사랑방에서 자다가 눈을 비비며 베개와 이불만 말아 안고 안방으로 건너가곤 했다. 

 

 아버지는 술보다 사람을 좋아해서 마음에 드는 사람들과는 나이를 안 가리고 늘 어울려 마셨고 이야기를 즐기셨다. 그런 아버지였으니 당연히 우리 사 남매의 기억에 남아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우리집 사랑방 술자리에서의 모습이 대부분일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밖에서 술 드신 후에도 제자들이나 주붕(酒朋)들과 함께 집에 들어오셔서 밤새 드시는 일이 많으셨었는데, 그럴 때마다 어머님이 다시 술상을 차려야 했던 적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서로 댓귀를 이어가며 혹은 곡이 붙은 시암송(한국 시뿐만 아니라 한시, 시조, 외국시)을 하시기도하고 동서고금의 유머와 해학과 문사철(文史哲)을 넘나들며 담론을 즐기셨다. 

 

 고대 4.18 선언문을 쓰신 박찬세 선생(당시 고대 신문 학생 편집장)이 4.19 혁명 후 어느 날 밤 원고 청탁 차 정종 한 병을 들고 우리집을 방문하셨다. 당연히 술자리가 벌어졌는데 얘기를 하다 보니 새벽 한 시가 되었다. 들고 간 정종은 물론 어머니가 내놓으신 술도 다 마셨는데, 아버지께서 일어나시더니 술을 더 가지고 오겠노라고 하셨다 한다. 주전자를 들고 서재에 돌아오신 아버지는 박선생에게 다시 술을 권하시더란다. 박 선생이 마셔보니 웬걸 술이 아니라 맹물이었다. “선생님 이건 물이 아닙니까?” 했더니 “그래 물일세, 술로 알고 마시면 술이 되는 거지. 술은 인정인데, 그 물 속에 정이 담겨 있으면 술이 되는 거야”라고 하시더란다 . 물잔을 주고 받으며 새벽녘까지 마시고 나오면서 박 선생은 “역시 한국의 조지훈이야!”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실제로 그렇게 정을 마시고 흥에 취하는 분이셨다.

 

  또 아버지의 제자 김인환 선생(고려대 명예교수)은 지난 날을 회상하며  “대학 1학년 때 국문과 1학년 모두가 구자균 선생님 묘소에 간 적이 있어요. 학생들이 돌아가며 노래를 하는데 선생님도 일어나 시를 두 수 읊으셨지요. 한편은 영어로, 한편은 한문으로 읊으셨어요. 지금도 기억하는데 영시(英詩)는 “술은 입으로 들어오고, 사랑은 눈으로 들어오는 것, 우리 늙어서 죽을 때까지 기억할 것은 이것 뿐이리"라는 예이츠의 <술노래>였고, 한시(漢詩)는 “인생은 정이 많아 눈물이 옷깃을 적시는데 이 강물 이 강꽃이 어느 날에 다하랴"라는 두보의 <哀江頭>였어요. 1학년 시절 그런 선생님이 너무 멋있게 보여서 나도 영어 공부, 한문 공부 해야지 결심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대학에 들어와서 배운 것이 내가 배운 것의 모두라고 생각하는데 지훈이 없었다면 내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생각해도 지훈 선생은 잊지 못할 스승이고 은인이십니다.” 

 

아버지는 지식인들이 뽑은 ‘한국의 주선(酒仙) 10 걸(傑) ‘중 3위에 오른 한국 풍류사(風流史)에 손꼽히는 풍류인이셨다. 1998년, 동아일보에 실린 <한국의 주선 10걸>이란 신문 기사에 따르면, 1위에 황진이로 시작해서, 2위에 변영로, 3위에 조지훈, 4위 김삿갓(김병연), 5위 김시습, 6위 임재, 7위 김동리, 8위 임꺽정, 9위에 대원군, 공동 10위는 원효대사, 연산군, 박종화의 순이었다. 선정 기준으로서 주선의 자격은 한국의 고금(古今)에 있어 두주불사의 주량과 풍류가 특출한 당대의 호걸에 해당하는 인물로서 낙주종생(樂酒終生)의 생애를 산 사람에 한했는데, 여기 해당하는 인물로 추천된 사람은 모두 140명이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서 아버지가 3위로 뽑히셨던 것이다.

 

 천년 동안의 주객 10걸 중 제 3걸에 뽑히실 정도였으니, 아버지의 술에 관한 일화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주도유단(酒道有段)>이란 수필에서 아버지는 “그 사람의 주정을 보고 그 사람의 인품, 직업은 물론 그 사람의 ‘주력(酒歷)’과  주력(酒力)’을 당장 알아낼 수 있다"고 하셨고, “주도에도 엄연히 단이 있다”며 술을 마신 연륜, 같이 마신 친구, 마신 기회, 술을 마신 동기, 술버릇을 종합해 그 단의 높이를 정한다"며 무릇 열여덟의 계단을 설정하여 매기기도 하셨다(지면 관계상 이 열 여덟 단계의 설명은 생략한다. 인터넷에서 <주도유단>을 검색하면 볼 수 있다).  당신은 그 열 여덟의 단계 중 아홉번 째인 학주(學酒) - 술의 진경을 배우는 사람, 즉 주졸(酒卒)-로서 “소졸이지만 아마추어 주원(酒院)의 사범 쯤은 능히 감당할 수 있었건만 20년 정진에 겨우 초급으로 이미 몸은 관주(觀酒)의 경지에 있으니, 돌돌(咄咄) 인생사 한도 많음이여!” 하시며 익살을 떨기도 하셨다.

 그런 당신은 절대로 혼자서 술을 마시는 법은 없으셨다. 그렇다고 집에 술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술이 조금이라도 없으면 서운하기 때문이라 하셨는데, 실은 술친구가 오기를 기다리셨던 것이다. 아까운 술이 썩는 한이 있더라도 함부로 남을 주지도 않으셨다. 또 되도 않게 취하는 자에게는 술을 주는 것은 차라리 술을 썩히는 것만 못하다고 믿고 계셨다. 아버지는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의 칠정(七情)에 흥분되었을 때 술을 마시면 안된다는 도리를 배웠다"고 하시며, “화풀이 술을 비롯한 일체의 잠재감정을 술로써 풀거나 선동하는 것은 술의 사도(邪道)라는 것을 알았다. 술은 언제나 무료와 권태의 극복을 위해서 마실 때가 상책”이라 하셨다. 아버지는 술이 취한 다음보다는 취하는 과정, 즉 술 마신 흥취를 좋아하셨다.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인정(人情)을 마시고 술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흥에 취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가 주선이냐 아니냐, 주도가 몇 단 몇 급이냐 하는 문제보다는 그 술의 멋과 풍류와 호방함인데, 나는 여기서 아버지가 오대산 월정사 시절에 즐겨 마신 삼도주(三道酒) 얘기를 꼭 하고 싶다. 삼도주란 아버지가 손수 빚은 술에 명명한 이름인데 아버지는 <삼도주>란 수필에서 “중니(仲尼:공자)선생이 애써 가꾸신 쌀과 노담옹(老翁 :노자)이 손수 만든 누룩으로 실달다(達多 :석가모니) 상인(上人)이 길어 오신 샘물로 빚은 술"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그 술을 마시면서 “머루 맛에서 노자(老子)가 웃는다./  솔잎 맛에서 불타(佛陀)가 웃는다./ 당귀 (當歸)맛에서 공자(孔子)가 웃는다. /…/ 삼도주를 마시고 도(道)를 그만 잊고 만다”고 하셨다. 삼도주란 그 흔한 막걸리이다. 서민적이고 대중적인 우리의 토속주 막걸리의 양조에 공자, 노자, 석가모니를 동원하고 그 취흥의 진미에다 유교, 불교, 도교 삼교의 진수를 계합시켜 ‘삼도주'라 명명하며, 도주(道酒)의 흥취 속에 자적(自適)하는 22세의 조숙함, 그런 나의 아버지의 멋과 풍류와 호방함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리고 이런 경지에서 노닐었던 아버지의 술에 대해 몇단이냐 몇급이냐를 따진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부질없는 일이 아닐까.

 

 # 11 ’멋'을 이론화한 멋쟁이 아버지 

 

 아버지는 또한 멋쟁이셨다. 풍류인으로서의 멋만이 아니라 옷 입는 것도 멋있으셨다. 한복, 양복을 때와 격에 맞게 잘 갖추어 입으셨다. 집에서는 언제나 희거나 옅은 옥색 또는 회색이 도는 색의 한복을 즐기셨다. 두루마기는 주로 검정색에 검은 명주 목도리를 하시고, 보기좋게 넓은 이마에 리젠트 스타일로 뒤로 넘긴 헤어스타일과 잘 어울리는 굵은 뿔테 안경을 쓰셨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잘 어울리지 않는 나비 넥타이, 베레모도 잘 어울렸고 젊은 나이에 단장(短杖)을 짚고 걸으면 영국신사 못지않게 멋지셨다. 아버지께서 단장을 사용하시기 시작한 것은 아마 30대 후반부터가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그 나이에 단장은 아무에게나 어울리지 않음에도 아버지에게는 참 잘 어울렸다. 고개는 한껏 하늘을 향해 치켜들고 단장을 상하(上下)로 여유 있게 흔드시며 천천히 품위 있게 걸으셨다.

 

 아버지는 한국 고유의 멋을 당신 스스로 체득하셨을 뿐 아니라, 그것을 이론화하는 데도 깊은 관심을 기울이셨다. ‘멋'을 이론화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셨다.

 

" ‘멋', 그것을 가져다 어떤 이는 ‘도'(道)라 하고 '일물'(一物)이라 하고, '일심'(一心)이라 하고 대중이 없는데, 하여간 도고 일물이고 일심이고 간에 오늘밤엔 ‘멋'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는 것이 아니라 태초에 멋이 있었다. 멋을 멋이게 하는 것이 바로 무상(無常)인가 하면 무상을 무상하게 하는 것이 또한 '멋'이다. 변함이 없는 세상이라면 무슨 멋이 있겠는가. 이 커다란 멋을 세상 사람은 번뇌(煩惱)라 이르더라.  가장 큰 괴로움이라 하더라. 우주를 자적(自適)하면 우주는 멋이었다. 우주에 회의(懷疑)하면 우주는 슬픈 속(俗)이었다. 나와 우주 사이에 주종의 관계가 있어 이를 향락하고 향락 당하겠는가. 우주를 내가 향락하는가 하면 우주가 나를 향락하는 것이다. 나의 멋이 한 곳에서 슬픔이 되고 속(俗)이 되고 하는가 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즐거움이 되고 아(雅)가 되는구나."

 

 ‘멋 설(說)’이라는 수필의 일부다. 아버지는 약관 22세에 이미 정신적 멋쟁이셨던 것이다.

 

# 12 아버지가 낭송하신 마지막 노래

 

 돌아가시던 해 어머니 생신 때였나 보다.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딸, 나의 누이 동생 혜경이에게 “내일이 네 어머니 생일이니, 혜경이 네가 한 번 밥을 지어 봐라“고 하셨다. 아마 그동안 당신의 아내에게 무척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였을 것이다. 또한 이제 곧 성년이 될 하나밖에 없는 딸이 직접 지은 밥을 꼭 한 번 잡숴보고 싶어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까. 그때 이미 아버지는 당신이 이제 얼마 못 사신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기에 혜경이더러 녹음기를 가져 오라고 하셨을 것이다. 이런 추측을 하게 하는 것은 나의 고모님도 생신이 어머니와 같은 날이어서, 그 날 모처럼 온 가족이 모여 저녁식사를 하고 난 후, 아버지께서 당신의 시 <절정(絶頂)>을 읊으셨기 때문이다. 그때 우린 그걸 녹음하였다. (이 육성 녹음은 훗날 아버지의 고향, 경북 영양 주실마을에 건립된 ‘지훈문학관'에 비치되어 있다). 그 날 아버지는 당신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젊어서부터 죽음을 준비해 오신 아버지! 젊은 시절에 쓰셨던 그 시를… 그날로부터 일주일 후에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가족들 앞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읊으신 시 <절정>을 소개한다.

 

" 나는 어느새 천 길 낭떠러지에 서 있었다. 이 벼랑 끝에 구름속에 또 그리고 하늘가에 이름모를 꽃 한송이는 누가 피워 두었나 흐르는 물결이 바위에 부딪칠 때 튀어 오르는 물방울처럼 이내 공중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 그런 꽃잎이 아니었다. // 몇만 년을 울고 새운 별빛이기에 여기 한송이 꽃으로 피단 말가. 죄지은 사람의 가슴에 솟아오르는 샘물이 눈가에 어리었다간 그만 불붙는 심장으로 염통 속으로 스며들어 작은 그늘을 이루듯이 이 작은 꽃잎에 이렇게도 크낙한 그늘이 있을 줄은 몰랐다. // 한 점 그늘에 온 우주(宇宙)가 덮인다. 잠자는 우주가 나의 한 방울 피 속에 안긴다. 바람도 없는 곳에 꽃잎은 바람을 일으킨다. 바람을 부르는 것은 날 오라 손짓하는 것, 아 여기 먼 곳에서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 보이지 않는 꽃나무 가지에 심장이 찔린다. 무슨 야수(野獸)의 체취(體臭)와도 같이 전율(戰慄)할 향기가 옮겨온다. // 나는 슬기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한송이 꽃에 영원(永遠)을 찾는다. 나는 또 철모르는 어린애도 아니었다. 영원한 환상(幻想)을 위하여 절정(絶頂)의 꽃잎에 입맞추고 길이 잠들어 버릴 자유를 포기(抛棄) 한다. // 다시 산길을 내려온다. 조약돌은 모두 태양을 호흡하기 위하여 비수(匕首)처럼 빛나는데 내가 산길을 오를 때 쉬어가던 주막에는 옛 주인이 그대로 살고 있었다. 이마에 주름살이 몇개 더 늘었을 뿐이었다. 울타리에 복사꽃만 구름같이 피어 있었다. 청댓잎 잎새마다 새로운 피가 돌아 산새는 그저 울고만 있었다. // 문득 한 마리 흰나비! 나비! 나비! 나를 잡지 말아다오. 나의 인생은 나비 날개의 가루처럼 가루와 함께 절명(絶命)하기에 …. 아 눈물에 젖은 한마리 흰나비는 무엇이냐. 절정의 꽃잎을  가슴에 물들이고 사(邪)된 마음이 없이 죄 지은 참회(懺悔)에 내가 고요히 웃고 있었다." 

 

 기력이 다 하여 숨이 가쁘고 탁하고 쉰 목소리로 “흰 나비! 나비! 나비!” 하시던 그 애처로운 음성이 지금 내 귓전을 때리고 있다. 그 시를 읊으신 후에는 나의 고모님, 곧 당신의 누이동생과 함께 시 <낙화>를 읊으셨다. 맨 마지막 연에 가서는 오누이가 약속이라도 하신 듯 “꽃이이 지느은 아치임은 우우울고 싶어어라 ~ “하며 곡조를 붙여 읊으시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나도 당신이 그리울 때면 혼자서 소리내어 그렇게 읊어보곤 하는 걸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아시는지…

 

# 13 아버지와 나만의 추억으로 남은 삽화

 

 아버지가 그리워질 때면 늘 떠오르는 나만의 추억, 아름다운 삽화 한 폭이 있다. 대구 피란 시절 아버지는 첫 시집을 펴내셨다. 그 시집의 제목을 <풀잎 단장(斷章)>이라고 붙이고, 나에게 그 글씨를 쓰게 하셨다. 아버지가 써 주신 제목을 한옥 대청마루에 엎드려 나는 빨강 크레용으로 보고 베꼈다. 쓴 게 아니라 그렸다고 하는게 맞을 것이다. 삐뚤빼뚤하게 보고 그린 글씨를 만족해하시며 첫 시집의 표지로 삼으셨다. 그리고 표지 뒷면에 낙타천으로 만든 고급 양복을 해 입히고 찍은 나의 사진을 싣고, 표지 글씨를 쓴 당신의 장남 광렬이라고 소개하셨다. 초등학교 입학 전인 아이의 글씨는 훗날 내가 보아도 애교 있고 자못 예술적(?)이기까지 했다. 그 시집이 지금은 내 수중에 남아있지 않으니 이 아쉬움을 어찌 달랠까.

 

 생전 부귀(生前富貴) 사후문장(死後文章)이라 하셨던 아버지! 그 아버지는 48년이라는 짧은 삶을 통해 그것을 이루셨다. 그런 아버지가 자랑스럽다. “마음이 가난해야 참 부귀를 아는 법"이라는 말씀의 뜻을 불혹의 나이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음이 부끄럽고 부끄러울 따름이다. 해바라기처럼 언제나 밝은 태양만을 향해 사셨던 아버지! 지금도 아버지의 목소리가 방안 가득히 울리는 것 같다. “광렬아! 죽음을 공부하며 살고 있느냐?"

 

 아버지의 추억이 담긴 기억의 서랍을 조용히 닫으면서, 지난 5월 17일, 아버지 52번째 기일(忌日)을 맞아 집안의 장남으로서 한국에 있는 식구들과 공유했던 나의 추모의 글 일부를 여기 옮기며 이 글을 마칠까 한다.

 

 “올해는 아버지 탄신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리고 쉰 두번째 기일인 이 특별한 날을 맞이하여 우리 가족들은 어떤 삶이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일까? 삶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일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세가지 명제의 답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나는 아버지의 삶을 통해 죽음을 생각하며 사는 삶이 인생을 더 풍요롭고 가치 있게 만들어 준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는 건강한 삶을 위해 삶에서 죽음을 보아야 한다. 죽지 않을 것처럼 살지 말아야 한다. 그리 해야만 위의 세가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즉 어떻게 살 것인지, 무엇이 행복한 일인지,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지를 깨달을 수 있으며, 스스로 진정한 가치를 찾은 뒤에, 그것을 목표로 삶을 다듬어 나가는 것이 의미 있는 인생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그래서 잘 살아야 한다. 또한 잘 죽어야 한다.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삶을 바라보면, 삶의 자세가 달라진다. 자신의 현재를 사랑하게 된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가족들은 죽음에 관한 다양한 경우에 대해 미리 생각해 두자. 그것이 잘 죽는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 각자 삶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간절히 원하게 될 것을 미루지 말고 지금 하자.

 

  한번 밖에 살 수 없는 삶, 유한한 삶,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선물에 감사하고 사랑하며 살자. 우리가 살고 떠난 뒤에, 왔다 간 흔적을 남기는 일, 이름을 남기는 일도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 나이를 살고 보니, 그보다 더 중요하고 값진 일은, 생전에 함께했던 사람들에게 사랑을 남기고 떠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오늘 아버지 기일 52주년을 맞아, 나는 내 스스로 지나온 날들을 다시 한번 반성하면서, “진정한 성공이란 가장 가까운 사람(내가 사랑받고 싶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말을 사랑하는 우리 가족들과 공유하고 싶다. 우리는 비록 아버지와 같이 명예롭고 의로운 이름과 큰 족적을 세상에 남기고 떠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가 죽은 후에, 생전에 맺은 인연들에게 잊지못할 ‘사랑의 기억', 아름다운 ‘사랑의 향기'를 듬뿍 남기고 떠날 수 있는 진정으로 성공한 삶, 행복한 우리 가족 모두가 되어 주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아버지께 부끄럽지 않은 삶을 위해 새 출발, 새 마음, 새 헌신을 다짐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면서 아버지께서 남기신  시 <마음의 태양>을 공유하고자 한다."

 

 "꽃다이 타오르는 햇살을 향하여 / 고요히 돌아가는 해바라기처럼 / 높고 아름다운 하늘을 받들어 / 그 속에 아름다운 넋을 살게 하라. // 가시밭 길을 넘어 그윽히 웃는 한 송이 꽃은 / 눈물의 이슬을 받아 핀다 하노니 / 깊고 거룩한 세상을 우러르기에 / 삼가 육신(肉身)의 괴로움도 달게 받으라. //  괴로움에 짐짓 웃으량이면 / 슬픔도 오히려  아름다운 것이 / 고난을 사랑하는 이에게만이 / 마음 나라의 원광(圓光)은 떠오르노라. // 푸른 하늘로 푸른 하늘로 / 항상 날아오르는 노고지리같이 / 맑고 아름다운 하늘을 받들어 / 그 속에 높은 넋을 살게 하라" 


                                        <<PEN 문학>> 156호, 2020년 7,8월호 특집 ‘탄생 100주년 -조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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