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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學♡書堂

퇴계 이황의 생애

by 권석낙 2019. 9. 8.

 
출생 - 사망 :
1501년 (경상북도) - 1570년
경력 :
1568년 우찬성
1566년 공조판서
1543년 대사성
1542년 충청도 암행어사
1534년 문과 급제
이황의 생애

1. 출생

   퇴계의 성은 이, 이름은 황이다. 퇴계는 연산군 7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현 노송정 종택

   태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사 이식이고, 어머니는 의성 김씨와 춘천 박씨 두 분이다. 재취로 들어온 박씨

   가 서린, 의, 해, 증, 황, 등 5형제를 낳았는데 퇴계는 그 막내이다.

2. 초년기

   출생에서 33세까지 유교경전을 연구하는데 열중하였던 수학기 퇴계의 부친은 서당을 지어 교육을 해 보려던 뜻

   을 펴지 못한 채, 퇴계가 태어난지 7개월 만에 40세의 나이로 돌아가시고, 퇴계는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게 되었다. 부친이 돌아가시던 당시 맏형 한 분만 결혼하였을 뿐 다른 형제는 모두 어려서, 가족의 생계를 어머니가 홀로 농사와 누에치기로 이어가는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어머니는 전처에는 난 자녀를 차별하지 않고 길렀다고 한다. 퇴계가 “나에게 영향을 가장 많이 준 분은 어머니”라 할만큼 어머니는 “과부의 자식은 몇 백배 더 조신해야 한다”는 엄한 기법을 세워 자녀를 교육하였다.

3. 중년기

   34세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여 49세 때 풍기 군수를 사직하고 귀향할 때까지의 임관기 퇴계는 3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여 43세 때까지 대체로 순탄한 관료 생활을 보낸다. 그러나 이때에도 끊임없이 학문 연마에 정진하였다. 종 3품인 성균과 대사성에 이른 43세의 퇴계는 이 때부터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갈 뜻을 품는다. 이후 52세 때 까지 그는 세 차례나 귀향과 소환을 반복하면서 관료 생활에서 벗어나 야인 생활로 접어드는 일종의 과도기를 준비한다.

4. 만년기

   50세~70세 때까지 임명과 사퇴를 반복하면서 고향에서 연구, 강의, 저숭에 전념한 강학기 퇴계는 50세 이후에는 고향의 한적한 시냇가에 한서암과 계상서당 및 도산서당을 세우고, 그의  학덕을 사모하여 모여드는 문인들을 가르치며 성리학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물러난 후에도 조정에서는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 의정부 우찬성, 판중추부사 등 계속하여 높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거듭 사직 상소를 올려 받지 않았으며 마지못해 잠시 나갔다가도 곧 사퇴하여 귀향하기를 반복하였다.

5. 사망

   선비의 품격은 생애를 마치는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퇴계는 70세 되던 1570년 1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12월 3일 자제들에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빌려온 서적들을 돌려보내게 하였으며, 12월 4일 조카에게 명하여 유서를 쓰게 하였다. 이 유서에는 1)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을 사양할 것, 2)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의 전면에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 라고만 새기고, 그 후면 에는 간단하게 고향과 조상의 내령, 뜻함과 행적을 쓰도록 당부하였다. 12월 5일 시신을 염습할 준비를 하도록 명하고, 12월 7일 제자 이덕홍에게 서적을 맡게 하였으며, 그 이튿날 세상을 떠났다.

 

이황의 사상

1. 이기론

   퇴계의 사상은 정자, 주자의 입장을 바탕에 둔 정주학의 토대 위에서 세워졌다.

2. 심성론(인성론)

   이처럼 퇴계는 정주의 입장을 자신의 학문적 토대로 하여 출발하였지만 깊이를 더하여 감에 따라 독자성을 띠게 되었고, 마침내 정주의 차원을 넘어서게 되었는데 그 좋은 예가 심성론 특히 사단칠정론이다.

3. 수양론

   퇴계의 학문정신의 이론적 정밀성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완성을 추구하는 수양론으로 열려 있기 때문에, 인간의 심성을 살아 움직이는 현실 속에는 이해한다는데 중요한 특징이 있다.

 

이황의 업적

1. 공직자

   * 깨끗한 청백리로서의 모습을 보여줌.

   * 백운동서원을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으로 만들었음.

   * 79번이나 벼슬을 사퇴하여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의연한 모습을 보여줌.

   * 경복궁의 기문과 상량문, 현판 글씨, 외교 문서 들을 작성하여 명성을 떨침.

2. 교육자

   * 서원건립에 힘써서 많은 서원의 기초를 마련하고 많은 제자를 양성함.

   * 과거시험준비나 출세를 하기 위한 학문 풍토를 개선함.

   * 올바른 교육을 위하여 손수 교과서를 만들고 새로운 교육과정을 수립함.

   * 학문하는 태도의 모범을 보이고 바람직한 선비상을 확립함.

   * 제자를 사랑하는 올바른 스승상을 정립함.

3. 문학자

   * 2000편이 넘는 많은 시를 남김.

4. 사상가

   * 고봉 기대승과의 4단 7정에 관한 논쟁을 통하여 학문적 논쟁의 모범을 보여주고, 성리학의 심성론을 크게 발전시킴.

  * 수양론의 실천방법을 정밀하게 규명하여 조선시대 도학의 기본틀과 독자성을 정립함.

  * 일본에 많은 영향을 줌.

5. 생활인

  * 에안향약 곧 향약입조 28조를 정하여 향촌의 풍속을 교화함.

  * 합리성을 존중하여 현실애 맞는 예법을 시행함.

  * 한 평생 ‘경’의 태도를 실천하여 인격자의 모범을 보여줌.

  *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극진함.

 

이황의 일화

생후 일곱 달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박씨 부인은 농사와 길쌈으로 가난한 살림을 꾸려나가며, 여러 자녀들을 학업에 정진하게 하였다.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여러 자식들을 앞에 불러놓고, "너희들은 아버지가 계시지 아니하므로 남의 집 아이들과는 달라서 공부만 잘해도 안된다. 공부를 남보다 잘해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행실을 각별히 삼가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행실이 방정하지 못하면 과부의 자식인 까닭에 옳게 가르치지 못해 그렇다고 남들이 손가락질을 할 터인즉, 너희들은 그 점에 각별히 명심하여 훌륭하신 조상들에게 욕을 돌리지 않게 하여라." 하고 수 없이 타일렀던 것이다.

다른 지식in에 써 있던거 퍼온겁니다.

 

서기 1500년 대에의 세계적 인물로 가정 뛰어나신 지성인이요, 사상가요, 학자였습니다. 동산마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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